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위대한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명언



요기베라의 본명은 로렌스 피터 베라(Lawrence Peter Berra)지만
선수시절 가부좌를 틀고 앉은 듯한 그의 모습이 마치 요가 수행자처럼 보여서 그에게 '요기'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치 있는 말솜씨로도 유명한 요기베라는 "It aint over til its over(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멋진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

출처: http://blog.daum.net/rewty/8734266


'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야구는 시작된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포수가 사인을 내고 투수가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야구의 시작이다.

수비시 나머지 8명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포수는 그라운드의 야전 사령관이다. 포수는 수비 부담이 가장 큰 포지션이며, 포수의 수비력은 투수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투수진 전체를 관리해야 하다 보니 팀의 리더인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방망이가 약해서도 안 되는 게 요즘 포수다.
유일하게 열 손가락 모두를 우승 반지로 채울 수 있는 요기 베라는 최고의 리더였다. 역대 최고의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는 이반 로드리게스는 골드글러브를 가장 많이 따냈다. 마이크 피아자는 장타력에서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베라의 리더십과 로드리게스의 수비력, 피아자의 장타력을 모두 지닌 포수가 있었으니, 바로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수로 불리는 자니 벤치다. 어떤 이는 벤치를 <마이크 피아자와 찰스 존슨의 결합>으로 부르기도 한다.

최고의 포수

벤치가 마스크를 쓴 13년(1968~1980년)은 신시내티 레즈의 129년 역사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신시내티는 1970년대에만 6번의 지구 우승(당시는 2개 지구)과 4번의 리그 우승, 그리고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75-76년 신시내티 이후 월드시리즈 2연패에 성공한 내셔널리그 팀은 없다.
벤치는 '붉은 기관총 군단'(Big Red Machine) 최고의 타자 중 1명이었으며(벤치는 주로 4번 또는 5번을 쳤다) 팀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였다(이에 벤치의 별명은 '리틀 제너럴'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벤치(2회)보다 더 많이 리그 MVP를 따낸 포수는 베라(3회)와 로이 캄파넬라(3회) 2명뿐이다.
빌 제임스는 베라를 역대 1위 포수로 꼽으면서도(벤치 2위), 그러나 완성도가 가장 높았던 포수(best pure catcher)로는 벤치를 선택했다. 벤치는 베라보다 훨씬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다. 2000년에 있었던 팬 투표에서 벤치는 베라를 제치고 '20세기 최고의 팀' 포수가 됐으며, 1999년에 발간된 <스포팅뉴스>의 20세기 최고 선수 랭킹에서도 포수로서는 가장 높은 16위에 올랐다.
이반 로드리게스는 13개의 골드글러브를 따내 10개를 기록한 벤치를 제쳤다. 하지만 골드글러브 50주년을 맞이해 2007년에 있었던 <올타임 골드글러브 팀> 투표에서 벤치는 총 2만9000여표를 얻어 1만4000여표에 그친 로드리게스를 더블 스코어 차이로 눌렀다. 로드리게스의 시대는 공격형 포수의 시대였지만 벤치의 시대는 수비형 포수가 넘쳐나던 시대라 경쟁이 훨씬 치열했다.
1970년대 포수들은 지금보다 훨씬 투박하고 무거운 장비들과 싸웠다. 특히 잘 다물어지지 않는 미트에 두 손으로 포구를 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미트를 끼지 않는 오른손 부상이 빈번했다. 하지만 벤치는 제조업체에 경첩을 달아 잘 접어지는 미트를 주문한 다음 한 손 포구에 나섰다. 포수들이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출 수 있게 된 시작점이었다. 훗날 벤치는 한 손 포구의 창시자는 자신이 아니라 랜디 헌들리라고 밝혔지만, 이를 정착화시킨 것은 벤치였다.
벤치는 그 외에도 현재 포수 수비의 기본이 되고 있는 여러 동작들을 만들어냈다. 마스크 아래 모자 대신 처음으로 헬멧을 쓴 것도 벤치였다.
벤치의 등장은 포수의 역사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기도 하다. 베라-로이 캄파넬라-미키 코크레인이 사라진 이후, 메이저리그에는 수비형 포수가 득세했다(1960년대가 최고의 투고타저 시대였던 것에는 이들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968년 벤치가 나타남으로 인해 흐름은 다시 바뀌었다.
벤치(통산 .267 .342 .476)는 포수로서는 피아자(427개) 다음으로 많은 389개의 홈런을 때려냈다(순수 포수 홈런만 따지면 1위 피아자 396개, 2위 칼튼 피스크 351개, 3위 벤치 326개). 또한 1376타점은 베라(1430타점)에 이은 포수 2위다. 벤치의 기록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베라, 피아자와 달리,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극심했던 투고타저 시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40홈런-100타점을 달성한 포수는 벤치를 포함해 5명(나머지는 캄파넬라, 피아자, 토드 헌들리, 하비 로페스). 벤치는 피아자와 함께 이를 2차례 달성했으며, 유일하게 포수로서 홈런왕(2회)에 올랐다. 벤치는 3홈런 경기를 3번 만들어낸 유일한 포수이기도 하다(개리 카터 2번, 피아자 1번). 지금까지 타점왕에 오른 포수는 벤치를 포함해 4명(나머지는 캄파넬라, 개리 카터, 대런 돌턴). 3차례 1위에 오른 벤치를 제외하면 2차례 오른 선수도 없다.

천재의 등장

자니 리 벤치(Johnny Lee Bench)는 1947년 12월7일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서 태어났다. 3형제 중 막내였던 벤치는 오클라호마주 최고의 스타였던 미키 맨틀을 우상으로 삼고 자랐다. 한편 벤치에게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섞여 있는데, 그는 증조부 중 1명이 인디언 촉토족 출신이었다.
벤치의 아버지는 그가 타고난 포수임을 눈치챘다(특히 벤치는 어마어마하게 큰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손에 야구공 7개를 쥘 수 있었다[사진]). 이에 벤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스크를 썼으며, 19살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많은 포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벤치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야구 팀 버스가 전복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2명의 선수가 사망했지만, 벤치는 털끝 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고교 졸업반 때 벤치는 팀 사정 때문에 주로 투수로 등장했다. 이에 많은 팀들이 투수로서 덜 다듬어진 벤치만 보고 갔다. 하지만 벤치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신시내티는 그가 포수로서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에 신시내티는 1965년 제1회 드래프트에서 벤치를 2라운드 전체 36순위로 지명했다. 특히 신시내티 다음으로 벤치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바로 앞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볼티모어가 두 번 모두 다른 선수를 지명한 것이 다행이었다.
1967년 만 19세의 나이로 데뷔한 벤치는 이듬해인 1968년 스프링캠프에서 테드 윌리엄스를 만났다. 벤치는 윌리엄스에게 사인볼을 요청했는데, 벤치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윌리엄스는 공에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어줬다.

'To Johnny Bench, a Hall of Famer for sure'
(명예의 전당이 확실한 자니 벤치에게)

그 해 벤치는 .275 15홈런 82타점을 기록하고 신인왕이 됐다. 포수가 신인왕이 된 것은 1947년 상이 제정된 이래 처음이었다. 154경기 출장은 신인 포수 최고 기록이었으며, 내셔널리그 포수로는 최초로 40개의 2루타를 날렸다. 또한 벤치는 골드글러브를 따낸 최초의 신인이 됐는데, 투표권을 가진 감독들이 주로 '뽑던 선수를 뽑는' 골드글러브는 신인에게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스무살짜리 포수였던 벤치가 얼마나 노련했는지는 다음의 일화가 말해준다. 그 해 스프링캠프에서 벤치는 8년차 베테랑 짐 말로니의 공을 받아주고 있었다. 말로니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위력이 크게 떨어진 패스트볼만 고집하고 있었다. 이에 벤치의 변화구 사인을 무시하고 패스트볼만 던졌다.
마운드에 올라갔다가 욕만 진탕 먹고 돌아온 벤치는, 이번에도 말로니가 사인을 무시하고 패스트볼을 던지자 잽싸게 미트가 아닌 맨손으로 공을 잡았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공을 돌려줬다. 그제서야 자신의 패스트볼이 과거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말로니는 이후 철저히 벤치의 사인을 따랐다. 그리고 이듬해 벤치와 함께 노히트노런을 만들어냈다.

벤치의 타격 모습 ⓒ gettyimages/멀티비츠

빅 레드 머신

1969년 벤치는 .293 26홈런 90타점을 기록하며 더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무려 .571에 달한 도루 저지율이었다. 벤치의 통산 도루 저지율은 .435로, 10년 이상을 뛴 포수 중 이반 로드리게스(.456)와 서먼 먼슨(.445)에 이은 역대 3위에 해당된다.
벤치는 1976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믹 더 퀵'(Mick the Quick)으로 불린 미키 리버스(1975년 70도루)의 도루 시도를 무시무시한 송구로 잡아냈는데, 양키스는 이후 월드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도루 시도를 하지 않았다.
1970년 벤치의 무시무시한 공격력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물두살의 벤치는 .293 45홈런 148타점을 기록,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고 내셔널리그 역대 최연소 MVP가 됐다. 45홈런과 148타점은 1953년 캄파넬라의 41홈런 142타점을 경신한 포수 신기록이었다. 한편 벤치는 45개 중 7개를 다른 포지션(1루수 외야수)에서 기록했는데, 포수 홈런만 따지면 2003년 하비 로페스가 기록한 42개가 최고 기록이다(토드 헌들리 41개 2위, 피아자-캄파넬라 40개 3위).
1971년 잠시 주춤했던 벤치는 1972년 .270 40홈런 125타점의 성적으로 2번째 홈런-타점 동시 석권과 함께 2번째 리그 MVP에 올랐다. 특히 6월에는 5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1970년부터 1978년까지 9년간, 벤치는 매년 골드글러브와 함께 연평균 30홈런 104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벤치(268홈런 933타점)보다 더 많은 홈런이나 타점을 기록한 타자는 없었다.
벤치의 활약은 포스트시즌에서도 빛났다. 벤치는 1972년 피츠버그와의 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최종전에서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동점 솔로홈런을 날렸다. 결국 신시내티는 2사 1,3루에서 폭투로 결승점을 얻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1973년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에서도 벤치는 메츠의 에이스이자 그 해 사이영상 수상자였던 톰 시버를 상대로 끝내기홈런을 날렸다.
1976년 월드시리즈는 그 정점이었다. 벤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양키스의 기동력을 완벽히 봉쇄했을뿐 아니라 4경기에서 .533 2홈런 6타점의 맹타를 휘두르고 시리즈 MVP가 됐다. 특히 4차전에서는 4회 1-1 동점 균형을 허무는 투런홈런을 날린 데 이어, 3-2로 앞선 9회초 쐐기 스리런홈런을 날려 양키스에게 4연패라는 수모를 안겼다. 양키스가 40번의 월드시리즈에서 4연패를 당한 것은 이 때가 3번째(1922년 자이언츠, 1963년 다저스)이자 마지막이었다.

조금 이른 퇴조

베라에게 캄파넬라가 있었다면, 벤치에게는 피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베라와 캄파넬라의 활약 시기가 겹쳤던 것과 달리(이들은 1951년부터 1955년 사이 각자의 리그에서 3개씩의 리그 MVP를 따냈다), 벤치와 피스크는 그렇지 않았다.
피스크는 벤치와 생일이 거의 같았다(벤치 1947년 12월7일생, 피스크 1947년 12월26일생). 하지만 피스크는 벤치(1968년)보다 4년 늦게 신인왕을 따냈으며(1972년), 벤치가 리그를 지배한 첫 8년 동안 특별한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0대가 되면서 둘의 상황은 역전됐다. 벤치는 30세 시즌이었던 1978년 .260 23홈런 73타점 시즌을 시작으로 하향세가 시작됐다. 반면 피스크는 29세 시즌부터 터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벤치보다 10년을 더 뛰고 은퇴했다.

