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2000경기 출장의 위대한 기록, 위대한 포수 김동수 야구가 좋다!


글 출처:
by 바다를 달리는 갈매기
2010/05/16 19:06
Laridae.egloos.com/3280503


다음은 어떤 포수의 기록이다. 신인왕, 4번의 우승, 골든글러브 6회 수상, 200홈런, 통산 0.261의 타격, 51개의 도루 등등. 역사상 최고의 포수라고 지칭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으며 이전 세대의 이만수나 동시대라 불릴 수 있는 박경완도 한 수 접어야 할 것 같은 선수. 한국나이로 42세의 나이까지 포수로 뛰면서 사상초유의 기록인 포수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선수. 기나긴 선수생활 동안 영광의 시간과 함께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던 순간도 있었지만 모든 걸 이겨내고 당당히 정상에서 군림했던, 그리고 절망에 빠졌던 후배들을 다독이며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던 팀의 고참. 현재 팀의 배터리 코치로 있는, 이것이 역사상 최고의 포수인 김동수의 선수생활이다.

(역사상 '최고의 포수' 김동수. 그는 실력과 더불어 상복도 많은 선수였다.)

야구는 9명(지명타자까지 하면 10명)이 하는 스포츠이다. 각각의 포지션마다 특성이 있고 필요로 하는 능력이 있다. 어깨, 스피드, 유연성, 판단능력 등등. 수많은 능력들의 고저에 따라서 각각 포지션에 포진이 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곳에는 투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곳인 마운드에 우뚝 서있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경기를 혼자서 주름잡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투수는 야구의 꽃이면서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투수의 반대편에는 그라운드의 가장 음지에 서있는, 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팀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안방마님인 포수가 앉아있다.

포수란, 정말 힘든 자리이다. 혹자는 그냥 앉아있는데 뭐가 힘드냐 하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10분만 쪼그려 앉아 있어보면, 힘든걸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 몇 번만 하면 죽는 소리를 낸다. 더해서 10kg짜리 장비와 더불어 150km를 넘나드는 속구와 현란한 변화구를 글러브로 잡아내야 하며, 자칫 빠지기라도 할라치면 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인고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라운드에서 가장 민감한 존재인 '투수'를 다독이며 상대타자 혹은 주자와 두뇌싸움까지 벌여야 하는 그러한 어려운 자리이다. 그렇기에, 포수는 가장 느리게 성장하면서도 가장 빨리 선수생활을 끝낼 수 밖에 없는 고된 자리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시작부터 다른 포수들과 달랐다. 시작부터 그는 최고로 시작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90년에 등장한 트윈스의 포수 김동수는 시작부터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청룡-트윈스의 안방에 자리하고 있던 포수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포수라고 불리는 故심재원 포수였다. 그의 수비력은, 역대 그 어떤 포수와 비교해서 월등한 점수를 부여 받는다. 하지만 김동수는 그러한 선배를 몰아내고 팀의 주전포수로 자리잡는다. 그것도 포수치고는 새파랗게 어린 대졸신인의 신분으로 말이다. 물론 88서울올림픽에 대표로 선발되었으며 대학시절 이름을 날리던 포수였지만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신인에게 '주전포수'라는 중책을 맡기기에는 경험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해 신인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더불어 팀의 우승을 만끽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팀의 베테랑 투수들과 선배 심재원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그의 포수로써의 자질은, 그 어떤 포수보다 천부적이었던 것이다. 0.290의 타율과 13홈런, 15도루. 이후 99년까지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던 91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0.250이상의 타율과 잠실을 홈으로 쓰는 타자로 무시무시한 4할의 장타율을 과시하면서, 리그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올려놓는다. 그의 뛰어난 실력과 트윈스라는 멋진 팀의 배경은, 역시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손꼽히는 김동기와 박경완을 제치고 6번의 골든글러브 수상의 위업을 달성한다. 여기까지 그의 야구인생 1막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꾸준함으로 FA가 되었지만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유니콘스에서 그는 부활한다.)

그러나 첫 FA의 수혜자가 되었던, 99년 시즌종료 이후. 10년 동안 꾸준한 활약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 올린 그에게 언제나 'FA의 큰손'으로 군림했던 삼성이 손을 내밀었고 시원스레 싸인을 했다. 팀 내에 조인성이라는 국가대표 출신 포수와 김정민이라는 뛰어난 백업이 버티고 있었기에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거기서부터 그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극심한 슬럼프와 더불어 점차 줄어드는 출전기회는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최고의 포수 자리는 박경완에게 넘어갔으며 김동수는 지는 별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삼성은 그를 트레이드를 통해 SK로 넘겼으며 2002시즌 이후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삼성시절 사이가 다소 좋지 못했던 조범현이 부임하자 그는 방출 당한다. 그는 그렇게 선수생활을 정리해갔다.

하지만 당대 최강팀이었던 현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전포수 박경완이 FA를 통해서 와이번스로 이적하자 포수자리에 공백이 생긴 유니콘스는 김동수를 필요로 하였고, 김동수는 다시금 선수생활을 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애 최초 3할 타율과 함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7회의 골든글러브 수상. 이만수나 박경완, 그리고 진갑용과 홍성흔 같은 그의 선배나 경쟁자들 혹은 후배들이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는 현대 왕조의 안방을 단단히 수호하면서 연속우승의 기쁨을 만끽한다.

(부활한 그는, 7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그 어떤 포수도 범접할 수 없는 금자탑을 세웠다.)


현대왕조의 몰락은, 그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를 필두로 했던 고참들은 힘든 기색을 할 수 없었다.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팀을 추스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힘든 시간에도 팀은 최하위로 밀려나지 않았으며 더불어 왕조의 위엄을 마운드에서만큼은 뽐낼 수 있었다. 그러한 중심에 김동수가 있었다고 하면, 비약적인 발상일까? 그리고 유니콘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팀이 바뀌었을 때도 그는 당당히 팀의 안방을 지키면서 팀을 다독거렸다.

2009년.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그는 한걸음 물러섰다. 한국나이로 42세. 야구선수로써, 그리고 포수로써 나이를 환갑진갑을 다 넘긴 나이. 하지만 그는 포수장비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젊은 투수들의 공을 열심히 받아냈다. 약해진 어깨로 인해서 도루를 저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후배들을 위한 백업포수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의 모습은, 팀에 고참다운 기여가 아닌, 그 자체가 히어로즈였고 그 자체가 히어로즈의 마운드였다. 불펜에서 경기장을 응시하며 열심히 적어내려 가는 '플레잉 코치' 김동수의 모습은 그를 보는 팬에게 있어 그라운드에 서는 것과 맞먹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는 포수로써 '기록의 사나이'이다.
그가 포수로써 세운 기록들은 깨지기 어려운 기록들이다.)

이제는 배터리 코치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그가 포수로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히어로즈의 젊은 포수들을 조련하며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싸인을 내주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의 모습은 그가 아직 포수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는 분명, 포수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최고의 선수였음에 틀림없고, 뛰어난 코치가 될 자질을 갖춘 지도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를 전설로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니 말이다.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우리는 그를 덕아웃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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