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일 목요일

[매거진S] 박찬호, 긍정의 힘으로 야구를 되찾다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09-12-03 17:34
ⓒ민훈기


긍정의 힘으로 월드시리즈에 서다 'Chanho, He's OK!'
2009시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두 명의 한국인이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는 떠오르는 외야수 스타 추신수(28)가 빼어난 활약으로 밝은 미래를 기약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는 만 서른여섯의 노장 박찬호가 구원 투수로 변신해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메이저리그의 중앙 무대에 다시 섰습니다.
민기자닷컴은 시즌 종반의 부상을 딛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과 꿈의 무대인 월드시리즈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 박찬호를 2009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박찬호가 걸어온 길은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LA 다저스에서 스타덤에 오른 후 텍사스로 이적하면서 부와 명예를 차지했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전 빅리그의 아무 팀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불명예 은퇴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스프링 캠프에 겨우 합류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친정팀 다저스로 복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더니 올해는 필리스에서 필승조 구원 투수로 확실하게 재기했습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일시 귀국한 박찬호는 기자회견에서 'It's OK!'라는 재기의 발판이 된 긍정적인 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이 과연 15년 넘게 멀고 험한 길을 헤쳐 온 박찬호의 힘이 되었는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신사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샌디에이고 전격 트레이드 상황과 악플러에 대한 생각, 국내 야구 진출을 생각했던 2008년 초 상황, 그리고 그가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긍정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박찬호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어려울 때마다 'It's OK!'라는 생각으로 이겨냈다는 말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어떤 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너무 많이 져봤기 때문에, 너무 많이 실패해봤기 때문에 또 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힘들어도 해낼 수 있고 실패해도 괜찮은 이유를 만든다. 'It's OK, 괜찮아, 문제없어'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쉬워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이 보이지 않다가도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용기 내려는 의지력이 강해지고, 짧든 길든 길이 보이게 된다.
미국 야구에 도전하면서 많은 좌절이 있었을텐데. 첫 번째 시련은 언제였나.
처음 마이너리그로 갔을 때다. 처음엔 크게 아프지 않았다, 뭐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진짜 좌절을 마이너로 가서 겪었다. 잠깐 있었던 빅리그에서 받았던 대우나 인정이나 보호, 그런 것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차별과 다툼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지독히 냉정했고 위로도 전혀 없었고 좌절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서두르고 빨리 잘하려고 했지만 정신적 문화적 장애가 아주 컸다. 육체적으로도 경기를 하려고 이동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처음에 나는 내 능력이 대단해서 메이저리그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착각했다가 나는 그저 일개 대학 다니던 초라한 선수에 불과하구나 하고 느꼈다. 착각이었고 실망했고 부끄러웠다.
포기할 생각도 했었는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나.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당시는 (구단주)피터 오말리씨가 나를 지켜주었다. 매주 내게 편지를 했고 통역과는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면서 포기하면 안 된다고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셨다. 어려서부터 어렵게 운동을 했는데 형제들을 차별하면서까지 나를 늘 지지하고 지원해 주셨다. 그것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저스에서 큰 성공을 했지만 텍사스에서는 참 힘들었다. 텍사스 시절을 내내 곁에서 지켜봤는데 (내색은 잘 하지 않았지만)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말 많은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 힘든 것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참 많았다. 인간적인 삶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늘 최고라는 우쭐함이나 나 자신만을 보호하려는 그런 생활을 연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더 부드러워지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삶의 진실한 의미는 최고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런 좌절에서 가르쳐주는 것 같다.
그 어려움을 이겨낸 힘은 무엇이었나.
노력의 시간들이었다. 역경, 시련, 고통, 아픔.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겪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들 단어는 부정적이지만 의미는 더 큰 진실함과 강함과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생각하고 명상하고 책을 보면서 나의 의지와 뜻과 현실을 비교해봤다.
그리고 야구를 보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야구는 매 회마다 우여곡절이 있다. 인생과 마찬가지다. 혼자 할 수 없으니 더불어 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기고 싶다는 목표는 있지만 어떻게 해 나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대량 실점을 소량 실점으로 막는다든지 위기를 침착하게 넘긴다든지 그런 마음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당시 원형탈모증이 생길 정도였는데.
다저스 시절 모든 국민이 나의 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텍사스로 가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존심은 뭉개지고 존재가치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악플러들. 정말 수많은 악플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나 대신 싸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수십 개의 악플 중에도 한두 개의 선플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해 주고 지원해주던 그분들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다시 재기하고 좋아지니까 악플러들도 바뀌더라. 나를 괴롭혔던 요인들, 야유하는 팬들, 기사를 나쁘게 쓴 기자들, 그러나 그 자체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시련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꼭 재기해서 저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자극제가 됐다.  
텍사스에서의 부진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이유라면.
우선 (재활이)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 감독의 차별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인권이 완전히 묵살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준비가 됐다고 하면 마이너에 내버려뒀고, 몸이 안 좋을 때는 던지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꿨다. 오죽 내게 자신감이 없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난 개인적인 생각만 하지만 저 사람은 팀을 생각하니까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죽고 눈치 볼 것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트레이닝실로 가려면 감독방을 지나야 하는데 처음엔 그를 피해 다녔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매일 내가 먼저 가서 인사를 하고 농담을 건네고 했다. 깜짝 놀라더라. 계속 그렇게 하니까 자신감이 생겼고, 나를 다르게 보고 쉽게 대하지 못했다.
'약하면 계속 당할 수 밖에 없다. 강해져야 하고 대담해야 하고 그리고 지식과 지혜가 풍부해야 한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면서 몸도 다시 좋아졌다. 2005년에는 다시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당시 텍사스에서 20경기 선발에 8승5패를 기록하다가 트레이드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된 상황은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나.
나도 전혀 몰랐었다. 트레이드 당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토론토전에서 등판 준비를 하는데 경기 45분 전에 갑자기 던지지 말라는 통고를 받았다. 나는 그 경기는 던져야 한다고 실랑이를 했다. 전날 한인 타운에서 교민들도 많이 만났고, 그날 경기장에서 많은 한국분들이 오셨다. 그리고 당시 몸도 많이 좋아졌고 정말 잘 던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걱정도 됐다, 혹시 트레이드가 깨지면 어쩌나 하고.(웃음) 그러나 텍사스는 나를 없애버릴 절호의 기회였고, 샌디에이고도 (거액 연봉의)필 네빈을 내보낼 절호의 기회였다. 실랑이를 하다가 시간이 흘렀고 결국 등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짐을 싸고 호텔로 갔다. 속으론 후련했다.
2006년 여름 장출혈과 수술도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는데.
처음 출혈이 있었는데 부위를 찾지 못했고 피가 멈춘 후 수혈을 받으니 몸이 갑자기 좋아져 또 두 경기를 던졌다. 두 번째 출혈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증상은 오히려 덜했는데 검사를 해보니 장에 난 구멍도 의사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출혈도 아주 많았다. 피의 3분의 1 이상이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곧바로 장의 구멍 난 부위를 절제하고 접합하는 큰 수술을 했다. 당시 10명의 피를 수혈받았는데 작년인가 검사를 해보니 여러 명의 피가 섞이다 보니 많이 탁해져서 약도 먹고 식이 요법 등으로 힘들게 피를 다시 맑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8월에 수술을 받고 42일 만에 복귀해 경기에서 던졌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었나.
처음엔 1주일 동안 걷지도 못했을 정도로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요해서 복귀한 것은 아니었다. 아예 필요성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거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듯이 나는 야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해보니 회복이 빨랐고, 그래서 결국 정규 시즌 막판에 복귀했다. 그래서 첫 포스트 시즌 등판도 이루어지지 않았나.
2년 반 전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 애리조나에서 만난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라도 야구를 계속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느냐고 반문했었는데. 포기할 생각은 정말 없었나.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그만둬야할지 계속 심각하게 생각했고 마음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낸다면 더한 역경과 그리움과 아쉬움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계속 도전을 하면 적어도 끝은 아니지 않은가. 포기하는 순간 내가 목표로 정했던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도전을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배수의 진이 있었다.
배수의 진이라니.
만약 그 시즌을 그렇게 보내고도 다음 시즌(2008년)에도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야구는 나를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2008년 초 다저스에서 기회를 주었는데.
일본에서 WBC 훈련을 하고 있는데 다저스에서 연락이 왔다. 초청선수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길은 생겼다 싶었다. 몸만 안 아프면 잘해낼 자신은 있었다.
그럼 2008년 스프링 캠프에서 잘 안됐더라면 국내 팬들이 일찍 박찬호가 한국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겠다.(웃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약간 두려워진다. 우리 타자들이 너무 잘해서 망신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웃음) 한국 야구에서 반드시 뛰고 싶다. 잘 던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경기를 던지더라도 보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프로팀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는 것이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다. 그리고 한국 야구 흥행에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정인가.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은 메이저리그에서 더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다.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계속 도전을 한다는 말인가.
이젠 10승을 하려고 도전하고 사이영상을 타려고 도전하고 그리고 그저 야구를 계속하려고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홈런 타자들은 갑자기 파워가 떨어지면 안타로 버텨갈 수는 없지만 투수는 힘이 떨어져도 컨트롤과 제구력으로 이어갈 수 있다. 아직은 충분히 해낼 수 있기에 도전을 멈출 수는 없다.
강속구 투수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자신도 원래 힘을 앞세운 투수이지 제구력이 아주 뛰어난 투수는 아니었지 않은가.
내게도 분명 약점이 있다. 그러나 텍사스 시절 슬럼프와 부상으로 힘이 떨어졌을 때 제구력과 정교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연구를 했다. 예전에 클레멘스와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대단한 강속구 투수였지만 그보다도 정교함과 제구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투수가 됐다. 나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부족함은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It's OK'라고 생각했다. 그 길었던 힘든 시간 속에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그런데 제구도 좋아진데다 오히려 구속이 살아나면서 더 효과적인 투수가 된 것 같다. 구속 회복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는 구원 투수로 더 효과적인 피칭을 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
다시 200이닝을 던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즘은 200이닝 던지는 투수 자체가 드물다. 그리고 구원 투수도 매력이 있다. 작년에 다저스에서도 많이 배웠고, 올해 필리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또 많이 배웠다.
구속을 다시 찾은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이창호 개인 트레이너에게 제대로 된 운동법을 배워 몇 년째 하고 있고, 스트레칭도 하루 세 번씩 빠지지 않고 한다. 턱관절 교정도 많았고 음식 조절도 집사람이 세심하게 해준다. 부상에서 완쾌된 것도 중요하고 장 수술 후 꾸준한 운동으로 필요한 근육도 많이 키웠다.
메이저리그에서 마흔까지 뛰고 싶다는 목표는 아직도 그대로인가. 지도자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2~3년 더 던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지도자는 어쩌면 내 삶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자기의 길을 가르쳐주면 안 되고 야구면 야구, 축구면 축구를 가르쳐줘야 한다. 모두가 나처럼 될 수는 없다. 더 잘 될 수도 있고, 더 안 될 수도 있다. 명예나 부가 아니라 걸어온 길, 야구의 방법 그런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야구 장학금 등 자신도 그렇고 미국의 선수들은 사회봉사나 기부 등을 아주 활발히 한다. 우리도 점점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것 같다. 그 점에 대한 견해를 말해 달라.
아직 우리는 문화적인 구조가 확실히 돼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려서부터 그저 쓰던 것을 물려주는 정도를 배웠다. 야구장학금은 97년에 시작했으니 13년째 하고 있는데 장학생이 400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처음에 (김)병현이와 (김)태균이도 장학생이었다는 말을 들으니 흐뭇했다. 프로 선수 중에도 꽤 있는 것 같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기부를 한다는 것은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는 후배와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 자신은 결국 나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남이 해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나아가길 바란다. 착각, 질투, 콤플렉스 그런 모든 부정적인 요인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삶이 남에게 어떻게 보여 지느냐 때문에 노력한다면 항상 불안정할 수 있다. 그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늘 팬에게 크게 감사하고 부모, 선생님, 아내, 가족 모두를 사랑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내가 공을 던지는 순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내가 던지고 싶은 곳에 던지기 위해서만 던진다. 또 그 다음 공도 마찬가지다.
긴 시간 감사한다. 그런데 아직 내년에 뛸 팀에 대한 소식은 없는지.
즐거웠다. 아직은 팀 소식이 없다. 필리스가 되든 다른 팀이 되든지 편안하게 잘 던질 수 있는 팀을 선택하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승리할 수 있는 팀,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는 팀을 신중하게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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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박찬호
박찬호 귀국 기자회견
박찬호 강연-내가 경험한 메이저리그
 