만 29세 시즌까지(첫 풀타임 - 벤치 20세, 피스크 24세)
벤치  : .268 .343 .484 / 1513경기 287홈런 1038타점
피스크 : .285 .360 .489 /  699경기 114홈런 376타점
만 30세 시즌 이후(은퇴 - 벤치 35세, 피스크 45세)
벤치  : .265 .337 .454 /  645경기 102홈런 338타점
피스크 : .263 .333 .444 / 1800경기 262홈런 954타점

1981년 벤치는 무릎 상태가 더 이상 포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자 1루로 이동했다. 하지만 발목 골절 부상으로 52경기 출장에 그쳤다. 1982년 .258 13홈런 38타점, 1983년 .255 12홈런 54타점에 그친 벤치는 결국 1983년 만 35세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벤치의 이른 퇴장은 '투수의 어깨'처럼 '포수의 무릎' 역시 소모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벤치의 무릎은 아버지의 조기 교육과 빠른 데뷔 탓에 너무 빨리 닳았다.
그렇다고 벤치가 포수로서 롱런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데뷔 후 13년 연속으로 100경기 이상 마스크를 쓴 것은 벤치가 사상 최초였으며, 이는 지금도 내셔널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다. 벤치는 데뷔와 함께 10년 연속으로 골드글러브를 따냈으며, 데뷔 첫 해부터 1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다.
1989년 벤치는 칼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96.4%의 득표율은 당시 역대 3위였으며, 지금도 포수 최고의 득표율로 남아 있다(야스트렘스키 94.6%). 당시 벤치가 100%에 실패하자 한 신문에는 <벤치에게 100%를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줄 수 있겠냐>는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2000년 미국대학야구협회는 최고의 포수에게 주는 상을 만든 후 <자니 벤치 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켈리 쇼팩, 라이언 가코, 커트 스즈키, 버스터 포지 등이 이 상을 받았다(한편 2004년부터 대학 최고의 투수에게 줬던 '로저 클레멘스 상'은 클레멘스의 약물 논란이 있은 2008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역대 1,2위의 포수 자니 벤치(왼쪽)와 요기 베라 ⓒ gettyimages/멀티비츠

자니 벤치

출처: http://opinion.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131982&g_menu=049103
김형태 기자 horse@joynews24.com
2004.12.07


자니 벤치

1947년 12월7일 자니 벤치가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수로 여겨지는 벤치는 뛰어난 투수리드 능력과 장타력을 동시에 보유한 보기 드문 선수였다.

가장 위대한 포수가 누구냐는 질문은 그다지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벤치 대신 이름을 올릴 포수는 드물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주(洲) 최고선수로 선정되며 비범함을 드러낸 벤치는 68년 타율 0.275,15홈런,82타점을 기록하며 NL 신인왕을 수상했다.

0.293,45홈런,148타점을 올린 70년과 0.270,40홈런,125타점을 기록한 72년에는 리그 MVP를 차지하며 절정기를 보냈다. 특히68년부터 77년까지 10년 연속 포수부문 골드글러브를 휩쓸며 최고의 '안방마님'으로도 행세했다.

벤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빅레드머신'을 이끈 공로다. 한 세대를 풍미한 팀은 여럿 존재했지만 70년대 신시내티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팀도 드문 것이 사실이다.

피트 로즈, 토니 페레스, 조 모건, 조지 포스터, 페드로 보본 등 개성강한 스타들을 다독여 스파키 앤더스 감독과의 가교역할을 해낸 공로야말로 벤치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기에 손색없다.
신시내티는 70년대에만 지구우승 6회, 리그우승 4회, 월드시리즈우승 2회를 기록하며 70년대를 초토화했다. 공수양면에서 그리고 팀의 정신적 지주로서 벤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야구기술적인 면에서도 벤치는 특기할 만한 사항을 남겼다. '포수는 반드시 두 손으로 투수의 공을 받아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원핸드 캐칭'법을 최초로 시도한 선수가 그였다.

포수용 헬멧을 처음 착용한 것도 그였다. 이전만 하더라도 야구모자를 대충 뒤로 돌려 쓰던 관행에서 탈피해 제대로 된 보호장구를 착용한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83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벤치는 89년 무려 96.4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일각에서는 100% 득표율이 안 나온 게 오히려 미스테리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야구사에 있어 벤치의 족적이 워낙 뚜렷했기 때문이다.

김형태 기자 horse@joynews24.com


'09 MLB 플레이오프 포수 출신 감독이 주류


출처
http://bksports.tistory.com/m/post/view/id/380 밝은터
2009/10/17 14:19


(1966 Joe Torre Front by cthoyes    포수 시절 조 토리)

2009년 메이저리그 야구(MLB)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한 팀들의 감독의 면모를 보면 두드러지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포수 출신의 감독이 주류라는 것이다. 조 토리(LA 다저스), 마이크 소시아(LA 에인절스), 그리고 조 지라디(뉴욕 양키스)는 선수 시절 포수로 활동 했던 감독들이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찰리 매누엘 감독만이 외야수 출신이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ALCS) 1차전에서 에인절스에 4-1로 승리한 양키스의 감독 조 지라디는 90년대에 뉴욕 양키스의 '안방마님'이었던 포수 출신이다. 당시 손발을 맞췄던 앤디 페티트, 마리아노 리베라 등은 지금 양키스 선수로 뛰고 있다.

에인절스의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1980년 메이저리그에 데뷔, 1992년 은퇴하기까지 줄곧 다저스 안방을 지킨 올스타 포수였다. 다저스에서 감독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난 2000년 타운 라이벌인 에인절스 감독이 된 소시아는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뉴욕 양키스의 조 토리 감독도 포수 출신이다. 그는 1965년 밀워키 브레이브스에서 주전 포수로 활동하며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바 있다. 토리 감독은 선수 생활 후반부에는 1루수와 3루수로도 뛰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뉴욕 메츠, 플로리다 말린스 등에서 감독 생활을 했던 제프 토보그는 "포수는 투수와 대화를 많이 하고 경기 내내 공을 받고 공을 던진다. 포수는 또 공격도 어느 정도 잘해야 하고 필드 전체를 봐야 하기 때문에 넓은 안목이 있어 지도자가 되면 인기가 높은 것 같다"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설명한 바 있다.

그의 말에 부연 설명을 달자면 포수는 야구 선수가 해야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경기 중에 자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주류 언론의 한 기자는 메이저리그 포수와 캐치볼을 했던 경험을 소개하면서 "공이 정말 빨라 받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포수는 어깨가 강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는 포수가 '팔방미인'이어야 한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분야를 다 아는 선수 출신이 지도자가 될 때 선수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메이저리그 단장과 구단주의 생각이고 그래서 감독 중에는 포수 출신이 많다.

앞서 포수가 인기 있는 이유를 설명한 토보그 감독도 포수 출신이다. 추신수의 소속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도 포수 출신이다. 시즌을 끝으로 인디언스를 떠나는 에릭 웨지 감독은 메이저리그 출전 경기 수는 적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주로 포수로 뛰었던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브루스 보치 감독도 선수 시절 포지션이 포수였다.

이 밖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짐 릴랜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밥 게렌, 시애틀 매리너스의 돈 와카마쓰, 탬파베이 레이스의 조 매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A.J. 힌치, 플로리다 말린스의 프레디 곤잘레스, 밀워키 브루어스의 켄 마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존 러셀도 선수 시절 주업이 포수였다. 이 밖에 얼마 전까지 메이저리그 감독이었던 존 기븐스, 밥 멜빈, 제리 내런, 토니 페냐, 로이드 맥클렌든 등도 주로 포수로 활동했던 지도자다.

2009년 메이저리그 감독 13명이 포수 출신이니 전체의 3분의1이 넘는다. 필드에 설 수 있는 외야 자리가 3개, 내야 자리 4개, 포수 자리 1개, 투수 자리 1개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은퇴 후 감독 자리는 거의 포수 출신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감독이 될 것으로 보이는 포수 출신


 Craig Alan Biggio by GuppyStorm    

Craig Alan Biggio
포지션/투타: 2루수ㆍ외야수ㆍ포수, 우투좌타
올스타 7회 출전
실버슬러거 4회 수상
골드글러브 4회 수상
2루타 1위 1회
득점 1위 2회
도루 1위 1회
사구 1위 5회
50 2루타 - 50 도루 기록
역대 최다 사구 기록
 


가장 대표적인 포수 출신은 크레익 비지오다. 2007년 은퇴한 휴스턴 애스트로스 출신의 비지오는 모두가 2루수 또는 외야수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포수로서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다. 데뷔 후 첫 4년까지는 주로 포수로 활동했던 비지오는 1992년 2루수로 전향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포수로 뛴 경기 수는 427경기나 된다. 비지오는 잠시 중견수와 좌익수로도 뛴 적이 있어 경험이 풍부한 감독이 될 것이다. 그는 현재 휴스턴 인근의 세인트 토마스 고교에서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포수 출신 주요 감독

Connie Mack and John McGraw by Boston Public Library  

포수 출신 감독 중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을 꼽으라면 카니 맥을 이야기하는 야구인이 많다. 맥 감독은 1894년부터 1950년까지 피츠버그와 필라델피아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3,731승을 기록해 최다승 부문 1위에 올라있다. 그는 선수 시절 풀타임 캐처였다.
클리블랜드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감독 생활을 했던 앨 로페스도 1,410승을 기록한 히스패닉계 2세 감독으로 선수시절 수비가 좋은 포수로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이었던 자니 오츠(1996년 올해의 감독상 수상)도 70년대에 LA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 애틀랜타 등에서 뛰었던 포수 출신이다.


포수(捕手) 리더십



포수(捕手) 리더십

강진구 | 2009.12.14

후끈 달아올랐던 2009년도 프로야구에서는 특히 포수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높았다. 투수나 유격수에 비해 포수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 않는 포지션이다. 그러나 감독에게 좋은 포수의 존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기업 경영의 시각으로 포수를 들여다 보면 리더십 관점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으로 올 한해는 야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한국시리즈에서 9회말 역전 끝내기 홈런이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보여주었던 국내 프로야구는 사상 최대의 관중 기록을 경신하기도 하였다.

흔히 ‘야구의 꽃은 투수’라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포수(捕手)’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순위 경쟁이 치열하던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포수가 안정된 팀의 성적이 오르는가 하면 주전 포수들이 부상을 당한 팀은 여지없이 성적이 곤두박질치곤 하였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미네소타 트윈스 팀의 포수 조 마우어가 올해 MVP로 뽑히기도 하였다.

투수나 유격수에 비해 포수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 않는 포지션이다. 그러나 감독에게 좋은 포수의 존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포수는 전체 야수들을 바라보면서 경기하는 유일한 포지션이다. 투수를 포함한 8명의 야수가 모두 상대 타자의 방망이 끝만 바라보고 있을 때 포수는 그런 동료들의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관찰한다. 마치 다수의 구성원들을 동시에 바라봐야 하는 조직의 리더와 같다.
미국의 아버지들이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칠 때 필독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가르쳐 줄 101가지 야구이야기」라는 책에는 가장 영리하고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포수로 택하라는 충고가 있다. 포수야말로 리더십이 필요한 포지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더십 관점에서 배울 점이 많은 포수의 세계를 경영의 시각으로 들여다 보자.


