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

출처: http://blog.daum.net/rewty/8734266


'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야구는 시작된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포수가 사인을 내고 투수가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야구의 시작이다.

수비시 나머지 8명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포수는 그라운드의 야전 사령관이다. 포수는 수비 부담이 가장 큰 포지션이며, 포수의 수비력은 투수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투수진 전체를 관리해야 하다 보니 팀의 리더인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방망이가 약해서도 안 되는 게 요즘 포수다.
유일하게 열 손가락 모두를 우승 반지로 채울 수 있는 요기 베라는 최고의 리더였다. 역대 최고의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는 이반 로드리게스는 골드글러브를 가장 많이 따냈다. 마이크 피아자는 장타력에서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베라의 리더십과 로드리게스의 수비력, 피아자의 장타력을 모두 지닌 포수가 있었으니, 바로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수로 불리는 자니 벤치다. 어떤 이는 벤치를 <마이크 피아자와 찰스 존슨의 결합>으로 부르기도 한다.

최고의 포수

벤치가 마스크를 쓴 13년(1968~1980년)은 신시내티 레즈의 129년 역사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신시내티는 1970년대에만 6번의 지구 우승(당시는 2개 지구)과 4번의 리그 우승, 그리고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75-76년 신시내티 이후 월드시리즈 2연패에 성공한 내셔널리그 팀은 없다.
벤치는 '붉은 기관총 군단'(Big Red Machine) 최고의 타자 중 1명이었으며(벤치는 주로 4번 또는 5번을 쳤다) 팀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였다(이에 벤치의 별명은 '리틀 제너럴'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벤치(2회)보다 더 많이 리그 MVP를 따낸 포수는 베라(3회)와 로이 캄파넬라(3회) 2명뿐이다.
빌 제임스는 베라를 역대 1위 포수로 꼽으면서도(벤치 2위), 그러나 완성도가 가장 높았던 포수(best pure catcher)로는 벤치를 선택했다. 벤치는 베라보다 훨씬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다. 2000년에 있었던 팬 투표에서 벤치는 베라를 제치고 '20세기 최고의 팀' 포수가 됐으며, 1999년에 발간된 <스포팅뉴스>의 20세기 최고 선수 랭킹에서도 포수로서는 가장 높은 16위에 올랐다.
이반 로드리게스는 13개의 골드글러브를 따내 10개를 기록한 벤치를 제쳤다. 하지만 골드글러브 50주년을 맞이해 2007년에 있었던 <올타임 골드글러브 팀> 투표에서 벤치는 총 2만9000여표를 얻어 1만4000여표에 그친 로드리게스를 더블 스코어 차이로 눌렀다. 로드리게스의 시대는 공격형 포수의 시대였지만 벤치의 시대는 수비형 포수가 넘쳐나던 시대라 경쟁이 훨씬 치열했다.
1970년대 포수들은 지금보다 훨씬 투박하고 무거운 장비들과 싸웠다. 특히 잘 다물어지지 않는 미트에 두 손으로 포구를 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미트를 끼지 않는 오른손 부상이 빈번했다. 하지만 벤치는 제조업체에 경첩을 달아 잘 접어지는 미트를 주문한 다음 한 손 포구에 나섰다. 포수들이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출 수 있게 된 시작점이었다. 훗날 벤치는 한 손 포구의 창시자는 자신이 아니라 랜디 헌들리라고 밝혔지만, 이를 정착화시킨 것은 벤치였다.
벤치는 그 외에도 현재 포수 수비의 기본이 되고 있는 여러 동작들을 만들어냈다. 마스크 아래 모자 대신 처음으로 헬멧을 쓴 것도 벤치였다.
벤치의 등장은 포수의 역사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기도 하다. 베라-로이 캄파넬라-미키 코크레인이 사라진 이후, 메이저리그에는 수비형 포수가 득세했다(1960년대가 최고의 투고타저 시대였던 것에는 이들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968년 벤치가 나타남으로 인해 흐름은 다시 바뀌었다.
벤치(통산 .267 .342 .476)는 포수로서는 피아자(427개) 다음으로 많은 389개의 홈런을 때려냈다(순수 포수 홈런만 따지면 1위 피아자 396개, 2위 칼튼 피스크 351개, 3위 벤치 326개). 또한 1376타점은 베라(1430타점)에 이은 포수 2위다. 벤치의 기록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베라, 피아자와 달리,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극심했던 투고타저 시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40홈런-100타점을 달성한 포수는 벤치를 포함해 5명(나머지는 캄파넬라, 피아자, 토드 헌들리, 하비 로페스). 벤치는 피아자와 함께 이를 2차례 달성했으며, 유일하게 포수로서 홈런왕(2회)에 올랐다. 벤치는 3홈런 경기를 3번 만들어낸 유일한 포수이기도 하다(개리 카터 2번, 피아자 1번). 지금까지 타점왕에 오른 포수는 벤치를 포함해 4명(나머지는 캄파넬라, 개리 카터, 대런 돌턴). 3차례 1위에 오른 벤치를 제외하면 2차례 오른 선수도 없다.