 


[매거진S] 메이저리그의 치명적인 유혹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09-07-30 20:41
ⓒ민훈기


대한민국 야구 선수들의 미국 진출 선봉에 섰던 박찬호(36ㆍ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참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의 불가능한 리그로만 여겨지던 메이저리그의 벽을 우리 선수들이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야구를 통해 얼마나 엄청난 인생 전환을 이룰 수 있는지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구를 동경하는 수많은 청소년에게 꿈과 그리고 꿈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도전 의식과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한 해 최고 130억원의 연봉을 받던 그의 모습은 많은 야구 지망생들과 부모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박찬호는 미국 진출 후 연봉으로만 8000만 달러(요즘 환율로 약 1000억원) 가까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에게 보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찬란함 뿐.
그 화려한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고통과 고뇌와 좌절과 실망은 보여주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 생활 2년 만에 빅리그에 진출해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수많은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라는 꿈을 향해 온몸과 마음을 던졌지만 좌절도 아주 많았습니다.
미국 야구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앞에 거대한 장벽처럼 다가서는 마이너리그의 어려움과 난관들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2년간의 짧은 마이너 생활을 거쳐 빅리그에서 성공한 박찬호는 대단한 노력 만큼이나 행운도 따른 선수였습니다. ⓒ민기자닷컴
성공 가능성은? 23.5%? 3.9%?
박찬호가 보여준 가능성과 그리고 성공은 메이저리그 팀의 시각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94년 초 스무 살짜리 깡마른 코리언이 플로리다 주 베로비치의 다저스 스프링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158km의 강속구를 뿌려대자 유명 야구 컬럼니스트인 피터 개몬스는 ‘당장에 빅리그에서 통할 수 있는 선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박찬호는 동료 드라이포트와 함께 빅리그 사상 17,18번째로 드래프트 되자마자 곧바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야구 변방 정도이던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들도 빅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활짝 열렸고, 빅리그 팀들은 스카우트를 한국으로 급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수많은 선수가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맺고 태평양을 넘었습니다. KBO 자료에 따르면 최근 LA 다저스와 계약한 남태혁까지 총 51명의 한국 선수가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중에 단 한 번이라도 메이저리그 경기에 뛰어본 선수는 총 11명입니다. 23.5%가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으니 상당히 높은 성공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박찬호, 봉중근, 서재응, 김선우, 조진호, 백차승, 최희섭, 김병현, 이상훈, 추신수, 류제국, 구대성 등이 ‘코리언 빅리거’들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풀타임으로 5년 이상 뛴 선수는 박찬호와 김병현 둘 뿐입니다(3.9%). 앞으로 추신수가 그 뒤를 이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재응이나 최희섭, 봉중근, 김선우 등도 일정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지만 결국 정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2001년 건너간 류제국 이후 빅리그 팀과 계약한 26명의 선수 중에 메이저리그에 오른 선수는 딱 한 명, 그것도 일본 프로를 거쳐 2005년 뉴욕 메츠에 진출한 구대성이 유일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최근 8년간 메이저리그의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넌 25명의 유망주는 모두 아직 마이너리그에 머물거나 아니면 야구를 포기했습니다. 한때 미국 진출이 주춤했다가 2005년 이후 다시 활발해진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빅리그의 벽은 오히려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대 초반 유망주들만 뛰는 애리조나 폴리그에서 뛰던 조진호, 김선우, 최희섭. 모두 빅리거로 자리잡을 수 있는 자질을 지녔지만 결국 정착에는 실패하고 국내로 복귀했습니다.ⓒ민기자닷
다양한 실패의 원인-문화차이, 언어 장벽, 불운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마이너리그로 배속되면 대부분 초반에는 두각을 보입니다. 국내 유망주들을 주로 데려가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식 강훈련에 익숙한 선수들은 어린 나이에는 같은 또래의 미국이나 중남미 선수들보다 훨씬 앞선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착하는 과정에서 양국 야구의 문화 차이는 큰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미국 프로야구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단체 훈련이 한국처럼 체계적이고 강하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에 큰 자유가 갑자기 주어졌을 때 방황하는 유학생들처럼, 마이너에 배속된 우리 선수들도 똑같은 문화적 차이와 충격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오히려 기량이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자율 훈련에 익숙지 않고 경기 후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으니,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주어진 큰 자유의 바다에 빠져 허덕입니다. 자칫하면 야구를 배우고 발전할 가능성은 한국보다 훨씬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현지에 적응하는데 언어불통은 큰 문제로 자리합니다. 단순히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점도 어려움이지만 기술 습득이나 팀에 적응하는데도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이 오해를 산 경우가 많은 것 역시 언어 소통의 문제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김병현 선수가 작년 스프링 캠프 중 피츠버그 팀에서 방출된 가장 큰 이유도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돼서 오해를 산 때문이었습니다. 불펜 피칭 시간을 놓고 코칭스태프와 김병현이 서로 시간을 정확히 전달받지 못한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고, 그것을 충분히 풀지 못하면서 결국 방출로 이어졌습니다. 서재응이 탬파베이에서 내쳐진 과정이나 김선우가 몬트리올 시절 자리 잡지 못한 것도 심도 있는 의사소통 부재가 큰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미국에 진출한 어린 선수들은 벙어리처럼 지내거나, 필요한 것이 있어도 요구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정확한 사실 전달을 하지 못하고, 또 자기주장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야구 말고도 또 다른 커다란 장벽이 그들을 막아섭니다. 그래서 통역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웬만큼 거물 선수가 아니면 통역사는 불가능합니다.
빅리그 진출에는 운도 큰 작용을 합니다.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한 선수 중에 가장 아쉬운 선수는 롯데에서 뛰는 송승준입니다. 빅리그 승격 날짜를 받아 놓고 마지막 마이너리그 경기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무산된 적도 있고, 스프링 캠프에서 메이저리그 팀을 상대로 계속 호투하다가 마지막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맞아 다 잡았던 개막전 티켓을 놓친 일도 있습니다.
김선우도 그렇고 봉중근이나 최희섭, 서재응도 조금만 운이 더 따랐더라면 빅리그에서 충분히 정착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습니다.
물론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그것이 문화 차이나 언어의 장벽 등과도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성패의 갈림길에서 대부분 불운 쪽으로 기우는 일이 많습니다.
오말리 전 다저스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던 박찬호는 큰 운도 따르는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언어와 풍습과 인종 등 다양한 이유로 운조차 따르지 않을 때가 잦습니다.
커브스에서 애지중지하는 두 한국 선수. 이대은은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고 이학주는 싱글A에서 뛰고 있습니다. 어린 선수들은 순조롭게 발전해도 4~5년은 잡아야 빅리그가 보입니다.ⓒ민기자닷컴
에이전트와 스카우트 그리고 입단 보너스
박찬호는 1994년 당시로써는 드래프트 1라운드 상위권에 뽑힌 선수에 버금가는 120만 달러의 입단 보너스를 받았습니다.
봉중근(120만), 서재응(135만), 김선우(125만), 백차승(129만), 최희섭(120만), 김병현(225만, 연봉 포함), 추신수(137만) 등도 모두 파격적인 사이닝 보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메이저리그에 승격했습니다.