아르고스의 눈

좋은 포수의 제 1 조건은 넓은 시야다. 포수는 최소한 다섯 군데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첫째 투수와 항상 눈빛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둘째, 감독의 사인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투수와 수비수들에게 전달하려면 벤치도 바라봐야 한다. 셋째,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의 움직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작은 몸짓과 표정에서 허점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누상에 나가 있는 상대팀 주자의 움직임도 추적하고 있어야 견제 사인을 내거나 도루를 저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라운드에 퍼져 있는 우리 수비수의 위치도 수시로 파악해야 한다. 이 밖에도 상대팀의 벤치와 주루코치, 그리고 심판도 수시로 살펴야 하는 대상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몸 전체에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괴물 아르고스가 나온다. 제우스가 이오 공주와 바람을 피우다 헤라에게 들통날 위험에 처하자 공주를 암소로 변신시켰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헤라는 괴물 아르고스에게 명하여 암소를 감시하도록 한다. 잠을 잘 때에도 두 개의 눈만 감고 자면서 사방 경계를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는 아르고스의 눈이야말로 좋은 포수의 필수 조건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쟁터인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야생 동물들이 보여주는 생존 전략을 기업 경영의 시각으로 연구한 책 「세렝게티 전략」에는 넓은 시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동물로 기린이 나온다. 기린의 눈은 포유류 중 가장 크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6미터 높이에서 사방을 두루 살필 때 멀리 지평선에 있는 조그마한 움직임도 잡아낼 정도로 시력도 뛰어나다. 우두머리 기린은 아득히 먼 곳에서라도 포식자를 발견하게 되면 무리를 안전한 곳으로 미리미리 이동시킨다. 기린에게 종족 보존의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넓은 시야인 것이다.

크건 작건 조직을 책임지는 리더라면 넓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중요한 업무나 우수한 인재에만 시야를 좁혀서는 곤란하다. 코닝의 HR부사장인 리처드 오리어리는 한국에서 열린 2009년 글로벌 HR포럼에서 “1%의 핵심인재에만 집중하다 99%의 더 중요한 역량들을 잃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리더는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 모든 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포수와 마찬가지로 리더에게도 아르고스의 눈이 필요한 것이다.


탁월한 심리전략가

팀을 승리로 이끄는 포수들은 심리를 잘 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포수는 투수의 심리 상태에 따라 가장 편안하게 호흡을 맞추어 주어야 한다. 또한 타석에 들어서는 상대 타자의 작은 숨소리나 습관적 몸짓에서 심리 상태를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등 뒤에 서있는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성향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하여 코스를 공략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심리 활용에 능한 포수가 팀 승리에 숨은 주역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훌륭한 포수는 팀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대개 유명한 포수들을 보면 약간의 쇼맨십과 활달하고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는 성적이 좋지 않아 심리적으로 위축될 때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 it’s over)’라는 유명한 말로 팀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칭기즈칸의 유럽 정복 시발점이 된 호라즘(지금의 이슬람권) 전쟁 당시의 이야기다. 몇 달에 걸쳐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이동하느라 지친 부하들이 낯선 기후와 토양, 적은 숫자의 군대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때 칭기즈칸은 우호적이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항복하면 무사하지만 저항하면 무자비하게 도륙 당한다’는 공포심을 군대에 앞서 먼저 보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부하들에게 알리며 ‘이미 적들은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다’는 말로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결국 탁월한 심리 전략으로 싸우기도 전에 승기를 잡은 칭키즈칸은 손쉽게 호라즘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수의 심리 활용 능력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뛰어난 포수와 그렇지 못한 포수는 경험과 학습량에서 판가름된다. 국내 프로야구의 경우 포수는 한 팀에 보통 20여 명이나 되는 투수 모두의 강약점, 투구성향과 성격까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이나 상대 팀 타자,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한 학습이 있어야 실전에서 적절한 심리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부하들의 심리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소 끊임없는 관심과 이해 노력 등 많은 학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알 필요가 있다.


묵묵한 이타주의자

포수는 야구에서 가장 힘들고 고단한 포지션이다. 다른 선수와 달리 유일하게 쪼그려 앉아 경기를 한다. 그것도 얼굴에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4kg이 넘는 보호 장구를 몸에 두른 채로 일어섰다 앉기를 수백 번씩 반복한다. 포수라면 무릎 관절에 이상이 오는 것을 숙명으로 여길 정도다. 평균 4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경기에 더운 여름철이면 보호 장구 속에서 한증막을 체험하기 일쑤다. 공격과 수비가 전환될 때면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들어와 장비를 입거나 벗어야 한다. 투수와 달리 휴식을 위한 로테이션도 적용되지 않기에 주전 포수는 매 경기 투입되곤 한다. 홈으로 쇄도하는 상대팀 주자를 태그 아웃 시키려면 온몸으로 저지해야 하며 이때가 부상의 위험도 가장 높다. 자동차보다도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이 배트에 빗맞아 얼굴이나 몸으로 날아들기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 그러나 포수가 이런 처지에 불만을 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포수는 앞에 나서기 보다 언제나 뒤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여를 하는 ‘그림자 리더십(Shadow Leadership)’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야구 경기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가 포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타자가 공을 치게 되면 포수는 반사적으로 마스크를 벗고 타자처럼 1루 뒤 쪽을 향해 뛴다. 1루 송구가 뒤로 빠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타자가 친 공이 높이 뜨면 누가 잡아야 할지 큰 소리로 알려주고 번트 수비에서는 박차고 뛰어나가 스스로 공을 잡든지 아니면 어디로 던져야 할지를 지시한다. 훈련 시에도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것이 자신의 타격이나 수비 연습보다 더 중요시된다. 또한 여러 명의 투수를 위해 공을 받아주는 일은 자신의 기술만 연마하면 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가장 힘들고 많이 뛰는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포수는 그 중요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대 미국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야구 선수 중 포수의 숫자가 꼴찌에서 두 번째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표 1> 참조). 미국 메이저리그의 올스타 포수 출신인 폴 로두카는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공을 던져야 할 지 대부분의 경우 투수와 포수는 생각이 일치한다. 그러나 혹시 생각이 다르더라도 투수가 원하는 공을 던지도록 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되어 포수의 볼 배합 능력이 도마 위에 올라도 포수는 묵묵히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는 외롭고 힘든 자리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알아야 할 것과 챙겨야 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반대로 리더의 고민과 어려움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이는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리더는 포수와 마찬가지로 힘든 역할에 불만을 품어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조직에 대한 기여와 부하들의 성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낄 때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어머니 같은 편안한 품

포수는 야구장의 ‘안방마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홈플레이트 뒤에서 경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투수에게 가장 편안한 품을 제공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수는 투수가 강속구와 변화구를 가리지 않고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도록 아무리 까다롭게 날아드는 실투라도 몸을 던져 막아내야 한다. 위기에 몰린 투수가 심리적으로 흔들릴 때면 즉시 마운드에 올라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야구 전문가들에 따르면 볼 배합 능력보다 투수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능력이 포수의 핵심 역량이라 한다. 좋은 투구를 이끌어내는 ‘투수 리드’는 천재적 두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인성과 친화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상급 포수들은 서글서글한 성격과 인간적인 매력으로 동료들에게 인정받는다. 경기나 훈련 시간 이외 일상 생활에서도 포수는 투수와 거리감 없이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경기 당일 투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할 때 감독이 포수의 의견을 중시하는 것도 이런 ‘감(感)’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 당시 9회 역전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었다. 당시 김경문 감독은 진갑용 포수의 의견에 따라 당초 계획과 달리 정대현 투수를 투입하였다고 한다. 결국 우리나라의 금메달 획득에는 포수의 감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훈씨는 연주자들이 가장 편안해하는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연습 시간에는 한 음을 30분 이상 연주시킬 정도로 혹독하지만 실제 연주에서는 지휘대에 올라 지휘봉을 들어 올리기 전에 언제나 연주자들을 향해 애정이 듬뿍 담긴 부드러운 미소를 보낸다. 초긴장 상태에 있는 연주자들에게 시작에 앞서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월드컵 폴란드와의 첫 경기 전날 밤에 선수들을 한 명씩 불렀다. 그간의 체력 측정 결과와 함께 ‘내가 지도했던 레알마드리드 선수들보다 너희들의 체력이 더 우수하다’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당시 주장 홍명보 선수는 “네 차례의 월드컵 출전 가운데 가장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히딩크 감독은 선수에게 편안함을 주는 리더였다.

편안함은 업무적 관계만으로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최고의 축구 감독으로 칭송 받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 상태나 경기 감각은 물론 그라운드 밖에서의 사생활, 정신적인 자세 등에도 꼼꼼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가장 편안한 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누구나 더 많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부하에게 편안함을 주려면 불안한 모습으로 실투성 공을 던지는 부하를 ‘온 몸으로 블로킹’ 해주는 노련한 포수와 같은 리더가 되어야 한다.


준비된 리더

올 한해 한·미·일 3국의 프로야구 감독들을 보면 유난히 포수 출신이 많다(<표 2> 참조). 국내 프로야구 우승을 차지한 조범현 감독이나 베이징 올림픽에서 국민들에게 금메달의 감동을 선사해 준 김경문 감독 모두 포수 출신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챔피언십 시리즈를 치른 4개 팀 가운데 무려 3개 팀 감독이 포수 출신이며 전체의 43%에 해당하는 13명의 감독이 포수 출신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꼽히며 통산 3,731승을 거둬 역대 최다승 1위에 올라 있는 카니 맥 역시 선수 시절 포수로 활약하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포수 출신인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이 이끄는 니혼햄 파이터스가 올해 퍼시픽리그에서 우승을 하였다.

포수는 야구의 모든 포지션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관찰한다. 따라서 팀 전체를 이해하고 이끌어가는 감독 역할에 보다 유리하다. 올해 우승을 차지한 조범현 감독은 “포수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투수와 타자의 움직임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경기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한다. 포수는 경기를 통해 게임 전체를 꿰뚫어 보는 감독의 시각을 평소에 자연스럽게 연마하는 것이다.

리더십은 리더가 되고 나서 배워야 하는 역량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전문성이 높고 업무에 탁월하던 사람이 리더가 되고 나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왕왕 있다.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할이 달라지고 담당 범위가 넓어지는 것에 당황하는 것이다. 리더가 아닌데 어떻게 리더십을 미리 배울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포수에게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포수는 다른 모든 포지션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진다. 조직에서도 평소에 나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과 업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경험해 보지 않았던 업무나 분야의 지식에 대한 필요성이 더 커지게 된다. 리더나 동료, 부하들과의 관계에서 리더십을 고민하는 포수와 같은 ‘준비된 리더’라면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남보다 한 발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끝>


박찬호와 배터리 이룬 이반 로드리게스 은퇴


출처: http://sports.hankooki.com/lpage/mlb/201204/sp2012042417075895810.htm

박찬호와 배터리 이룬 이반 로드리게스 은퇴

김지섭기자 onion@sphk.co.kr
입력시간 : 2012.04.24 17:07:58


박찬호(39∙한화)와 텍사스에서 배터리를 이뤘던 이반 로드리게스(41)가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이들은 2002년 한솥밥을 먹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텍사스로 둥지를 옮기면서 만났다. 아메리칸리그 최고 포수로 군림하던 로드리게스는 든든한 존재였다. 그러나 박찬호는 허리 부상과 부진이 겹쳤다. 25차례 선발 등판해 9승8패 평균자책점 5.75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박찬호와 로드리게스의 인연은 딱 1년뿐이었다. 로드리게스는 2002 시즌을 마친 뒤 12년 동안 몸 담았던 텍사스를 떠났다. 플로리다로 이적한 뒤 디트로이트, 뉴욕 양키스, 휴스턴, 워싱턴 등을 거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 시즌을 끝으로 21년 동안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로드리게스의 은퇴식이 24일(한국시간) 친정팀 텍사스의 홈구장 레인저스 볼파크에서 열렸다. 로드리게스는 1991년 텍사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했다. 올스타전에는 14차례 출전했다. 또 13번의 황금장갑을 낄 만큼 뛰어난 수비력도 인정받았다. 통산 성적은 2,543경기에 나서 타율 2할9푼6리 311홈런 1,332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이날 은퇴식에서 명포수 출신답게 시구 대신 2루로 송구하는 세리머니를 했다. 텍사스 시절 동료였던 라파엘 팔메이로, 마크 맥레모어, 켄 힐 등도 참석했다. 놀란 라이언 텍사스 사장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도 자리를 빛냈다.