천재의 등장

자니 리 벤치(Johnny Lee Bench)는 1947년 12월7일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서 태어났다. 3형제 중 막내였던 벤치는 오클라호마주 최고의 스타였던 미키 맨틀을 우상으로 삼고 자랐다. 한편 벤치에게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섞여 있는데, 그는 증조부 중 1명이 인디언 촉토족 출신이었다.
벤치의 아버지는 그가 타고난 포수임을 눈치챘다(특히 벤치는 어마어마하게 큰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손에 야구공 7개를 쥘 수 있었다[사진]). 이에 벤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스크를 썼으며, 19살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많은 포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벤치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야구 팀 버스가 전복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2명의 선수가 사망했지만, 벤치는 털끝 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고교 졸업반 때 벤치는 팀 사정 때문에 주로 투수로 등장했다. 이에 많은 팀들이 투수로서 덜 다듬어진 벤치만 보고 갔다. 하지만 벤치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신시내티는 그가 포수로서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에 신시내티는 1965년 제1회 드래프트에서 벤치를 2라운드 전체 36순위로 지명했다. 특히 신시내티 다음으로 벤치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바로 앞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볼티모어가 두 번 모두 다른 선수를 지명한 것이 다행이었다.
1967년 만 19세의 나이로 데뷔한 벤치는 이듬해인 1968년 스프링캠프에서 테드 윌리엄스를 만났다. 벤치는 윌리엄스에게 사인볼을 요청했는데, 벤치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윌리엄스는 공에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어줬다.

'To Johnny Bench, a Hall of Famer for sure'
(명예의 전당이 확실한 자니 벤치에게)

그 해 벤치는 .275 15홈런 82타점을 기록하고 신인왕이 됐다. 포수가 신인왕이 된 것은 1947년 상이 제정된 이래 처음이었다. 154경기 출장은 신인 포수 최고 기록이었으며, 내셔널리그 포수로는 최초로 40개의 2루타를 날렸다. 또한 벤치는 골드글러브를 따낸 최초의 신인이 됐는데, 투표권을 가진 감독들이 주로 '뽑던 선수를 뽑는' 골드글러브는 신인에게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스무살짜리 포수였던 벤치가 얼마나 노련했는지는 다음의 일화가 말해준다. 그 해 스프링캠프에서 벤치는 8년차 베테랑 짐 말로니의 공을 받아주고 있었다. 말로니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위력이 크게 떨어진 패스트볼만 고집하고 있었다. 이에 벤치의 변화구 사인을 무시하고 패스트볼만 던졌다.
마운드에 올라갔다가 욕만 진탕 먹고 돌아온 벤치는, 이번에도 말로니가 사인을 무시하고 패스트볼을 던지자 잽싸게 미트가 아닌 맨손으로 공을 잡았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공을 돌려줬다. 그제서야 자신의 패스트볼이 과거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말로니는 이후 철저히 벤치의 사인을 따랐다. 그리고 이듬해 벤치와 함께 노히트노런을 만들어냈다.