반면 최경환(5만), 최창양(4만), 김재영(20만), 서재환(10만) 등 초창기에 진출한 선수 중에도 아주 낮은 보너스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선수들도 꽤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빅리그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가능성이 큰 선수들에게 높은 사이닝 보너스를 지급하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은 보너스를 받고 계약한 선수들은 성공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희박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적은 계약금의 선수는 미국과 도미니칸 등 중남미 선수들을 포함해 마이너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런 선수들을 그저 방목되는 수준입니다.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대부분 그저 금방 잊혀지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최근 다시 많아진 우리 어린 선수들의 미국 진출이 우려되는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2001년 류제국(160만) 이후 미국에 진출한 26명 중에 100만 달러 이상의 입단 보너스를 받은 선수는 정영일(100만)과 이학주(115만) 둘 뿐입니다. 커브스의 유망주 이대은이 81만 달러를 받았고, 텍사스와 계약한 안태경이 8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 외에는 5000달러를 받은 선수도 있고 10만 달러에 계약한 선수들도 많습니다. 그런 선수들은 구단에서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심지어는 마이너에서조차 출전 기회도 자주 주지 않고 후보로 돌다가 벌써 야구를 접은 선수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에이전트와 스카우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달콤한 감언이설에 현혹돼 내용도 잘 모르고 덜컥 계약을 했다가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마이너 선수에 대해 미국 에이전트들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 에이전트를 구하는 것이 유리한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에이전트를 구해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따릅니다.
일부 에이전트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고 고생만 한 경우도 빈번합니다. 구대성을 비롯해 에이전트를 상대로 한 법적 분쟁도 나왔고, 지금도 여러 선수가 일부 에이전트와의 관계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에이전트 비는 구단과 계약할 때는 통상 7~10% 선이고,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들어가면 연봉의 5~7% 선입니다. 마이너리그 선수는 에이전트비가 없습니다.
미국의 야구 에이전트는 자격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등록제이기 때문에 에이전트 선정과정에서 반드시 심사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카우트와 직접 계약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스카우트는 구단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적이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좋은 선수를 적은 액수에 계약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 제대로 된 에이전트라면 30개 구단에 선수를 홍보해 가장 좋은 입단 보너스를 받고 선수를 계약합니다. 그러나 스카우트와 직접 협상을 한다면 일단 한 팀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다, 만약 스카우트가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라도 하면 끈은 바로 끊어집니다.
제대로 된 에이전트를 구해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계약을 맺고 진출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작부터 어그러진다면 성공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틀랜타의 더블A에서 마무리로 활약하던 정성기는 국내 복귀를 희망하고 있지만 이상한 제재 규정 때문에 국제 미아가 될 지경에 몰렸습니다.ⓒ민기자닷컴
정성기의 좌절과 해외파에 대한 제도적 모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투수 정성기(30)의 빅리그 진출 실패도 또 한 가지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2002년 6월 동의대 재학 중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한 정성기는 2003년까지 애틀랜타 마이너에서 뛰다가 군복무로 공백이 있었지만 2007년 다시 애틀랜타가 데려갔을 정도로 애착을 가지던 선수였습니다.
하이 싱글A와 더블A에서 뛴 2007시즌에는 23세이브에 평균자책점 1.30의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싱글A 올 해의 선수상을 받기도 했고, 작년 스프링 캠프 때는 메이저리그 경기에 몇 차례 뛸 정도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단장이 교체된 작년부터 애틀랜타 구단에서 정성기를 점점 관심 밖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단장이 자신이 선택한 선수들에 대해서만 애정을 갖는 것은 미국 야구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정성기를 아끼던 인물들은 실권을 잃었습니다.
올 시즌 트리플A에서 시작할 것이라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정성기는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습니다. 에인절스가 트레이드를 원했지만 정성기는 이젠 국내에서 뛰고 싶다는 소망으로 트레이드를 거절하고 국내 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모교인 순천 효천고에서 후배들과 훈련을 하면서 8월의 드래프트에서 선택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 시즌 초에 정해진 규정 때문에 그의 국내 야구 진출의 꿈에 제동이 걸리게 됐습니다.
이 규정은 ‘국내 고등학교 이상 재학 중 해외에 진출한 선수가 국내로 돌아올 때 2년간 입단 계약을 할 수 없고, 지도자로서도 국내 구단과 7년간 계약할 수 없다.’라는 것이 골자입니다. 국위선양을 한 해외파나 드래프트에서 국내 지명을 받지 않고 해외에 진출한 뒤 복귀를 희망하는 선수에 대해 2년의 유예기간 없이 국내 구단과 계약할 수 있도록 한 예외조항도 폐지됐습니다.
8개 구단 단장들은 지난 4월 28일 아마추어선수의 무분별한 해외진출 방지를 위한 특별대책회의를 열고 이 규정을 확정했으며, 이를 KBO가 4월 30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상당히 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정성기를 비롯해 미국에 진출한 많은 선수는 국내에서 드래프트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국내에서 뛸 기회가 없었던 선수들까지 국내 복귀 후 2년간 뛸 수 없게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너무 가혹한 조치라는 데는 관계자들도 조차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게다가 4월에 만든 이 규정을 그 전에 국외로 나간 선수들에게까지 소급 적용한다는 것 역시 분명히 무리가 있습니다. 정성기는 7년 전에 미국에 진출하고도 지난 4월에 만들어진 규정에 묶인 셈이 됩니다.
결정적으로 이 규정은 어린 선수의 취업 권리를 강제적으로 막는, 국민의 기본법에 저촉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한 지난 2007년 해외파 특별지명제도로 이승학, 채태인, 송승준, 최희섭 등이 국내 복귀를 했는데 정성기나 다른 선수들은 안 된다는 것도 공평성에 어긋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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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완 사이드암 투수 정성기의 마이너 시절 최고 구속은 148km를 약간 웃돌았습니다. 포심과 투심 패스트볼을 모두 던지며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업슛의 구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너에서 총 143게임을 뛰면서 3승8패 4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69를 기록했습니다.
30일 트레이드에 참가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은 정성기는 “그동안 복귀 가능성을 타진하느라 KBO를 찾아다니고 법적으로도 알아보고 하느라고 진이 빠졌다. 지금도 에인절스에서는 관심이 있다고 연락이 온다. 그러나 이젠 국내에서 뛰고 싶은데, 이러다가 야구를 하려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하는 것 아닌지 암담하다.”라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정성기는 이 규정의 법적인 해석에 대해 변호사에게 자문한 상태입니다.
정성기가 국내 프로에서 성공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의 복귀 시도 자체를 강제로 막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1년 시애틀에서 열린 올스타전 퓨처스게임 인터내셔널팀 대표로 나선 서재응과 송승준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국내로 돌아왔습니다.ⓒ민기자닷컴
앞으로 대책과 조언
어린 유망주들의 대거 해외 유출은 본인들에게나 국내 야구에나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국내 프로야구계의 우려도 당연합니다. 유영구 KBO 총재는 버드 셀릭 MLB 커미셔너에게 직접 그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과 제재규정 등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재의 규정은 선수들의 미래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맹점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선수들이 집단 소송이라도 벌인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떠나간 선수들의 복귀 시 제재를 할 것이 아니라 사전에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을 하는 것이 우선이 돼야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 나이에 미국 야구에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이며, 마이너리그가 대단히 험한 과정인데다 절대로 성공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선수들과 부모들에게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고교 졸업 후 미국에 진출하면, 탄탄대로를 밟는다 해도 적어도 5년은 잡아야 빅리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공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공보다 실패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이미 우리 선수들의 도전사에 전례가 남아있습니다.
미국 야구 진출의 바람직한 방향은 국내 프로에서 기량을 갈고 닦아 야구 선수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해외진출을 노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기존의 국내 프로 선수들이 미국 진출의 문을 열어줄 시도가 당연히 선행돼야 합니다. 김태균이나 이범호 등 올 시즌 후에 FA가 되는 선수들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그 외에도 9년이 지나야 FA가 되는 현 제도 등도 조금 손을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유혹은 대단히 달콤하지만 동시에 아주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선수들과 부모들이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도전해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그때는 최상의 선택으로 가능하면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늘일 수 있는 바른 길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게 최상의 선택을 해서 도전해도 험하고 멀기만 한 고지가 메이저리그입니다.