로드리게스는 “매우 힘든 날이다. 더 이상 야구 선수 로드리게스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다. 21년의 메이저리그 생활이 아름다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남은 인생을 앞으로도 야구와 함께 하고 싶다. 분명 야구계에 몸 담을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겠다”며 지도자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국아이닷컴 인기기사




출처: http://sports.donga.com/3/all/20120424/45771749/3

ML 명포수 이반 로드리게스 은퇴

입력 2012-04-25 07:00:00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트위터 @keystonelee

이반 로드리게스. 사진출처=워싱턴 내셔널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퍼지’ 이반 로드리게스(I-로드)가 팬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사진)

‘땅딸보(pudge)’라는 별명으로 친숙한 I-로드는 24일(한국시간) 친정팀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구장 레인저스파크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오늘은 나에게 매우 힘든 날이다. 21년간 위대한 여정이었고, 아름다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뉴욕 양키스-텍사스전에 앞서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선 그는 갑자기 마운드에서 내려와 포수로 앉아준 마이클 영을 2루로 가게 했다. 그러더니 명포수 출신답게 자신의 자리인 안방에 앉아 2루에 송구하는 것으로 시구를 마무리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I-로드는 1991년 빅리그에 데뷔해 통산타율 0.296, 311홈런, 1332타점을 기록했다. 14차례 올스타전에 출장했고, 13차례 골드글러브와 1차례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다.



퍼지 로드리게스의 아름다운 야구 인생


날짜 : 12-07-23 17:19

원문 : Hiram Martinez , "Ivan Rodriguez: 'A beautiful career'" 
http://espn.go.com/mlb/story/_/page/martinez-120720/ivan-rodriguez-stays-student-game-even-retirement 
[출처] ::::: 메이저리그 바다 :::::
http://mlbbada.com/bbs/board.php?bo_table=mlbnews&wr_id=401321



그는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난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침이 되면 그는 여전히 지난 25년동안 했던 것처럼 3시간동안 운동을 한다. 그 이후 집으로 돌아가서, 몇 시간 동안 쉰다. 최소한 이반 로드리게스의 삶에 있어서 매일 아침 일찍 하는 일은 여전히 똑같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그는 더 이상 타격연습을 하거나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야구장으로 가지 않는다. 또한 호텔에서 호텔, 구장에서 구장으로 가지고 다닐 원정경기용 여행가방을 꾸리지도 않는다. 지금 현재 유일하게 스윙하는 것은 6개월 162경기동안 쓰는 배트가 아니라 일주일에 몇 번씩 쓰는 골프 클럽이다. 

"골프 실력이 좀 좋아졌어요." 이 전설적인 포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현재 핸디캡 5입니다. 공도 잘 쳐내고 있는 중이에요." 

메이저리그에서 21년간 뛴 후, 로드리게스는 빅리그 첫 12년동안 몸담았던 레인저스 볼파크에서 4월 23일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오프시즌 동안 들어온 영입제의가 없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 여전히 2년정도 백업요원으로써 뛸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었다.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올스타전이 끝난 후,지난 20년동안 논쟁의 여지 없이 최고의 포수였으며,몇몇 사람들이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평가하는 로드리게스는 이제 다이아몬드에서 보낸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다. 

아마도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은퇴 발표 후 3달이 지났음에도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야구를 떠난 후의 새로운 인생에 완벽하게 적응하진 못하고 있다. 그는 홈플레이트 뒤에 앉아있는 것,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우측으로 2스트라이크 이후에 들어오는 변화구를 밀어치는 것, 주자가 누상에 있을 때 아드레날린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 그리고 클럽하우스에서 팀메이트들과 공유했던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야구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바뀌진 않을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야구는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도 저와 함께할 겁니다. 구장에 가서 시합을 준비하던 것이 그리워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저는 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1~2차례 뛴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은퇴) 결정을 내리는 게 참 힘들었었어요." 로드리게스가 덧붙였다. "항상 뭔가 아직 보여줄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이제 인생에서 이뤄야 할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해요. 여전히 바쁘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로드리게스가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원정여행과 호텔도 약간 그립긴 해요." 그가 말했다. "야구선수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똑같이 말 할겁니다. 집에서 오랫동안 떨어져있으면 가족이 많이 그립죠. 참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지만, 그래도 그립지 않은 것도 많아요." 

은퇴를 하면 몇몇 선수들은 최소한 잠깐 동안 야구에서 완전히 멀어진다. 하지만 로드리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경기장을 찾던 TV로 보던 간에 하루에 1~2경기 시청하지 않은 날이 없다. 

Still a student of the game 

마지막으로 홈플레이트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을때-2011년 9월 28일-, 로드리게스는 워싱턴 내셔널스 유니폼을 입고 잇었으며, 몇가지 남은 대기록 중 하나인 3000안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3000안타까진 156안타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하지만 커리어를 끝냈을 때, 그는 2543경기에 출장했으며,이중 2427경기에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이는 역사상 그 어떤 포수보다도 많은 기록이다. 그는 빅리그 전체 포수가운데 안타(2844), 2루타(572) 부문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통산 타율 0.296, 311홈런 1332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1999년 AL MVP를 차지했으며, 2003년에는 플로리다 말린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었다. 

하지만 특출난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수비가 뛰어난 포수로 더 알려져있다-그리고 홈플레이트 뒤에서의 성적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로드리게스는 통산 최다 풋아웃(14864)을 잡아냈으며, 9시즌 동안 AL 도루저지율 1위를 기록했다. 로드리게스가 받은 13번의 골든글러브는 가장 많이 비교대상이 되는 자니 벤치(10회)를 넘어선다. 

"제 수비력이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로드리게스가 말했다. "저 같은 경우 수비력 때문에 빅리그에 올라왔죠: 유일하게 나중에 배웠던 것이 타격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포수로써 최고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벤치나 다른 위대한 포수들이 어떻게 했는지 연구했죠. 포수는 수비가 중요시되는 포지션이며, (수비는) 항상 제 첫 번째 옵션이었죠." 

상대팀 주자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혹은 처음엔 몰랐다고 할지라도, 이후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2001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로드리게스는 자신을 상대로 뛴 주자들 가운데 60%(58번 시도 중 35회)를 잡아냈었다. "퍼지를 상대로 도루를 성공시키기 위한 공식 따위는 없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로드리게스의 상대였으며, 2008시즌 잠깐 팀메이트를 하기도 했었던 양키스 유격수 데릭 지터의 말이다. "홈플레이트 뒤에 앉아있는 퍼지를 상대로 가장 안전하게 있는 법은 그냥 베이스 근처에 붙어있는 거에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아웃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올스타전 팬페스트일때, 로드리게스는 현재 Beisbol Esta Noche의 야구 분석가이자 ESPN Deportes의 Domingo de Grandes Ligas 해설자를 맡고 있는 캔디 말도나도와 함께 포수로써 성공을 거둔 몇 가지 핵심 요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대화를 통해서 로드리게스가 지금도 빅리그 21년동안 간직해왔던 포수로써의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포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발가락입니다." 2루로 송구할 때 적절한 메커니즘을 설명하던 가운데 Maldonado에게 한 말이다. "팔과 발보다 집중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그리고 좋은 신체 컨디션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포지션입니다. 여러 가지 세부사항들에 대해 집중해야만 하죠." 

인터뷰 내내 로드리게스는 현재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스타 포수들의 등장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야디어(몰리나)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브라이언 매캔, 버스터 포지, 맷 위터스....전부 제가 존경하는 선수들이죠." 그가 말했다. "카를로스 루이즈 역시 이 그룹에 들어왔어요. 이 친구들은 경기를 이끌어나가고, 누상으로 송구하는 법을 알고 있으며, 공격 면에서도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죠." 


The biggest out of all 

확실히 HOF급 커리어에서 나오는 장면이었다.... 

1점차로 앞선 9회 2사 상황에서 로드리게스는 J.T.스노우가 3루 베이스를 도는 동안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스노우가 동점을 만들기 위해 홈으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로드리게스는 공이 글러브에 들어와서 다음 움직임을 가지기 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좌익수 제프 코나인의 송구가 원바운드로 로드리게스에게 들어왔다. 그는 안전하게 포구한 다음 홈플레이트 앞쪽에 버티고 서서 스노우의 돌진을 막아냈다. 주자는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며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로드리게스는 공을 홈플레이트 왼쪽으로 옮기면서 그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두 선수의 충돌은 아주 격렬했다. 퍼지는 한 바퀴 굴렀으며, 스노우는 땅바닥에 얼굴을 부딪혔다. 공은 로드리게스의 미트 안에 들어가 있었다 : 로드리게스가 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을 때 심판이 이를 체크했다. 스노우의 아웃. 말린스가 승리를 따내면서 시리즈 전적 3-1로 승리했고 자이언츠는 탈락했다. 

만일 로드리게스의 커리어를 정의해줄 수 있는 플레이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와의 2003년 NLDS를 끝낸 홈플레이트 블로킹일 것이다. 그 플레이로 인해 말린스는 NLCS에 진출했고, 이후 월드시리즈도 제패했었다. "가슴이 지금도 아파요." 로드리게스가 그 플레이를 떠올리며 농담을 했다. "아마도 제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였을 겁니다 - 혹은 최소한 탑 3안에 들거에요. 모든 아웃카운트가 나온 시리즈에서 그게 마지막 아웃이었고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항상 그 플레이가 없었다면, 아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 했을거라 생각해요." 

현재 말린스 감독이자 2003년 플로리다의 3루 베이스 코치였던 아지 기옌도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경기를 끝낸 방식은 뭔가 힘을 좀 더해줬어요. 음...'와우, 이걸 믿어야해'같이 말이죠." 말린스 파크에서 열린 로드리게스의 트리뷰트 행사 동안 기옌이 MLB.Com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로드리게스는 확실히 그런 분위기를 시카고 컵스와의 NLCS까지 끌고 나갔다. 그는 NLCS에서 타율 0.421,2홈런 10타점을 기록하며 MVP를 차지했고, 플로리다는 6차전 끝에 뉴욕 양키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Time for reflection 

그는 공식적으로 단 몇 달 정도 야구계를 떠나있었을 뿐이며,아마도 메이저리그 생활 21년동안 지금처럼 전적으로 자기 개발을 위한 시간이 긴 적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끊임없는 트레이닝,골프 라운드,가족과의 시간 및 사업 기획을 하는 가운데 말이다. 

수많은 야구계 안팎 관계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ESPNDallas.com에서 조사한 랭킹에 따르면 로드리게스는 놀란 라이언에 이어 레인저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톱 40위 가운데 2위에 올랐다. 논란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기옌은 2년전 로드리게스가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푸에르토리코 출신 선수라는 발언을 했으며, 이로 인해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고향에서 엄청난 논쟁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기옌은 그런 극찬을 취소하지 않고 있다. 

"스탯 및 여러가지 면을 보면 퍼지가 제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포수라고 생각합니다." 기옌이 MLB.Com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가 뛴 방식, 그리고 뛴 팀들을 살펴보면 쉽지 않은 길이었어요. 그는 텍사스에서 뛰었었죠. 플레이 방식을 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선수들이 별로 없다고 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퍼지보다 더 뛰어난 포수가 과연 있었을까요?" 