벤치의 타격 모습 ⓒ gettyimages/멀티비츠

빅 레드 머신

1969년 벤치는 .293 26홈런 90타점을 기록하며 더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무려 .571에 달한 도루 저지율이었다. 벤치의 통산 도루 저지율은 .435로, 10년 이상을 뛴 포수 중 이반 로드리게스(.456)와 서먼 먼슨(.445)에 이은 역대 3위에 해당된다.
벤치는 1976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믹 더 퀵'(Mick the Quick)으로 불린 미키 리버스(1975년 70도루)의 도루 시도를 무시무시한 송구로 잡아냈는데, 양키스는 이후 월드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도루 시도를 하지 않았다.
1970년 벤치의 무시무시한 공격력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물두살의 벤치는 .293 45홈런 148타점을 기록,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고 내셔널리그 역대 최연소 MVP가 됐다. 45홈런과 148타점은 1953년 캄파넬라의 41홈런 142타점을 경신한 포수 신기록이었다. 한편 벤치는 45개 중 7개를 다른 포지션(1루수 외야수)에서 기록했는데, 포수 홈런만 따지면 2003년 하비 로페스가 기록한 42개가 최고 기록이다(토드 헌들리 41개 2위, 피아자-캄파넬라 40개 3위).
1971년 잠시 주춤했던 벤치는 1972년 .270 40홈런 125타점의 성적으로 2번째 홈런-타점 동시 석권과 함께 2번째 리그 MVP에 올랐다. 특히 6월에는 5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1970년부터 1978년까지 9년간, 벤치는 매년 골드글러브와 함께 연평균 30홈런 104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벤치(268홈런 933타점)보다 더 많은 홈런이나 타점을 기록한 타자는 없었다.
벤치의 활약은 포스트시즌에서도 빛났다. 벤치는 1972년 피츠버그와의 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최종전에서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동점 솔로홈런을 날렸다. 결국 신시내티는 2사 1,3루에서 폭투로 결승점을 얻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1973년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에서도 벤치는 메츠의 에이스이자 그 해 사이영상 수상자였던 톰 시버를 상대로 끝내기홈런을 날렸다.
1976년 월드시리즈는 그 정점이었다. 벤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양키스의 기동력을 완벽히 봉쇄했을뿐 아니라 4경기에서 .533 2홈런 6타점의 맹타를 휘두르고 시리즈 MVP가 됐다. 특히 4차전에서는 4회 1-1 동점 균형을 허무는 투런홈런을 날린 데 이어, 3-2로 앞선 9회초 쐐기 스리런홈런을 날려 양키스에게 4연패라는 수모를 안겼다. 양키스가 40번의 월드시리즈에서 4연패를 당한 것은 이 때가 3번째(1922년 자이언츠, 1963년 다저스)이자 마지막이었다.

조금 이른 퇴조

베라에게 캄파넬라가 있었다면, 벤치에게는 피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베라와 캄파넬라의 활약 시기가 겹쳤던 것과 달리(이들은 1951년부터 1955년 사이 각자의 리그에서 3개씩의 리그 MVP를 따냈다), 벤치와 피스크는 그렇지 않았다.
피스크는 벤치와 생일이 거의 같았다(벤치 1947년 12월7일생, 피스크 1947년 12월26일생). 하지만 피스크는 벤치(1968년)보다 4년 늦게 신인왕을 따냈으며(1972년), 벤치가 리그를 지배한 첫 8년 동안 특별한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0대가 되면서 둘의 상황은 역전됐다. 벤치는 30세 시즌이었던 1978년 .260 23홈런 73타점 시즌을 시작으로 하향세가 시작됐다. 반면 피스크는 29세 시즌부터 터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벤치보다 10년을 더 뛰고 은퇴했다.

만 29세 시즌까지(첫 풀타임 - 벤치 20세, 피스크 24세)
벤치  : .268 .343 .484 / 1513경기 287홈런 1038타점
피스크 : .285 .360 .489 /  699경기 114홈런 376타점
만 30세 시즌 이후(은퇴 - 벤치 35세, 피스크 45세)
벤치  : .265 .337 .454 /  645경기 102홈런 338타점
피스크 : .263 .333 .444 / 1800경기 262홈런 954타점

1981년 벤치는 무릎 상태가 더 이상 포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자 1루로 이동했다. 하지만 발목 골절 부상으로 52경기 출장에 그쳤다. 1982년 .258 13홈런 38타점, 1983년 .255 12홈런 54타점에 그친 벤치는 결국 1983년 만 35세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벤치의 이른 퇴장은 '투수의 어깨'처럼 '포수의 무릎' 역시 소모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벤치의 무릎은 아버지의 조기 교육과 빠른 데뷔 탓에 너무 빨리 닳았다.
그렇다고 벤치가 포수로서 롱런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데뷔 후 13년 연속으로 100경기 이상 마스크를 쓴 것은 벤치가 사상 최초였으며, 이는 지금도 내셔널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다. 벤치는 데뷔와 함께 10년 연속으로 골드글러브를 따냈으며, 데뷔 첫 해부터 1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다.
1989년 벤치는 칼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96.4%의 득표율은 당시 역대 3위였으며, 지금도 포수 최고의 득표율로 남아 있다(야스트렘스키 94.6%). 당시 벤치가 100%에 실패하자 한 신문에는 <벤치에게 100%를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줄 수 있겠냐>는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2000년 미국대학야구협회는 최고의 포수에게 주는 상을 만든 후 <자니 벤치 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켈리 쇼팩, 라이언 가코, 커트 스즈키, 버스터 포지 등이 이 상을 받았다(한편 2004년부터 대학 최고의 투수에게 줬던 '로저 클레멘스 상'은 클레멘스의 약물 논란이 있은 2008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역대 1,2위의 포수 자니 벤치(왼쪽)와 요기 베라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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