[매거진S] 추신수 "야구는 내게 행운이자 행복"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09-06-18 18:22
ⓒ민훈기



추신수(27ㆍ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6월18일 현재 추신수의 성적은 2할9푼9리에 9홈런 40타점, 39득점, 11도루입니다. 41개의 볼넷을 얻어 출루율은 4할1푼1리에 달합니다. 2루타 10개와 3루타 1개를 포함해 장타율이 4할6푼6리, OPS는 .867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출루율은 AL 전체에서 4위, 볼넷은 5위, 그리고 도루도 11위에 올라 있습니다. 삼진이 59개로 좀 많지만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 확실하게 개선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현재의 성적을 바탕으로 올 시즌 성적을 미리 환산해보면 22홈런, 97타점, 95득점, 99볼넷 그리고 27도루를 기록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야구에서 꿈의 기록 중의 하나인 20홈런-20도루-100타점-100득점도 노려볼만한 기세입니다.
추신수에겐 야구가 숙명과도 같아 보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당연히 야구를 하겠다는 그는 야구와 그리고 가족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시애틀 시절 애환도 많았고, 클리블랜드로 가서는 팔꿈치 수술을 받는 고난을 겪었지만 그의 쉼 없는 노력과 훈련과 투지는 결국 그를 메이저리그 팀의 4번 타자로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항상 가장 먼저 나와 경기를 준비하는 추신수. 인디언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선수로 성장한 그를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만났습니다. 그의 야구 생애와 그간의 애환, 앞으로 추구해갈 꿈 등을 들어봤습니다.

가족 소개 좀 해주세요.
 