로드리게스는 올 여름 올스타전-그는 14차례 선정되었었다-이 열리는 가운데 자신의 기록을 살펴봤고, 이렇게 쌓아온 기록을 보면서 놀랐다는 것을 인정했다. 

"경기를 하고 있을 때면 어떤 목표나 스탯을 생각하진 않게 됩니다." 그가 말했다. "젊었을 때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유일하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생산력을 발휘하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경기에 뛸 준비를 하는 것이었죠. 이제 제 성적을 보니 '솔직히 정말 잘했구먼'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2000경기 출장의 위대한 기록, 위대한 포수 김동수 야구가 좋다!


글 출처:
by 바다를 달리는 갈매기
2010/05/16 19:06
Laridae.egloos.com/3280503


다음은 어떤 포수의 기록이다. 신인왕, 4번의 우승, 골든글러브 6회 수상, 200홈런, 통산 0.261의 타격, 51개의 도루 등등. 역사상 최고의 포수라고 지칭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으며 이전 세대의 이만수나 동시대라 불릴 수 있는 박경완도 한 수 접어야 할 것 같은 선수. 한국나이로 42세의 나이까지 포수로 뛰면서 사상초유의 기록인 포수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선수. 기나긴 선수생활 동안 영광의 시간과 함께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던 순간도 있었지만 모든 걸 이겨내고 당당히 정상에서 군림했던, 그리고 절망에 빠졌던 후배들을 다독이며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던 팀의 고참. 현재 팀의 배터리 코치로 있는, 이것이 역사상 최고의 포수인 김동수의 선수생활이다.

(역사상 '최고의 포수' 김동수. 그는 실력과 더불어 상복도 많은 선수였다.)

야구는 9명(지명타자까지 하면 10명)이 하는 스포츠이다. 각각의 포지션마다 특성이 있고 필요로 하는 능력이 있다. 어깨, 스피드, 유연성, 판단능력 등등. 수많은 능력들의 고저에 따라서 각각 포지션에 포진이 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곳에는 투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곳인 마운드에 우뚝 서있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경기를 혼자서 주름잡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투수는 야구의 꽃이면서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투수의 반대편에는 그라운드의 가장 음지에 서있는, 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팀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안방마님인 포수가 앉아있다.

포수란, 정말 힘든 자리이다. 혹자는 그냥 앉아있는데 뭐가 힘드냐 하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10분만 쪼그려 앉아 있어보면, 힘든걸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 몇 번만 하면 죽는 소리를 낸다. 더해서 10kg짜리 장비와 더불어 150km를 넘나드는 속구와 현란한 변화구를 글러브로 잡아내야 하며, 자칫 빠지기라도 할라치면 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인고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라운드에서 가장 민감한 존재인 '투수'를 다독이며 상대타자 혹은 주자와 두뇌싸움까지 벌여야 하는 그러한 어려운 자리이다. 그렇기에, 포수는 가장 느리게 성장하면서도 가장 빨리 선수생활을 끝낼 수 밖에 없는 고된 자리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시작부터 다른 포수들과 달랐다. 시작부터 그는 최고로 시작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90년에 등장한 트윈스의 포수 김동수는 시작부터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청룡-트윈스의 안방에 자리하고 있던 포수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포수라고 불리는 故심재원 포수였다. 그의 수비력은, 역대 그 어떤 포수와 비교해서 월등한 점수를 부여 받는다. 하지만 김동수는 그러한 선배를 몰아내고 팀의 주전포수로 자리잡는다. 그것도 포수치고는 새파랗게 어린 대졸신인의 신분으로 말이다. 물론 88서울올림픽에 대표로 선발되었으며 대학시절 이름을 날리던 포수였지만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신인에게 '주전포수'라는 중책을 맡기기에는 경험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해 신인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더불어 팀의 우승을 만끽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팀의 베테랑 투수들과 선배 심재원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그의 포수로써의 자질은, 그 어떤 포수보다 천부적이었던 것이다. 0.290의 타율과 13홈런, 15도루. 이후 99년까지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던 91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0.250이상의 타율과 잠실을 홈으로 쓰는 타자로 무시무시한 4할의 장타율을 과시하면서, 리그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올려놓는다. 그의 뛰어난 실력과 트윈스라는 멋진 팀의 배경은, 역시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손꼽히는 김동기와 박경완을 제치고 6번의 골든글러브 수상의 위업을 달성한다. 여기까지 그의 야구인생 1막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꾸준함으로 FA가 되었지만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유니콘스에서 그는 부활한다.)

그러나 첫 FA의 수혜자가 되었던, 99년 시즌종료 이후. 10년 동안 꾸준한 활약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 올린 그에게 언제나 'FA의 큰손'으로 군림했던 삼성이 손을 내밀었고 시원스레 싸인을 했다. 팀 내에 조인성이라는 국가대표 출신 포수와 김정민이라는 뛰어난 백업이 버티고 있었기에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거기서부터 그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극심한 슬럼프와 더불어 점차 줄어드는 출전기회는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최고의 포수 자리는 박경완에게 넘어갔으며 김동수는 지는 별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삼성은 그를 트레이드를 통해 SK로 넘겼으며 2002시즌 이후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삼성시절 사이가 다소 좋지 못했던 조범현이 부임하자 그는 방출 당한다. 그는 그렇게 선수생활을 정리해갔다.

하지만 당대 최강팀이었던 현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전포수 박경완이 FA를 통해서 와이번스로 이적하자 포수자리에 공백이 생긴 유니콘스는 김동수를 필요로 하였고, 김동수는 다시금 선수생활을 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애 최초 3할 타율과 함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7회의 골든글러브 수상. 이만수나 박경완, 그리고 진갑용과 홍성흔 같은 그의 선배나 경쟁자들 혹은 후배들이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는 현대 왕조의 안방을 단단히 수호하면서 연속우승의 기쁨을 만끽한다.

(부활한 그는, 7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그 어떤 포수도 범접할 수 없는 금자탑을 세웠다.)


현대왕조의 몰락은, 그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를 필두로 했던 고참들은 힘든 기색을 할 수 없었다.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팀을 추스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힘든 시간에도 팀은 최하위로 밀려나지 않았으며 더불어 왕조의 위엄을 마운드에서만큼은 뽐낼 수 있었다. 그러한 중심에 김동수가 있었다고 하면, 비약적인 발상일까? 그리고 유니콘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팀이 바뀌었을 때도 그는 당당히 팀의 안방을 지키면서 팀을 다독거렸다.

2009년.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그는 한걸음 물러섰다. 한국나이로 42세. 야구선수로써, 그리고 포수로써 나이를 환갑진갑을 다 넘긴 나이. 하지만 그는 포수장비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젊은 투수들의 공을 열심히 받아냈다. 약해진 어깨로 인해서 도루를 저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후배들을 위한 백업포수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의 모습은, 팀에 고참다운 기여가 아닌, 그 자체가 히어로즈였고 그 자체가 히어로즈의 마운드였다. 불펜에서 경기장을 응시하며 열심히 적어내려 가는 '플레잉 코치' 김동수의 모습은 그를 보는 팬에게 있어 그라운드에 서는 것과 맞먹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는 포수로써 '기록의 사나이'이다.
그가 포수로써 세운 기록들은 깨지기 어려운 기록들이다.)

이제는 배터리 코치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그가 포수로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히어로즈의 젊은 포수들을 조련하며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싸인을 내주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의 모습은 그가 아직 포수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는 분명, 포수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최고의 선수였음에 틀림없고, 뛰어난 코치가 될 자질을 갖춘 지도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를 전설로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니 말이다.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우리는 그를 덕아웃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박동희의 입장] 두산 양의지 "투수는 주연, 포수는 조연이다."


박동희 칼럼| 기사입력 2012-12-07 10:02 | 최종수정 2012-12-07 10:59

ⓒ 글: 박동희(스포츠춘추)

기사입력 2012-12-07 10:02

두산 주전 포수 양의지(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야구에선 그저 그런 재목이 종종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석으로 탈바꿈한다. 두산 포수 양의지(25)가 좋은 예다.
2006년 신인지명회의에서 양의지는 두산에 2차 8순위(전체 59순위)로 지명됐다. 그보다 뒤에 지명된 선수는 단 7명뿐이었다. 어느 프로 스카우트의 말을 빌리자면 2차 8순위는 5천 원짜리 로또와 같다. 1등은 고사하고, 3등이나 4등만 당첨돼도 괜찮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꽝’이 나와도 아쉽지 않다는 의미다.
2007년 7월 21일 잠실 LG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을 때만 해도 양의지는 5천 원짜리 로또 신세였다.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는 다음날 열린 LG전에서 프로 첫 타석에 들어섰다. 결과는 1타수 무안타.
그로부터 2년 동안 양의지는 1군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2군을 맴돌다가 경찰청에 입대했고, 그는 관심과 기대 속에서 수없이 사라져간 ‘유망주들의 하나’로 전락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2010년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혜성과 같이 나타나 두산 주전 포수를 꿰찼고, 신인왕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젠 야구계에서 20대 포수 가운데 강민호(롯데)에 이어 가장 주목받는 포수로 성장했다.
진화하는 양의지를 <스포츠춘추>가 만났다.
진화하는 양의지


해마다 진화하는 포수 양의지(사진=두산)
경찰청 제대 후. 양의지는 해마다 진화했다. 2010년엔 20홈런을 치며 ‘거포 포수’로 우뚝 섰다. 2011년엔 타율 3할1리를 기록하며 ‘3할 포수’로 등극했다. 올 시즌엔 도루저지율 3할7푼5리를 기록하며 70경기 이상 출전한 포수 가운데 ‘가장 강한 어깨’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양의지는 올 시즌 리그에서 가장 안정감이 느껴지는 포수란 찬사를 받았다. 그의 공배합이나 투수를 안정시키는 능력에 이론을 제기하는 야구전문가도 상당수 줄었다. 그는 두산을 넘어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포수가 됐다.

올 시즌을 보면서 포수로서의 능력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이젠 자신감이 확실히 붙었구나’ 하는 생각이에요.
(수줍게 웃으며) 고맙습니다. 음, 그전엔 투수들 의견을 많이 따랐는데, 올 시즌은 제 의견을 많이 냈어요. 안타를 맞아도 투수들한테 “내가 사인 내서 맞았으니까 괜찮다”고 하고, 저보다 어린 투수들에겐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선배 투수들한테도 ‘이 타이밍에선 아니다’ 싶으면 바로 공배합에 변화를 주곤 했고요. 그래서 덜 (안타를) 맞은 것 같기도 해요.
많은 야구전문가가 ‘20대 포수 가운데 강민호에 이어 가장 뛰어난 포수’라는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민호 형은 저보다 한참 위에 있죠. 늘 배우고 있어요. 제가 좀 사람 낯을 가리는 편이거든요. 처음 보면 잘 말도 안 하고. 그런데 민호 형은 절 처음 봤을 때도 “너 몇 살이야?” 할 정도로 성격이 좋아요(웃음). 많이 배우고, 노력해서 민호 형처럼 좋은 포수가 돼야죠.
올 시즌만 본다면 이미 좋은 포수가 된 듯싶은데요.
과찬이세요. 제 스스로 만족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이토 쓰토무 수석과의 만남


