2013.11.13
OSEN=이상학 기자
[OSEN=이상학 기자] 롯데 포수 강민호(28)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고액 FA로 초대박을 쳤다. 천운을 타고난 사나이답게 역사를 썼다.
강민호는 13일 롯데 구단과 4년 총액 75억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11일 첫 협상 때부터 두 번이나 만남을 갖는 등 충분한 교감을 이뤘고, 13일 두 번째 협상에서 금액까지 합의하며 계약 발표에 이르렀다. 지난 2004년 11월 현대에서 삼성으로 옮기며 4년 총액 60억원을 받은 심정수의 최고액 기록도 9년 만에 경신했다.
강민호가 이처럼 FA 초대박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실력이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역사를 쓸 수 없다. 하지만 강민호의 대박에는 '운'이라는 요소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앞으로 강민호 같은 사례가 두 번 다시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나이로 불릴 만하다.
강민호는 13일 롯데 구단과 4년 총액 75억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11일 첫 협상 때부터 두 번이나 만남을 갖는 등 충분한 교감을 이뤘고, 13일 두 번째 협상에서 금액까지 합의하며 계약 발표에 이르렀다. 지난 2004년 11월 현대에서 삼성으로 옮기며 4년 총액 60억원을 받은 심정수의 최고액 기록도 9년 만에 경신했다.
강민호가 이처럼 FA 초대박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실력이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역사를 쓸 수 없다. 하지만 강민호의 대박에는 '운'이라는 요소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앞으로 강민호 같은 사례가 두 번 다시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나이로 불릴 만하다.

제주도 출신으로 포철중-포철공고를 거친 강민호는 지난 2004년 신인 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3라운드 전체 17순위로 롯데에 지명됐다. 당시 고졸 포수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비교적 높은 순위에 롯데로부터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계약금은 9000만원으로 특급 유망주 수준은 아니었다.
2004년 프로 데뷔 첫 해 1군에서는 3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당시 롯데에는 최기문이라는 공수겸장 포수가 주전으로 뛰고 있었다. 강민호의 자리는 백업이었다. 하지만 강민호는 최기문으로 인해 기회를 잡았다. 최기문이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고, 강민호에게 갑작스럽게 주전 기회가 온 것이다.
강민호는 프로 2년차였던 2005년 주전과 백업을 넘나들며 104경기를 뛰었다. 20살 어린 포수가 프로 1군에서 100경기 이상 뛰는 건 흔치 않은 기회. 최기문이 수술 후 재활에 들어간 2006년부터 롯데 안방은 강민호의 차지가 됐다. 2006년에는 126경기 모두 출전하며 가능성을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포수로서 경험이라는 최고 자산을 쌓은 시기였다.
2007년부터 공수겸장 신예 포수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강민호에게 두 번째 행운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진갑용의 백업 포수로 시작했으나 그가 부상을 당하자 주전 마스크를 쓰고 금메달을 견인했다. 결승전 막판 심판 볼 판정에 격분에 글러브를 집어던지는 장면은 유명했다. 당시 금메달로 그는 20대 선수의 가장 큰 고민인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
병역이 해결된 20대 주전 포수는 강민호가 유일했다. 이미 그때부터 강민호의 FA 대박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2010년 타율 3할5리 23홈런 72타점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찍은 강민호는 그러나 2011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공격 지표에서 꾸준히 하락세를 보였다. 하지만 투수리드와 수비력에서 향상을 이루며 보완을 이뤘고, FA 시장에서 최고 대우를 받기에 이르렀다.
FA 시장 상황도 강민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두산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팀들이 포수 고민을 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포수 세대교체가 더뎠고, 강민호를 탐내지 않는 구단이 없었다. 게다가 롯데는 지난 2년간 이대호 홍성흔 김주찬 등 내부 FA들을 모두 놓치며 흥행에 타격을 입었다. 강민호마저 빠지면 치명타를 입을 게 뻔했다.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롯데는 일찌감치 최고액을 베팅하며 눌러 앉혔다. 강민호는 시장에도 나가지 않았지만, 이미 FA 최대어로 분류돼 최고액에 사인했다. 심각한 포수 품귀 시대와 롯데의 흥행 실패까지 겹치면서 강민호는 FA 사상 최고액 대박을 쳤다.
waw@osen.co.kr
강민호는 프로 2년차였던 2005년 주전과 백업을 넘나들며 104경기를 뛰었다. 20살 어린 포수가 프로 1군에서 100경기 이상 뛰는 건 흔치 않은 기회. 최기문이 수술 후 재활에 들어간 2006년부터 롯데 안방은 강민호의 차지가 됐다. 2006년에는 126경기 모두 출전하며 가능성을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포수로서 경험이라는 최고 자산을 쌓은 시기였다.
2007년부터 공수겸장 신예 포수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강민호에게 두 번째 행운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진갑용의 백업 포수로 시작했으나 그가 부상을 당하자 주전 마스크를 쓰고 금메달을 견인했다. 결승전 막판 심판 볼 판정에 격분에 글러브를 집어던지는 장면은 유명했다. 당시 금메달로 그는 20대 선수의 가장 큰 고민인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
병역이 해결된 20대 주전 포수는 강민호가 유일했다. 이미 그때부터 강민호의 FA 대박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2010년 타율 3할5리 23홈런 72타점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찍은 강민호는 그러나 2011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공격 지표에서 꾸준히 하락세를 보였다. 하지만 투수리드와 수비력에서 향상을 이루며 보완을 이뤘고, FA 시장에서 최고 대우를 받기에 이르렀다.
FA 시장 상황도 강민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두산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팀들이 포수 고민을 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포수 세대교체가 더뎠고, 강민호를 탐내지 않는 구단이 없었다. 게다가 롯데는 지난 2년간 이대호 홍성흔 김주찬 등 내부 FA들을 모두 놓치며 흥행에 타격을 입었다. 강민호마저 빠지면 치명타를 입을 게 뻔했다.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롯데는 일찌감치 최고액을 베팅하며 눌러 앉혔다. 강민호는 시장에도 나가지 않았지만, 이미 FA 최대어로 분류돼 최고액에 사인했다. 심각한 포수 품귀 시대와 롯데의 흥행 실패까지 겹치면서 강민호는 FA 사상 최고액 대박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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