아버님은 추 소자 민자, 어머님은 박 유자 정자를 쓰십니다. 그리고 동생 추신영이 있어요.
동생이 배우라고 들었는데.
백제예술대학을 나와 뮤지컬과 연극을 계속 했어요. 3년 전인가 명성황후에도 출연해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우연히 친한 형이 곽경택 감독님을 소개해준 적이 있습니다. 곽감독님은 제 고등학교 선배시기도 한데, 저녁 약속을 했는데 마침 그때 동생이 부산에 내려와 있었어요. 그날 동생이 서울에 올라가기 직전이라 같이 저녁 먹고 가자 해서 남포동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그런데 곽경택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동생은 무슨 일하느냐고 말이 나오다가, '친구'를 드라마로 만들려고 준비 중인데 오디션을 한번 보라고 하셨어요. 그게 잘 돼서 뽑혀 주인공의 남동생 배역을 맡게 됐습니다.
동생도 잘 생겼나 보네요.
동생이 훨씬 잘 생겼죠. 저는 그저 씩씩하게 생겼지만 동생은 연예인 같이 생겼죠. 지금은 예명인 추민기를 써요, 이번 기회로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아버님인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렸을 때 생활은 어땠어요.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은 건축업을 오래 하셨어요. 야구 선수 중에 부유하게 야구한 선수 있습니까. 저희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건축업이라는 것이 좋을 때는 좋고 또 어려울 때는 몹시 어렵기도 하고 그렇죠. 야구를 하면서 회비라든지 들어가는 돈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아무리 어려워도 용품도 늘 최고로 사주시고 보약 같은 것도 자주 해주시고 정말 최고로 지원을 해 주셨어요.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알았었나요.
그때 당시는 제가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별로 안 것 같지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 감사하죠.
작년인가 아버님이 건강이 안 좋으셨다고 했었는데.
건강은 이제 괜찮으세요.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에요.

늘 우상이던 삼촌
처음에 야구는 어떻게 접하게 됐어요. (부산 야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박정태 2군 코치가 추신수의 삼촌이니 바보 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삼촌이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유치원 가기 전부터 방망이를 잡고 놀았지요. 유치원에 가서는 늘 애들과 야구를 하고 옆 동네 애들과 시합도 했어요. 초등학교 가서는 형들과 많이 했어요. 처음엔 테니스공으로 하고 나중에는 연식 공으로 하고 그랬죠. 제 기억으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방망이에 글러브 탁 끼어가지고 동네 고등학교로 가서 종일 야구를 했어요. 깜깜해질 때까지 야구를 했죠.
아무래도 삼촌의 영향이 컸겠어요. 

삼촌이 우상이었죠,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고 그랬죠. 그러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했어요, 처음엔 집에서 가까운 대연 초등학교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삼촌이 1년 후배가 감독을 하시는 수영초등학교를 가라고 했어요. 정장식 감독님이셨어요. 안타깝게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병문안도 몇 번 가고 했었는데..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언제부터였나요. 사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야구만 좋아서 했죠. 뭐가 되겠다, 그런 꿈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땐 부산중학교나 경남중학교 같은 야구 명문 학교에 가는 것이 꿈이었죠.
그럼 언제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가요.
수영 초등학교 졸업하면 원래는 대천중학교로 가는 것인데 저는 부산 중학교로 스카우트됐죠. 그리고 부산고등학교 2학년 때 쯤 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진짜로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제가 1학년 때 (백)차승이 형이 미국을 갔어요. 그래서 미국 야구라는 꿈을 더 키우게 됐죠.
그럼 국내 프로는 전혀 생각이 없었나요. 그건 아니고,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제가 별로 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고만고만했던 것 같아요.
그건 본인 생각일 테고 대통령배인가 MVP도 받았던데.
고2 때와 고 3때 연속으로 MVP를 받기는 했죠. 그러나 저는 제가 아주 잘하는 야구 선수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어요.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은 언제였나요. 당시 멤버가 화려하던데. 고3 때였어요. (이)대호, (김)태균이, (정)근우, 저, (이)정호, (이)동현이, (조)형식이, (조)영훈이, 송산, (김)동건이, (정)상호. 아무튼 그때 멤버가 아주 괜찮았어요. 캐나다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호주, 캐나다, 미국 등을 꺾고 우승했어요.
당시도 타격과 투수를 겸했나요. 당시 제가 타격이 너무 슬럼프였어요. 그래서 조성옥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시다가 결국 투수만 하라고 하셨어요. 투수로서는 아주 괜찮았어요. 캐나다전에서만 점수를 줬던 것 같아요. 아, 그 때 비디오 좀 구할 수 없는지 아쉬워요. 꼭 보고 싶은데, 국내 중계도 하지 않아서요.

시애틀,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시애틀인데, 그 팀으로 결정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 당시 텍사스, 볼티모어 등 몇몇 팀에서 제안이 있었는데 그쪽(시애틀)에 이재우 감독님이 계셨고 그전에 시애틀과 말이 오가고 하다 보니까 그 팀으로 가게 됐어요. 액수로 따지면 더 좋은 팀으로 갈 수 있었지만 아버님이 의리를 중시하시고 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어요.
당시 시애틀에서도 상당히 많은 계약금을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137만 달러를 받았죠. 그런데 볼티모어에서는 2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약속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죠.
당시 국내 프로에서 뛰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저는 롯데에서 뛰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아버님이 좀 섭섭하셨던 것이 있었나 봐요. 이젠 다 지난 얘기죠.
시애틀에서 자리를 못 잡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데, 후회한 적은 없는지요. 후회해요. 거기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마이너부터 매년 3할을 쳤었거든요. 도루도 20~30개씩 하고. 팀에서 원하는 만큼 안 올라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도대체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홈런도 10개, 15개씩 치고 장타도 많고 했어요. 그런데 기회가 없었어요. 같은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상대 팀 선수가 별로인데도 메이저로 가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이 났지요.
생활고, 귀국 갈등

미국에 온 후에도 귀국할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했었죠.

2년 전 수술을 받았을 때였죠. 당시 마이너리그 연봉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었거든요.(한숨을 쉬고) 저는 책임감이 강한 것 같아요. 남자는 가족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한테는 무릎 꿇는 것이 정말 비참한 일이잖아요. 그러나 부인과 아들을 위해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 혼자 몸으로 수술을 받고 했으면 서른, 서른다섯이 되더라도, 돈을 못 벌더라도 메이저에 도전하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제가 혼자라면.
옛날에는 남자, 여자가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사랑이 분명히 중요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10년, 20년, 50년을 함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랑만으로 되겠어요. 물질적으로 쪼들리다보면 뭐 괜찮은 것도 서로 티격태격하게 되고 그렇겠죠. 뭐 저희가 싸웠다는 뜻은 아니고요.(웃음) 진짜로 저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었나요. 한국을 가게 되면 제 메이저의 꿈은 접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재활을 하면서 마이너 봉급을 받고 많이 힘들었기에 하루는 집사람을 불렀죠. "우리 한국 갈까?" 그랬더니 왜 그러냐고 해서 쭉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무빈이(아들)랑 자기 때문에 그러냐고 묻데요. 그래서 나 혼자 있으면 괜찮은데 가족이 있는데 더 잘해주고 싶고, 사주고 싶은 것도 많고 한데 못 해주니까 그렇다고 했죠.
그랬더니 대번 화를 내면서 그럼 자기랑 무빈이가 한국에 가면 편하게 야구만 하겠느냐고 물어요. 그건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얼마든지 고생은 할 수 있으니 후회 없이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때 정말 둘이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은 완전히 접었죠. 실제로 에이전트에게 한국행에 대해 이야기도 했었어요. 만약 그때 갔으면 SK로 갔겠죠, 저를 지명한 팀이니까요.

마이너에서 고생할 때 이대호나 김태균, 정근우 등 친구들이 한국 프로에서 잘하는 소식들을 접했을텐데.