이토 쓰토무 전 두산 수석코치(사진=두산)
일본 프로야구엔 두 가지 포수 스타일이 있다. ‘후루타형(型)’과 ‘이토형(型)’이다. 1990년대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를 대표한 두 포수는 확실히 스타일이 달랐다. 공배합부터 그랬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전 포수였던 후루타 아쓰야는 몸쪽 공을 자주 요구하는 공격적 공배합으로 유명했다. 반면 세이부 라이온스 주전 포수 이토 쓰토무는 바깥쪽 낮은 공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적 공배합을 지향했다.
두 포수의 공배합이 달랐던 이유는 팀 칼라 영향이 컸다. 후루타의 소속팀 야쿠르트는 다른 팀에 비해 리그를 압도하는 투수가 많지 않았다. 되레 당시 야쿠르트는 다른 팀에서 방출되거나 부상으로 오랫동안 쉬었던 투수가 많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속구 구속이 그리 빠르지 않고, 구위도 전성기만큼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후루타는 몸쪽 공 구사율을 높이는 것으로 투수들의 부족한 속구 구속을 만회했다. 그리고 역으로 찌르는 공배합으로 타자를 혼란에 빠트렸다. 후루타가 역대 일본 포수 가운데 ‘3구 삼진 비율’이 가장 높은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후루타는 투수들에게 몸쪽 ‘슈트(투심패스트볼)’를 자주 요구해 범타 비율을 높이며 경기를 쉽게 풀어갔다.
SK 박경완처럼 후루타의 카리스마도 대단해, 투수들은 포수가 요구한 코스로 공을 던졌다가 홈런을 맞아도 절대 후루타를 의심하지 않았다. ‘절대 신뢰’ 그것이 후루타의 최대 장점이었다.
반면 세이부는 투수진이 탄탄한 팀이었다. 리그 최고의 투수들과 수비진 그리고 불방망이 타선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원체 투수들의 구위가 좋다 보니 굳이 몸쪽 승부를 하지 않아도 상대 타자들은 세이부 투수들의 공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 이토는 한 경기에서 90%에 가까운 공을 바깥쪽 낮은 코스로만 요구한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토는 자신이 경기를 지배하기보다 투수가 경기를 풀어가도록 배려하는 포수였다. 조범현 전 KIA 감독의 말대로 이토는 삼성 진갑용과 비슷한 포수였다. 야쿠르트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투수를 편안하게 하는 건 후루타보다 이토가 한 수 위”라고 평가한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올 시즌 이토가 두산 수석코치로 부임했을 때, 많은 야구인은 두산 포수진이 강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양의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포수 전문가’ 이토였기에 양의지는 내심 많은 변화를 기대했다. 실제로 양의지는 “이토 수석으로부터 많은 노하우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토 전 수석이 부임했을 때 ‘올 시즌 양의지가 어떻게 변할까’ 관심 깊게 지켜봤습니다. 이토 수석이 많은 조언을 했을 듯싶은데요.
이토 수석님은 많은 말씀을 하시는 분은 아니에요. 필요할 때 한 두마디 조언하는 스타일이시죠. 이토 수석님이 가장 강조하신 게 하나 있는데요. “타자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공이 있다면, 설령 그 공에 배트가 나왔다고 해도 다음 공도 같은 코스 같은 구종으로 던져라. 그래서 계속 물고 늘어지라”는 거였어요.
계속 물고 늘어져라?
그렇죠. 처음 우리 팀에 오셨을 때 저보고 “공배합이 조금 단조롭다”고 하셨어요. 전 나름대로 이 공도 요구하고, 저 공도 요구했거든요. 그런데 수석님은 “그게 바로 단조로운 공배합”이라고 하셨어요.
음.
그러니까 ‘지금은 속구, 다음은 변화구’ 이런 식으로 요구하지 말고, ‘같은 공을 연거푸 요구해도 괜찮으니까 타자 타이밍을 보고 사인을 내라’고 하셨어요. 안 맞는 공으로 계속 공략해서 타자를 혼란하게 만들라는 뜻이셨죠.
어떤 면에선 김진욱 감독과 이토 수석의 ‘타자 상대론’이 조금 다르지 않았나 싶어요. 김 감독은 2사 1루일 때 도루를 허용해도 타자와 승부하라는 경향이고, 이토 수석은 2사 1루라도 다음 이닝까지 고려해 최대한 어렵게 승부하라는 스타일이고.
올 시즌 우리 팀은 주자가 있어도 2아웃이면 타자에만 집중하자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전 포수니까 그다음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볼넷을 내주더라도 최대한 어렵게 승부해서 잡아냈던 것 같아요.
공배합은 감독님도 이토 코치님이랑 크게 다르지 않으세요. 감독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타자의 앞선 타석을 기억하고 있어라. 그전에 뭘 던지다 안타를 맞았는지, 초구는 어떤 공을 던졌는지 떠올려라. 타자가 못 치는 공이 있으면 계속 그 공을 던져라”에요.
언뜻 이토 수석을 보면 ‘곰’처럼 진중할 것 같은데, 선수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장난도 많이 걸고 하더군요.
전 귀찮게 안 하셨는데, (최)재훈이를 귀찮게 하셨죠(웃음).
한편에선 “이토 수석이 최재훈을 편애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글쎄요. 전 못 느꼈어요. 하지만, 주변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재훈이는 제가 굉장히 아끼는 후배라, 이토 수석님이 좀 더 신경 써서 지도해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선동열, 이종범이 롤모델이었던 야구소년


홈런을 치고 환호하는 양의지(사진=두산)
야구는 언제 처음 시작한 거예요?
초교(광주 송정동초) 4학년 때요.
계기가 있었어요?
담임선생님이 야구부장을 겸하셨어요. 한 번은 제가 야구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야구부에 직접 소개를 해주셨어요.
담임선생님 눈에 ‘야구선수로 대성하겠다’ 이런 감(感)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건 아니고요. 알고 보니까 ‘살 빼라’고 (야구를) 시키신 거더라고요(웃음).
그때도 통통했어요?
지금이랑 똑같았죠(웃음).
그래 해보니까 야구가 재밌던가요?
야구야 항상 TV로 봤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어요. 재미도 있었고. 그 무렵에 선동열 감독님, 이종범 선배님이 굉장히 잘하셨을 때거든요. 두 분을 참 좋아했어요. 선동열, 이종범 같은 대선수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선동열, 이종범을 좋아했다면 투수나 유격수를 지원했을 것 같은데.
저도 사실 투수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통통하다고 포수를 시키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포수만 보고 있습니다(웃음).
초교 때 야구실력은 어땠어요?
정말 못했어요. 중학교에서도 실력은 별로였어요. 그냥 다른 선수들한테 묻어가는 선수였어요. 그러다 광주 진흥고에 입학하고부터 좋은 지도자분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실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즈음 기억에 남는 지도자가 있어요?
지금 인하대에 계시는 정원배 코치님이 기억에 남아요. 사실 고교 야구부에선 전문적으로 포수를 지도하는 분이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정 코치님은 프로에서 포수를 하다가 진흥고 코치로 오신 분이었어요. 고1 때부터 그분한테 배웠는데요. 포수 훈련, 정말 많이 했어요. 포수 기본기를 하나하나 배운 시기였죠. 특히나 프로 선수들이 하는 훈련을 그대로 따라 한 덕분에 나중에 프로 갔을 때도 적응하는 시간이 다른 선수들보다 좀 빠를 수 있었어요.
당시 프로 스카우트들은 진흥고 포수 양의지를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전국대회를 자주 나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만날 지역예선에서 광주일고, 동성고한테 졌어요. 그때 (한)기주가 엄청나게 잘 던졌거든요. 이길 수가 없었죠.
‘포수’라는 희소성 때문에 고교 졸업반 때 대학과 프로 양쪽에서 ‘콜’이 왔을 듯싶은데요.
원래 대학 진학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프로에서 지명하면 프로로 가자고 마음 먹었죠.
그즈음 ‘KIA에서 양의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요.
뭐 관심만 있었죠. 액션은 없었어요(웃음).
2006년 신인지명회의에서 은근히 상위 순번을 기대했을 것도 같은데요.
그랬죠. 그런데 지명 순번이 낮아서 좀 자존심이 상했어요. KIA도 절 지명하지 않았고요. (낮은 목소리로) 부모님께선 제가 KIA에 입단할 줄 아셨거든요.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웠죠. 그래도 부모님께 ‘서울 올라가서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말씀드리니까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2007년 두산에 입단했습니다.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는데요.
처음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때 구로동에서 출퇴근했거든요. 어린 나이에 서울살이가 쉽지 않더라고요. 밥도 제가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하고. 나중에 경기도 이천 숙소(베어스 필드)에 들어가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했죠.
확실히 숙소생활이 야구하기엔 편하지요?
그럼요. 숙소에선 야간훈련까지 할 수 있거든요. 갇혀 산다는 스트레스는 있지만, 그래도 야구만 생각하니까 실력이 금방 늘었던 것 같아요.
밖에서 보던 프로와 실제 피부로 느끼는 프로는 꽤 달랐을 듯싶어요.
처음엔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프로가 되니까 큰 벽이 느껴지더라고요. 밖에서 보던 프로는 나만의 착각,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때 홍성흔 선배가 계셨는데 ‘아, 주전 포수 되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코칭스태프가 주로 들려준 이야기가 뭐예요?
김태형(현 SK) 배터리 코치님께서 항상 “넌 아직 어리니까 기본부터 쌓아야 한다. 갈고 닦다 보면 때가 찾아온다”고 하셨어요. 그 말만 믿고 진짜 코치님들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한 것 같아요. 진짜 군대 다녀오니까 기회가 찾아오데요(웃음).


2010시즌을 앞두고 찍은 사진(사진=두산)
2007시즌 마치고 프로 2년 차에 바로 입대했습니다. 대개 신인선수는 2년 차까지 1군 무대를 도전하기 마련인데요.
2007시즌이 끝나고 우리 팀에 최승환 선배가 트레이드돼서 오셨어요. 홍성흔, 채상병 선배 계시고, (용)덕한이 형도 상무 제대하고 올 시점이었죠. 속으로 ‘군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마침 구단에서 ‘군대 먼저 다녀오는 게 어떠냐’고 하셔서 두말 않고 입대했어요.
당시는 경찰청보다 상무 지명도가 더 높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경찰청에 들어갔어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전 경찰청이 더 좋아 보였어요.
경찰청에 ‘T/O’가 난 게 아니라?
(무안한 듯 활짝 웃으며) 에이, 아시면서(웃음).
이른 입대가 호재가 된 양의지