그때는 모든 기사들을 다 봤죠. 대호가 트리플 크라운하고 태균이도 홈런왕하고. 어차피 잘할 친구들이라는 것은 알았죠, 어려서도 보통 애들과는 기량이 틀렸으니까요. 사실 제가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뛰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가 한국 갔으면 나도 이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겠지 그런 생각.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물론 그 친구들도 여기 왔으면 적응만 잘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겠지만요.
친구들과는 자주 연락하나요.
근우는 자주 전화하고 다른 친구들과도 가끔씩 통화하죠. 한국 야구 기사들은 봅니다. 제목을 쭉 보다가 눈길을 끌면 읽어보고, 롯데 기사를 많이 읽고요.
만약 나중에라도 돌아가면 롯데에서 뛰고 싶은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고향 팀이고 롯데 팬들도 좋잖아요. 일단 여기에서 후회 없이 하고 나서 상황이 허락되면 마지막은 국내에서 뛰고 싶어요.
길고 험했던 미국 생활

미국 와서 마이너리그는 도대체 몇 팀을 거친 건가요.

루키, 싱글A, 하이싱글A, 한 여덟 팀은 거친 것 같아요. 이사는 15번쯤, 아니 움직인 것을 다하면 스무 번쯤 되죠. 이제 이사는 신물이 났죠. 집사람은 이사 박사가 됐어요.(웃음)
지난 겨울 애리조나에 집을 구입했다죠.
미국에 온지 9년 만이죠. 늘 월세 아파트를 살다가 집이 있으니 참 좋더라고요. 지금은 비어 있지만요. 전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잘 꾸며놓았어요. 언제 한번 놀러오세요.
클리블랜드와 시애틀팀은 분명히 차이가 있죠?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시애틀에서는 선수들 간에 대화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클리블랜드는 선수들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를 많이 봐요. 그리고 열심히 하는 선수들에게는 꼭 기회를 주려고 해요. 제가 수술을 받을 때도 단장이 "네가 한 만큼 꼭 기회를 줄 테니 재활만 열심히 해라. 반드시 노력한 만큼 돌려줄 것이다."라고 하더라고요. 큰 힘이 됐죠.
요즘도 양귀 헬멧을 쓰던데.
팀에서 계속 쓰라고 하데요. 이젠 제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것 같아요.(웃음)
요즘도 방망이랑 얘기하나요. 

하죠.(웃음) '오늘은 누가 치러 나갈래?' (덕아웃의)제 자리에 스무 개쯤 들어 있는데 이것  저것 잡아보고 감이 좋은 걸로 골라 나가요. 저는 '하드(HARD)'라는 한국 제품을 주로 써요. 배트의 절반 정도는 이 제품이에요. 팀에 주문하면 다 구해주는데 저는 국산품을 써요. 아주 좋아요. 이걸로 홈런도 5개 쳤어요.(그의 배트에는 태극기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목표를 이젠 어느 정도 이룬 셈이죠. 아직까지는 모르겠어요. 올해 끝나고 내년 돼봐야 알 수 있겠어요. 야구란 것이 변동성이 항상 있으니까. 클리블랜드에서 야구 인생을 끝내고 싶지만 어떤 일이 또 생길지 모르죠. 그러나 지금은 어느 팀에 가나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어요.
야구, 꿈, 행운, 행복
앞으로 또 다른 목표와 꿈이 있나요. 지금요? 일단 뭐, 예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야구를 했지만 지금은 가족이 있고, 또 한 명 더 나아야 하거든요.(현재 부인이 둘째를 임신 중이고 셋째도 낳을 예정이랍니다.)
야구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홈런 500개, 안타 3000개를 칠 수 있는 선수는 아니거든요. 그러나 메이저리그 생활 오래하면서 많은 팬들에게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면서 후회 없이 야구 생활을 끝내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것이지만 야구를 그만뒀을 때는 미련이 안 남았으면 좋겠어요.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그 때 조금 더할걸,' 그런 생각이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은퇴 후에도 야구 관련 일을 하고 싶은지요.
그때 돼서 봐야겠지만 제 생각은 저 때문에 고생한 가족들과 지내고 싶어요. 저 때문에 이국땅에서 이곳저곳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고생이 정말 많거든요. 야구 끝나면 애들이랑 집사람이랑 여행도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주위에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목표는 일단 그래요.
언제까지 야구를 하고 싶은가요.
제 목표는 마흔 살까지. 물론 마흔이 되도록 주전으로 뛰기는 어렵겠죠. 아마 서른 일곱, 여덟까지 정도는 주전으로 뛸 수 있을까요. 그 이후가 되면 팀도 옮겨다니고 하겠죠. 그러나 뛸 수 있을 때까지, 후회 없이 뛰고 은퇴하고 싶어요.

여전히 낮 경기면 새벽에 일찍 나오고, 경기 시간 7시간 전이면 벌써 야구장에 와 있고. 야구가 그렇게 좋은가요.

좋기도 좋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게 후회 없이 하는 것 같아요. 제 성격이 워낙 완벽하려고 하고, 남보다 하나 더 해야 마음이 편하고 자신감이 생기고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요. 남들보다 조금 더 훈련해야 마음이 편하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기고 경기를 할 때도 자신이 있고 편하고 그래요.
야구를 한다는 것이 행복한가.
그럼요, 행복하죠. 경기를 뛰고 운동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야, 내가 이 꿈의 무대에서, 이 큰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매일 유니폼을 입고 주목을 받으면서 뛸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라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요.
며칠 전에, 3일 전인가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루키 리그부터 싱글A 쭉 거치면서 함께 뛰었던 수많은 팀메이트 애들을 따져봤어요. 지금 과연 메이저리그에 몇 명 있을까 꼽아봤더니 저 말고 딱 두 명 있더라고요. 필리스의 그렉 돕스와 메츠의 J.J 풋츠 그렇게 둘 뿐이더라고요. 마이너리그 톱 유망주고 1등, 2등 해도 메이저 간 애들이 없어요. 그러니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즐겁게 야구할 수 있어요.
주위에서 도움을 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꿈을 꾸고 미래를 그리면 언젠가는 그 자리에 와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분도 있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올 시즌, 그리고 앞으로 계속 부상 없이 좋은 모습 보여주길 바랍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늘 기운을 주시는 팬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까지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메이저리그 외야수 중에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또 그보다 더욱 처절한 고통과 끝없는 노력에도 추신수는 미국 진출 후 참 많은 역경을 거쳤습니다. 큰 수술도 받았지만 결국 좌절하지 않고 메이저리그 팀의 중심 타자, 4번 타자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최근 갈매기를 맞춘 연장 결승안타로 미국 야구계에서 화제가 됐고, 연일 맹타를 터뜨리며 본격적으로 메이저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강인한 인상을 주면서 팀의 주전 강타자라 점이 각인되기 시작하면 추신수의 빅리그 생활은 갈수록 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애매한 공이라도 존재가 미미한 루키라면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만, 인정을 받은 타자에게는 볼이 선언되는 것이 프로 야구입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큰 변화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제 진정한 시작입니다. 그러나 힘겹게 걸어온 길에 대한 보답의 길이 이제야 조금씩 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저리그 중심 타자로서 추신수의 도약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추신수
 

[매거진S] 박찬호, 공 하나의 꿈과 열정과 도전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09-03-20 09:29
민훈기


WBC 열기가 뜨겁습니다.
대한민국 야구팀은 2라운드에서 멕시코와 일본을 연파하고 1회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4강에 진입하며 야구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1회 대회 때보다 전력이 약화됐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탄탄한 투수진과 불같은 투지를 앞세워 일본을 두 번 연속 꺾는 등 또 한번 저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회전 한국의 전력이 약화됐다는 평가를 들은 이유는 박찬호(36ㆍ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이승엽(33ㆍ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대표팀의 얼굴이던 노장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2006 WBC
박찬호는 현재 필리스의 스프링 캠프장이 있는 미국 플로리다 주 클리어워터에서 선발 로테이션 진입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1994년 전격적으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명문 구단 LA 다저스와 계약, 한국 선수들의 미국 야구 도전사에 새 장을 열었던 박찬호는 어느덧 15년차의 노장이 됐습니다. 그 동안 빅리그에서 117승을 거두는 업적도 이뤘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부상과 부진의 어둡고 긴 터널도 거쳤고, 마이너리그로 추락하기도 했으며 또 작년에는 놀랍게 재기에 성공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최동원-선동렬의 계보를 잇는 한국 최고의 정통파 투수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여전히 선발 투수로 빅리그 타자들을 호령하겠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는 박찬호의 야구와 생애를 돌아보겠습니다.
공주 전파상집 셋째 아들
박찬호는 1973년 음력 6월29일 공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파상을 하는 아버지 박제근씨와 정동순씨 사이에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남동생을 하나 둔 3남1녀 중 셋째였습니다.
어린 시절 온 식구가 전파상 다락방에서 사는 옹색한 가정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박찬호의 성공에는 부모님의 공헌이 대단히 큽니다. 자식에게 크나큰 애정을 가진 것은 여느 부모와 다를 바 없지만 절대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엄격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유지한 분들이었습니다. 박찬호가 성공한 후 아버지에게 외제차를 선물하려고 하자 박제근씨는 국산차를 고집한 일화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박찬호 하면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머니가 꾸었다는 태몽입니다. 정동순씨는 박찬호를 낳기 전 바다처럼 넓고 파란 호수에 하얗고 커다란 백조 같은 새가 떠서 헤엄을 치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박찬호는 그 꿈을 이야기하면서 큰 호수는 태평양이었고, 파란 물에 하얀 큰 새는 다저스의 색깔이 아니었겠느냐는 해몽을 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998년 박찬호의 어머니는 덴버의 친척집에 들렀다가 인근 콜로라도 산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에 놀러갔는데, 그 호수를 본 순간 정동순씨는 꿈에서 본 바로 그 호수와 똑같다며 감탄을 한 일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박찬호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하루는 정동순씨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한 스님이 정씨를 유심히 보더니 큰 인물이 될 아들이 있는데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원래 박찬호의 이름은 박헌호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가 이름을 박찬호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바꿔서 ‘코리안 특급’이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찬호의 이름은 그런 유래를 담고 있습니다.
공주 중동 초등학고 3학년 때 육상부원이던 박찬호는 4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어린 박찬호는 멋진 유니폼과 간식을 맘껏 먹는 야구부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마침 전국적으로 강팀이던 중동초교 야구부 후원회에서 체격이 좋고 운동을 잘하던 박찬호에게 야구부 입단을 권하면서 야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부모님은 공부도 곧잘 하던 박찬호가 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중학교에 가면 운동은 안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습니다. 그렇게 야구선수 박찬호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공주중과 공주고를 거치면서 박찬호는 미완의 대기로, 무섭게 빠른 공을 던지는 ‘공주 촌놈’으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박찬호는 스스로를 늘 공주 촌놈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스로 고안한 지옥 훈련
1996년 처음 풀타임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뛴 시즌에 박찬호와 함께 그의 첫 자서전인 ‘헤이 두드’를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듣고 정리하면서 정말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에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박찬호는 천성이 여린 성격입니다. 중학교 2학년 말 투수로 전업한 후에도 공은 빠른데 배짱이 없고 자신 없는 피칭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중학생 박찬호'는 자존심이 상했고, 스스로 담력을 키우겠다며 나름 지옥훈련을 고안해냈습니다.
그 첫번째는 공동묘지 훈련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박찬호가 중학생이던 당시 공주에는 공동묘지가 많았다고 합니다.