경찰청 유승안 감독(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경찰청 유승안 감독이 그러더군요. “양의지를 처음 봤을 때 아기곰 한 마리가 들어온 줄 알았다”고. 그런데 막상 포수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왜요?
속으로 ‘이때는 이런 사인을 내야 하는데’하고 생각하면 양의지가 진짜 그 사인을 내더라는 거예요. ‘내 생각과 이렇게 일치할 수도 있나’ 싶어서 깜짝 놀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감독님은 좋은 말은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으세요. 아, ‘성격 좋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있으세요. 그거 빼곤 대부분 욕먹은 기억밖엔 없어요(웃음). 조언도 많이 해주셨지만.
기억에 남는 조언이 있어요?
“네가 어리다고 너무 소극적으로 행동하지 마라. 경기 나가면 다 친구지, 선·후배는 없다. 네가 내고 싶은 사인내고, 투수도 네가 이끌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어요. 그리고 이기는 걸 정말 많이 강조하셨어요.
이기는 걸 강조?
“너희가 2군에서도 지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소속팀과 사회에 돌아가서도 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지금서부터 이기는 걸 배우고, 그게 어떤 맛인지 느껴보라”고 하셨어요. 돌아보면 그런 정신력을 자주 강조하셨던 것 같아요. 큰 도움이 됐죠.
경찰청 주전 포수는 언제부터 맡기 시작한 거예요?
유 감독님 부임 전까진 다른 선수들과 돌아가면서 맡았고요. 유 감독님 오신 다음부턴 선발포수로 자주 나갔어요.
경찰청에서 느낀 게 있다면 뭘까요?
책임감? 사실 이전까진 야구도 그냥 했고, 포수도 그냥 봤어요. 경찰청 들어가서 유 감독님 뵙고부터 생각하는 야구를 하기 시작했죠. 그게 가장 큰 변화였던 것 같아요. 경찰청에서 1군 투수들을 만난 것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프로 1년 차때 1군 투수들 하고 손발을 맞출 기회가 없었거든요. 경찰청에서 1군 투수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이것저것도 시도해보면서 실력이 ‘확’ 늘었어요.
경찰청 때 만난 ‘1군 투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면 그게 누굽니까.
(손)승락이 형이요. 완전 독불장군이에요(웃음). 고집이 정말 세요. 가끔 외국인 선수처럼 흥분하거든요. 그럴 때 포수가 다가가서 편안하게 해줘야지 잘 던지는 스타일이에요. 실제로 마운드 올라가서 ‘저 타자가 형 공은 절대 못 치니까 마음 놓고 던지세요“라고 하면 진짜 공이 더 좋아져요. 뭐 원래 좋은 투수니까(웃음).
고교 시절엔 ‘좋은 포수’란 칭찬은 있었어도 ‘좋은 타자’란 평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에선 2군 북부리그 타율, 홈런, 타점 부문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어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궁금합니다.
주위 분위기 같아요. 그때 상무 형들 타격이 정말 좋았거든요. 죄다 3할 타자였어요. 입대 전까지 방망이에 별 소질이 없다고 느꼈는데, 형들이 잘 치니까 저도 이상하게 잘 맞기 시작하더라고요. 돌아보면 그때 자신감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타석에 서면 ‘저 투수 공은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2009년 경찰청에서 제대할 즈음, 두산 관계자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 팀에 좋은 포수 한 명이 돌아온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2010년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평가가 썩 좋았던 건 아니었어요.
다시 두산에 돌아와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캠프 때 어깨가 아프더라고요. 제대로 훈련을 못했어요. 그 바람에 연습경기 때 대형 사고를 쳤죠.
대형 사고?
1루 주자가 도루할 때 ‘냅다’ 송구했는데 그 공이 2루가 아니라 센터까지 날아가는 거예요. 속으로 ‘아, 짐 싸야겠구나’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김경문 감독님이 계속 기회를 주시더라고요.
당시 김 감독은 “뭐든 군말 없이 열심히 하는 게 참 보기 좋았다. 그래서 계속 기회를 주면 그 기회를 잡을 선수로 보였다”고 했습니다. 선배 포수로서, 김 감독이 여러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압니다. 그 가운데 생각나는 게 있어요?
‘메모를 남겨라. 자기만의 야구일지를 쓰라’고 하셨던 말이 기억나요. 그때 처음으로 포수는 기억과 기록으로 승부하는 포지션이란 걸 깨달았어요.
2010시즌 개막전 엔트리에 ‘양의지’의 이름이 포함됐습니다. 그리고 시즌 두 번째 경기인 잠실 KIA전에 선발 포수로 출전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선발 출전하리라고 기대했을까 싶어요.
솔직히 기대했다기보다 굉장히 절실했던 것 같아요. 1경기라도 나가고 싶단 생각이 정말 강했거든요. 그래야 뭔가 보여줘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요.
그해 3월 30일 목동 넥센전에서 ‘양의지’가 누구인지를 야구팬의 뇌리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날 선발포수로 출전해 4타수 2안타 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2안타 모두 홈런이라, 많은 이가 깜짝 놀란 게 사실입니다. 그때 상황 기억납니까.
지금도 생생하죠. 목동구장 왔을 때 김태형 코치님이 “오늘 선발 포수로 나갈 수도 있으니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설마’ 했죠. 그런데 선발 오더를 보니까 진짜 제 이름이 적혀있는 거예요(웃음). 그날 (김)선우형이 선발이었는데, 그 당시엔 선우 형한테 말도 못 걸었어요. 팀 동료인데도 선우 형 보면 ‘와, 김선우 선수네’ 했다니까요(웃음). 출전 준비하고 있을 때 윤석환 투수코치님이 “의지야, 나가서 홈런 두 방 쳐버려”했는데 그게 진짜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웃음).
홈런 칠 때 ‘손맛’이 어땠을까 궁금해요.
(스윙하는 흉내를 내며) 방망이에 공이 맞는 순간 진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였어요. 처음엔 실감이 안 나다가 베이스 돌면서 ‘내가 친 홈런이 진짜구나’ 싶으니까 진짜 날아갈 것 같았어요(웃음). 돌아보면 홈런도 홈런이지만, 선우 형의 시속 150km 강속구를 받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 김선우 공을 처음 받았던 겁니까.
처음이었어요. 선우 형 불펜투구 때도 (공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그날 선우형 공은 제구도 좋고, 공끝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속으로 ‘이래서 김선우구나’ 감탄했죠(웃음).
그날 공배합은 누가 한 겁니까.
그땐 선우 형이 (사인을) 다 내줬어요. 다행이었죠. 전 정신이 없어서 무슨 사인을 내는지도 모르고 막 손가락을 펴기만 했거든요(웃음).


2010년 3월 30일 목동 넥센전에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한 양의지가 동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사진=두산)
계속 경기에 출전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쌓였을 듯싶어요. 
자신감도 생겼지만, 걱정도 많아졌죠. 저 때문에 팀이 지면 안 되니까.
2010년 풀타임 첫 시즌임에도 20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그것도 잠실구장이 홈인데도 말이지요. 당시 ‘거포 포수’가 나왔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올 시즌 기록 보면 창피하네요(웃음).
그해 20홈런 이상 기록한 두산 타자가 무려 5명이나 됐습니다. 경찰청 때처럼 동료 타자들이 잘 치니까 덩달아 장타가 늘어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영향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땐 정말 막 (배트를) 돌렸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아직 어리니까 패기 넘치게 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막 휘둘렀죠. 그런데 사람들이 제 스윙하는 걸 보고 다 그랬어요. “젊은 놈이 능글능글하다”고(웃음).
타격폼 보면 정말 힘 안 들이고 ‘툭툭’ 치는 것 같아요. 어느 분은 ‘애늙은이 같다’고 하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살살 친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커서 보니까 그게 장점이 되더라고요. ‘부드럽게 친다’는 말씀들을 자주 해주시니까. 올 시즌 홈런 의식해서 배트를 세게 돌려봤는데…. 오히려 좋은 타구가 더 안나오더라고요.
당시 타격에선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만, 수비에선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블로킹이 좋지 않다는 평이 많았어요.
그런 지적 많이 받았어요. 사실 경찰청에서 두산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호흡을 맞추는 투수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 투수들의 공 궤도를 알 리 없었죠. 지금이야 ‘공이 어딜 맞으면 어디로 튀겠구나’ 알지만, 그땐 전혀 몰랐어요.
올 시즌도 포일(패스트볼)은 9개로 리그 1위였습니다. 한편으론 두산 투수들의 포크볼(스플리터 포함)비율이 높다보니 포일도 그만큼 많아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올 시즌도 포일이 많긴 한데, 그래도 2010년보단 좋아진 것 같아요. 투수들 때문이라기보다 더 집중하지 못한 제 탓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리그 최강의 도루 저격수, 양의지



올 시즌 양의지는 70경기 이상 출전한 포수 가운데 가장 높은 도루저지율(3할7푼5리)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도 그의 도루저지율은 4할1푼3리나 됐다. 2010시즌 도루저지율이 2할4푼8리에 그쳤던 양의지였기에 2년 연속 리그 정상급 도루저지율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리그를 대표하는 강견이 된 것일까.

양의지가 투수의 공을 포구해 내야수의 글러브에 정확히 던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92초다. 다른 포수들과 비교해 독보적으로 빠르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2루 송구는 어깨로 하는 게 아니다. 송구 속도도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보단 빠른 송구자세와 정확성이 생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의지는 리그의 젊은 포수 가운데 송구자세와 송구 정확성이 가장 돋보이는 포수다.

사진 1은 2010년 양의지의 송구자세다. 몸의 중심선을 일직선으로 표시할 때 상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특히나 송구할 때 머리가 극단적으로 오른쪽으로 쏠려 있으며 머리와 오른팔의 간격도 멀다. 양쪽 어깨 역시 위에서 아래로 극단적으로 내려온 상태다. 이런 동작에선 몸의 균형과 자세가 무너져 정확한 송구를 하기 어렵다. 여기다 공을 놓는 위치도 몸 뒤쪽에서 형성돼 송구 스피디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2011년부터 양의지는 차츰 송구자세를 바꿨고,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사진 2는 올 시즌 송구자세로, 전체적으로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각도가 현저하게 줄었다. 머리와 오른팔이 떨어진 각도도 줄었고, 양쪽 어깨의 기울기도 많이 완만해졌다. 두눈이 어느 정도 평행을 이루면서 송구도 안정이 되고, 공을 던지는 위치도 더 앞에서 형성돼 2루까지의 송구 도달시간을 단축했다.

사진 3은 한국 최고의 포수 박경완(SK)의 송구 자세로 몸의 중심이 일직선임을 알 수있다. 머리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양쪽 어깨도 평행을 이루고 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은 채 2루를 똑바로 응시하기 때문에 송구 정확성과 송구 도달시간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

아래 왼쪽 사진은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 포수 가운데 가장 높은 도루저지율을 기록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아이카와 료지의 송구 자세다. 역시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어깨 역시 최대한 평행을 이루고 있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박경완의 송구 자세로 아이카와보다 송구자세가 더 안정적이다.



양의지의 도루저지율이 높은 또 다른 이유는 송구 방향이다. 양의지는 2루 송구 시 주자가 달려오는 1루 방향으로 정확히 송구한다. 2루 베이스커버를 들어가는 내야수의 정면이나 3루 방향으로 송구하면 그만큼 주자를 터치하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양의지처럼 주자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송구하면 내야수의 터치는 쉬워지고, 자연 태그아웃 가능성도 높아진다.

참고로 아이카와는 주자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송구하기 위해 사이드암 자세로 투심패스트볼 회전의 공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던지면 공은 1루쪽 방향으로 휘어들어가 내야수가 주자를 터치하기 쉽다.



야쿠르트 아이카와의 송구. 투심처럼 공이 휘어져 들어간다.
양의지의 송구. 기만한 송구자세와 함께 송구 방향도 늘 1루를 향한다.

올 시즌 공배합도 변화를 줬지만, 도루저지 방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듯싶어요. 올 시즌 70경기 이상 출전한 포수 가운데 도루저지율이 3할7푼5리로 가장 좋았습니다. 2위 김태군과 무려 7푼1리나 차이가 났어요.
2010년에 도루저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2011년부터 지금 NC 계신 강인권 배터리 코치님하고 정말 훈련을 많이 했어요. 지난 시즌엔 오후 1시부터 경기 전까지 계속 송구훈련만 했으니까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사실 전 주자가 뛰는 걸 보고나서 송구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유가 있을 땐 송구가 부정확하고, 오히려 급할 때 송구가 좋아지더라고요. 강 코치님께서 그걸 지적해주신 덕분에 많이 개선할 수 있었어요.
올 시즌 투수 공을 포구하고, 2루까지 송구하는 연결동작이 빨라졌다고 분석하는 야구전문가도 있습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웃음). 조금씩 더  정확해진 건 같아요.
올 시즌도 두산 주전 포수는 양의지 차지였습니다. 경기 출전 부담은 상당히 줄었을 듯싶어요.
솔직히 ‘안심이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주변에서 ‘최소 3년은 풀타임으로 뛰어야 주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아요.
가뜩이나 올 시즌 용덕한이 롯데로 옮기면서 주전 포수 경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용)덕한이 형 수비가 저보다 좋아요. 항상 덕한이 형 보면서 배웠죠. 그런 덕한이 형이 롯데 가실 때 죄송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롯데에서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 투수들 이야기를 한 번 해보지요. 올 시즌 외국인 투수 더스틴 니퍼트는 11승10패 평균자책 3.20을 기록했습니다. 전해에 비해 개인 성적은 다소 떨어졌지만, 상대 타자들은 “지난해와 다른 투구 패턴이라,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지난해와 비교하면 자기가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지난 시즌엔 몸쪽을 많이 안 던졌어요. 그런데 올 시즌엔 몸쪽 투심도 자주 던지고, 삼진에 집착하기보다 맞혀 잡으면서 경기를 쉽게 풀어가려고 노력했어요.
두산 투수들이 니퍼트를 가리켜 ‘무척 섬세하고, 까다로운 투수’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 니퍼트를 어떻게 리드했을까 궁금합니다.
니퍼트한테는 요구를 거의 하지 않아요. 항상 “네가 최고다. 공 좋다”는 식으로 자신감만 심어줍니다. 왜냐? 우리 팀 에이스니까요.
올 시즌 이용찬은 어땠습니까.
(이)용찬이는 스스로 투구를 깨달은 것 같아요.
스스로 투구를 깨달았다라, 구종 완성도와 타자 상대법이 성숙해졌다는 뜻입니까.
그렇죠. ‘타자와 어떻게 승부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투수가 됐어요. 포크볼도 지난해 배우고서 올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요.
같은 생각입니다. 올 시즌 이용찬의 포크볼은 리그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찬이는 포크볼로 카운트를 유리하게 이끌 줄 아는 투수예요. 일부러 포크볼을 가운데로 던져 범타를 유도하곤 해요. 그래야 투구수를 줄일 수 있다는 걸 아는 거죠. 참 영리한 투수예요.
하지만, 이용찬의 포크볼 구사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후반기 때 속구 사인을 많이 냈어요. 그런데 용찬이가 자꾸 포크볼을 던지려고 해서(웃음). 사실 용찬이는 포크볼도 좋지만, 원래 커브와 슬라이더가 더 좋아요. 경기 하다 보면 커브, 슬라이더 둘 중 하나만 잘 들어가도 그날 투구가 살거든요. 용찬이는 속구 구속도 빠르니까 팔꿈치에 무리가 가지 않는 변화구를 더 자주 던졌으면 좋겠어요.
팔꿈치에 무리가 가지 않는 구종이라면?
커브요.
올 시즌 두산 마운드에서 가장 돋보인 투수라면 단연 노경은이 아닐까 싶은데요.
지난해 (노)경은이 형이랑 방을 같이 썼어요. 성격을 잘 알죠. 경은이 형은 정말 생각이 많은 사람이에요. 지난해까진 안 되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했는데, 올 시즌 감독님이 기회를 많이 주시니까 그 기횔 놓치지 않고 잘 잡은 것 같아요. 심적으로 안정된 것도 도움이 된 것 같고. 내년엔 더 잘할 겁니다. 연구하는 투수니까요.
노경은이 두산 선발진의 스타였다면, 홍상삼은 불펜진의 스타였습니다.
(홍)상삼이는 제가 강하게 이끕니다. “형이 사인 냈는데 고개 흔들면 죽어”하죠(웃음). (뭔가 생각난 듯) 시즌 중반 상삼이가 좋지 않았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 상삼이가 생전 그런 적이 없는데 “형, 내가 셋업맨이니까 지금은 피해 가는 것보단 붙어서 빠르게 잡는 게 좋을 것 같아. 속구로 파울 만들어 내고 변화구로 삼진이나 범타 잡을게”하더라고요. 그때 ‘아, 상삼이도 이제 야구를 아는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상삼이 의견을 많이 들어주는 편이에요.
마무리 스콧 프록터는 어떻게 리드했습니까.
니퍼트랑 똑같아요. “네가 최고다”하죠(웃음). 프록터는 자기한테 너무 화를 많이 내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계속 “괜찮다”고 말해주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지난 7월 프록터와 KIA 나지완의 ‘빈볼 시비’가 있었어요.
타자한테 욕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요. 전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프록터는 예전 일을 기억하고 있었더라고요(웃음).
올 시즌 두산 투수 중 가장 달라진 선수가 있다면 누구로 봅니까?
(김)승회 형이요. 올 시즌 승회 형이 등판하면 ‘2점으로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원하는 코스로 정확히 던지고, 포수 말도 잘 따라주고. 승회 형은 제가 막 우기면서 “형, 여기다 그냥 던져”하면 군말 없이 던지는 스타일이에요(웃음). 이제 다른 팀 투수지만.


양의지와 니퍼트가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서 다정한 포즈를 취한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있다(사진=두산)
말이 나온 김에 ‘내 사인을 가장 잘 들어주는 투수’가 있다면 그게 누굽니까.
당연히 상삼이죠(웃음).
반대로 ‘가장 고집 센 투수’가 있다면.
우리 팀엔 니퍼트밖에 없어요(웃음).
마지막으로 가장 기대가 되는 투수가 있다면.
변진수요. 정말 당찬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더 잘 던질 거예요.
이번엔 상대 타자들을 물어보겠습니다.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를 꼽는다면.
(김)태균이 형, (이)용규 형이요.
어떤 점이 상대하기 어렵습니까.
그 형들은 절대 나쁜 공은 안 쳐요. 자기 공만 쳐요. 역으로 승부해도 맞아요.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들답죠. 특히나 용규 형은 포수 입장에선 정말 짜증 나는 선수에요. 계속 파울 치다가 안타 치고 나가서 도루하고. 아주 사람 속을 뒤집어 놓죠(웃음).
그럼 상대적으로 승부하기 편한 타자는 누구예요?
거의 없죠. 승부하기 편하다기보다 우리 투수 공을 잘 못 치는 타자를 꼽으라면 의외로 (이)승엽이 형 같아요.
기록을 보니까 그렇군요. 올 시즌 이승엽의 두산전 타율이 2할6리밖에 되지 않군요. 다른 팀을 상대로는 죄다 2할8푼8리 이상인데요.
이승엽 선배와 상대할 땐 ‘볼넷 준다’는 생각으로 공을 버릴 때가 많아요. 하지만, 원체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시니까 그 공을 쳐서 범타로 물러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도 이승엽 선배한테 홈런 하나 맞긴 했는데. 솔직히 위대한 선배님이시잖아요. 포수 자리에 앉아서 타격하시는 걸 보면 정말 많은 공부가 돼요.
양의지의 전성기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두산 포수진의 중심. 최재훈(사진 왼쪽부터)과 양의지(사진=두산)
경기할 때 데이터와 감(感) 가운데 어느 걸 중시하는 편이에요?
전 데이터보단 현장의 감이 중요하다고 봐요. 타자는 오늘 컨디션에 따라 기존 데이터가 맞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데이터를 맹신했다가 혼난 적도 많아요.
대표적으로 ‘혼난 경기’가 있다면 언제였습니까.
올 시즌 LG전이었죠. 데이터와 분석지를 읽어보니까 LG 타자들의 약점이 보이더라고요. 우리 팀 전력분석이 상당히 뛰어나거든요. 그래 분석대로 경기를 풀어갔는데 (눈을 크게 뜨며) 완전 박살 났죠(웃음). LG한테 7연패나 당했으니까요. 그걸 통해서 교훈을 많이 얻었어요. 데이터를 더 훌륭하게 활용하려면 경기 준비를 더 철저히 하고, 상대 타자들도 더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걸 배웠죠.
전체적으로 경기 준비는 어떻게 하는 편이에요?
경기에 앞서 투수하고 오늘의 그림을 그려요. ‘몇 점으로 막자, 이 팀의 성향은 이러니까 이렇게 하자’ 그런 식의 대화를 많이 나눠요. 그리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오늘은 몇 점으로 막을 수 있겠다’ 이런 자기 암시를 하죠.
자신의 성향을 다른 포수와 비교한다면 누구와 닮았다고 봅니까.
진갑용 선배인 것 같아요. 진 선배 투수리드를 보면 정말 교과서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투수 능력도 잘 이끌어내시고, 배려도 잘하시고.
투수 능력을 잘 이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어쨌거나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야구선수든 아니든 사람은 그날 기분에 따라 컨디션까지 바뀌기 마련이잖아요. 저도 누가 ‘잘한다, 잘한다’하면 더 신나고, ‘못한다, 못한다’하면 슬럼프에 빠지거든요. 투수는 감정 기복이 더 심하기 때문에 포수는 어떻게 해서든 투수를 칭찬하고, 격려해서 투수의 평상심을 유지시켜줘야 합니다.
투수의 투쟁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때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할 때도 필요할 듯싶은데요.
감독님께선 “선배든 후배든 못하면 강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저보다 어린 투수들 보면 저도 그러죠. “그 좋은 공을 갖고도 왜 못 던지냐. 타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던져라. 이름값에 연연하지 말고 던져라.” 그래도 대부분은 투수를 칭찬하면서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노력해요. 어차피 투수가 주연, 포수가 조연이니까요.
올 시즌 포수 수비는 개선됐지만, 타격은 최근 3년 가운데 가장 좋지 않았습니다. 타율 2할7푼9리, 5홈런, 27타점으로 전체적인 타격지표가 내림세였습니다. 특히나 2010, 2011년에 비해 득점권 타율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지난해 3할1푼5리에 비해 올 시즌 득점권 타율은 2할1푼2리에 불과했습니다. 찬스에 강했던 전 시즌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습니다.
음, 잘 쳐야 하는데, 저도 이유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야구인들이 흔히 ‘포수가 수비에 집중하면 타율이 떨어진다’는 말을 하는데요. 역시 그런 측면에서 올 시즌 타격 부진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도 없지 않은 것 같아요. 수비할 때 힘도 들고, 더 집중력을 발휘하다 보니까 타격할 때 힘을 쓰지 못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경찰청 때부터 보면 팀 타선이 터질 때 자신의 타격도 좋아지곤 했어요. 하지만, 올 시즌 두산 팀 타율은 2할6푼으로 2006년 2할5푼8리 이후 가장 좋지 않았습니다. 팀 홈런(59), 팀 득점(524)도 2006년 이후 최악이었어요. 어쩌면 그런 점이 본인 타격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 가지 덧붙인다면 예년보다 타격이 급해졌다는 인상을 받곤 했어요. 기록을 찾아보니 타석당 투구수가 2010년 3.7개, 2011년 3.8개였는데 올 시즌엔 3.5개로 줄었더군요.
팀 타선 부진이 개인 타격에 영향을 줬다면 그건 제가 반성할 문제 같아요. 팀 분위기에 끌려가기보다 분위기가 그럴수록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걸 잘하지 못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좀 급할 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올 시즌 초구만 4번을 쳤다가 감독님한테 “너 초구만 칠 거면 집에 가라”는 꾸중을 들은 적도 있어요.
4타석 모두 초구 공략?
그땐 느낌이 왔어요. 결과가 안 좋았던 거죠.
그때 상대 투수가 누구였어요?
한화 (데니) 바티스타였어요. 선발로 전향해서 그렇게 잘 던질 줄 몰랐죠(웃음).


6년 전 양의지에게 홍성흔은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두산의 주전포수는 양의지다(사진=두산)
내년 3월에 열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요. 아쉽게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가슴에 태극마크 단다는 게 큰 영광이잖아요. 처음 야구할 때도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열심히 하면 다시 좋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여자친구 있어요?
네, 결혼해야죠.
내년 시즌 목표를 숫자나 기록으로 밝힐 수 있을까요.
아직까진 기록이나 숫자보단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웃음).
장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다가 느낀 게 있어요.
네?
강호동 씨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듣지요?
강호동 씨요?(웃음) 강호동 씨와 제가 닮았다고요(웃음). 정말이요?(웃음). (얼굴이 굳어지며) 왜 이러세요. 기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