웅진동 공동묘지라는 그곳은 무녕왕릉 옆에 있었는데 산길 옆으로 올라가면 을씨년스러운 묘지들이 쭉 늘어 있어서 낮에도 지나가기 겁나던 곳이었습니다. 박찬호는 그 공포의 공동묘지를 밤에 혼자 뛰어서 지나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도전에 나섰지만 처음에는 입구에서 줄행랑을 치고 만 박찬호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공동묘지에서 달밤에 홀로 야구방망이 춤을 추는 소년이 됐습니다.
박찬호의 두 번째 배짱 키우기 프로젝트는 산성 공원이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고 울창한 숲에 무너져가는 성벽, 커다란 대문 등 밤에 홀로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지난 겨울 박찬호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어려서 이 나무에 고무줄을 걸어  당기며 팔 운동을 하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밤에 혼자 운동을 했다'고 설명한 바로 그곳입니다. 역시 두려움을 떨치며 몇 번의 시도 끝에 산성 위를 점령한 박찬호는 매일 천 번의 스윙을 하고 산성 공원을 내려왔습니다.
박찬호는 거기서 신기한 경험도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성에서 스윙 삼매경에 빠진 그가 1000번의 스윙을 멈추고 땀을 고르려는 순간 후다닥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돌아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바로 곁에까지 와서 스윙을 구경하다가 스윙을 멈추자 오히려 놀래 달아난 것이었습니다.
스윙에 몰두한 모습이 다람쥐도 신기했던 모양이라며 박찬호는 그 일로 더욱 운동에 몰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의 소산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내내 그렇게 산성 훈련을 한 박찬호는 그 산성과 동네 언덕을 매일 오리걸음으로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과연 어린 나이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프로 선수가 된 후에도 박찬호는 자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습니다. 때론 훈련 중독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자신이 세워 놓은 훈련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하고나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프 시즌 같은 때 기자의 집에 놀러 와도 아침에 보면 어김없이 팔굽혀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어깨와 신체조건도 아주 좋았지만 박찬호의 성공에는 남다른 노력과 의지가 큰 요인이 됐습니다.
미국 야구의 꿈
박찬호의 야구 생애에서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991년이었습니다.
그 해 9월 LA에서 한-미-일 고교 대표팀이 만나는 ‘굳윌 게임’이 열렸고 박찬호는 그 해에 공주고가 부진을 면치 못해 어렵사리 대표팀에 뽑혔습니다.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차명주 등의 고교 스타들이 총 망라한 호화진영으로 사실 박찬호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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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타 본 박찬호는 굳윌 게임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2승1세이브를 기록하며 우승의 주역이 됐습니다. 당시 미국팀으로 나선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작년에 다저스에서 동료가 되면서 그 당시 박찬호의 피칭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회는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를 꿈꾸게 되는 두 가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하나는 다저스타디움의 충격이었습니다.
굳윌 게임 기간 중에 박찬호는 자신의 첫 에이전트가 되는 스티브 김씨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LA의 야구 동호회 회원들이 선수들에게 민박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고교 선배들의 집으로 배정됐지만 박찬호는 공주고 선배가 없어 청소년 팀 후원을 책임졌던 김씨의 집에 머물게 됐습니다. 그리고 쉬는 날 선수단이 다저스타디움을 방문했는데 당시 박찬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끝도 없이 넓은 주차장에 주차된 수많은 자동차들과 밤하늘을 환하게 수놓은 라이트의 빛, 외야의 대형 스크린, 그리고 융단처럼 펼쳐진 녹색 다이아몬드와 하얀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멋진 유니폼을 입은 다저스 선수들.
박찬호는 그날 경기를 보면서 꼭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처음 꾸기 시작했습니다. 열광하는 팬들 사이에 앉아서 다저스 중견수 브레트 버틀러의 환상적인 홈런성 타구 캐치를 보면서 언젠가는 저런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저스타디움 맨 꼭대기에 위치한 대형 상점에서 당시 용돈으로 받았던 돈을 모두 털어 파란색 다저스 잠바를 샀습니다. 정확히 3년 5개월 후에 그런 잠바와 온갖 다저스 장비들을 배급받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입니다.
그 대회가 가져다준 또 한 가지 행운은 미국 야구관계자들에게 박찬호의 존재를 알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굳윌게임에는 빅리그 스카우트들과 에이전트 등 관계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미국 대표팀의 유망주들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섭게 빠른 공을 던지는 한국팀 투수에게도 눈길이 쏟아졌습니다.
희한한 것은 당시에 박찬호가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고교선발팀에는 박찬호보다 훨씬 지명도가 높은 선수들이 많았는데도 집중적으로 눈길을 받은 것은 박찬호였다는 점입니다. 후에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된 스캇 보라스도 당시 현장에 있었는데 그가 점찍은 투수 역시 박찬호였습니다. 그 때부터 박찬호는 미국 야구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굳윌게임은 박찬호의 야구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된 대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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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와 계약, 꿈을 이루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
1990년말부터 스포츠 조선 특파원으로 미국에 파견됐던 기자가 박찬호를 처음 직접 본 것은 1993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뉴욕 주 버팔로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벌어졌고, 출장을 가서 여러 종목을 취재했습니다.
하루는 한국 야구팀의 경기를 취재하는데 스피드건을 쥔 미국 스카우트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한 선수가 등판하자 스카우트들은 갑자기 스피드건을 들이대고 서로 계기판을 보여주는 등 소란을 떨었습니다. 궁금해 가서 물으니 오히려 저 선수와 연락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등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박찬호였고, 그날 계기판에는 90마일대 중반의 숫자가 찍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양키스와 브레이브스 등 빅리그 팀들의 본격적인 박찬호 영입전이 시작됐지만 당시만 해도 병역 문제가 있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팀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빙그레 이글스와 대학 진학의 기로에서 고민하다가 진학을 택한 박찬호는 당시 한양대 2학년이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은 브레이브스로 공주까지 스카우트를 보내 20만 달러를 먼저 지불하겠으니 군대를 빨리 다녀오라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양키스도 비슷한 조건을 내세우는 가운데 다저스가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빅리그 팀들의 박찬호 영입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고민하던 박찬호는 스티브 김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그때부터 다저스와의 협상이 급격히 진행됐습니다. 인연이 되려는지 마침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가 LA 한인상공회의소 주최 행사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스티브 김과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바로 며칠 후에 박찬호가 김씨에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다저스에서는 오말리 구단주가 서울 방문시 박찬호를 직접 만났고, 주치의 조브 박사를 보내 몸 상태를 검사하기도 했습니다. 계약금 문제로도 난항이 컸지만 김씨는 12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입단 보너스에 한양대 야구부 지원 등 각종 조건을 따내며 박찬호의 다저스 입단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리고 결사반대하던 한양대에서는 결단을 내리면서 1993년 12월 31일 박찬호는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와 다저스의 레이놀즈 스카우트, 협상을 도왔던 스티브 김씨 등이 동행했습니다. 비밀리에 진행된 다저스 행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박찬호의 미국 야구 도전과 성공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담벼락 인터뷰
1994년 1월 13일 LA의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국 호텔에서 LA 다저스 입단식이 열렸고, 박찬호는 정식으로 다저스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첫 스프링 캠프를 거쳐 놀랍게도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진입하는 깜짝 뉴스를 전했습니다. 당시까지도 미국의 프로야구 시스템이 국내에 알려지지 않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입은 그저 깜짝 뉴스 정도의 반응이었지만 실은 미국에서도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196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아마추어 드래프트를 실시한 이래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빅리그에 진입한 선수는 박찬호와 동료 대런 드라이포트가 17, 18번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저의 벽은 높았고 빅리그 생활 18일 만에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로 배속받았습니다. 2년간 더블A 샌안토니오와 트리플A 알바커키에서 수많은 좌절과 쓴 경험을 하면서 미국 프로의 생활을 익혔고, 결국 1996년 빅리그에 복귀해 다저스의 기둥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저스에서의 맹활약은 익히 알려져 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렸고, 레인저스 이적 후 부상과 부진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것도 야구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일입니다.
박찬호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 계속 취재를 했고, 2005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까지는 박찬호의 거의 전 경기를 현장에서 취재하면서 수도 없이 만나고 인터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중에 하나는 2년 전인 2007년 애리조나 주의 투산에서의 만남입니다.
한여름 7월의 하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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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찬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산하 트리플A 라운드록 익스프레스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뉴욕 메츠 캠프에 갔다가 빅리그 진입에 실패한 후 팀을 옮겨 재기를 노리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힘들게만 꼬이던 시절이었습니다.
7월25일 박찬호는 원정팀 라운드록의 선발로 예정돼 있었는데 경기 두 시간 전부터 하늘이 짙은 회색으로 변하더니 폭우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캐치볼을 하던 박찬호는 비를 피해 들어왔고, 클럽하우스로 통하는 담벼락에 기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인터뷰 중 일부를 소개하면,
-마이너 생활이 힘들지 않는가
▶힘들죠. 여러 가지로. 특히 여행 다니는 것, 원정 다니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원정이야 메이저에서도 지겹게 다니지 않았나. ▶여기는 새벽에 이동해서 (다음날)게임을 하거든요. 경기 끝나고 새벽 3시, 4시에 이동을 해요. 비행기도 타고 가까운 데는 버스도 타고.
-왜 그 시간에 이동을 하나 ▶그래야 낮에 도착을 해서 저녁에 경기를 해요. 메이저처럼 전세기가 아니니까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또 중간에 갈아타고 그러다보면 그 새벽 시간에 다녀요. 오늘도 새벽에 출발해서 오후 2시 반에 여기 도착했는걸요.
-왜 박찬호 선수가 이런 선수 생활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안 하면 뭐해요?
-할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 ▶다른 것들을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야구를 그만 둬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꼭 그건 아니지만 박찬호 선수는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가정도 가졌는데 왜 저렇게 마이너에서 계속 고생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돈도 많이 벌고 해볼 것을 다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럼 그런 사람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야겠네요? (크게 웃음)
저 같은 경우는 메이저리그 다시 가서 야구를 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지만 아직도 이렇게 배우고 있어요. 나름대로 맘 같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나를 굉장히 자극시키고 그 자극이 나를 노력하게 만들어요. 미래가 어떻게 갈 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하나하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까먹었던 것을 확인하고 그러는 것이 좋더라고요.
또 시골을 다니면서 적은 수의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옛날 생각도 많이 해요. 예전에 마이너에서 뛰던 때와는 또 다르더라고요. 예전에 다저스에서 마이너리그 있을 때는 사람들이 박찬호 하면 한국에서 온 선수로만 여기고 반가워했어요. 그러나 이젠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지금은 한국의 대표 선수라는 식으로 나를 생각하고 대해주고 그러시더라고요. 시골에서 어렵게 사는 분들을 만나고 하면 고마움도 또 많이 느끼고 야구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계속 할 생각인가. ▶모르겠어요.
-계속? 계속? 
▶언제까지 사실 건데요?(함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우문현답이었습니다.) 
사실 살면서도 때론 참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곤 하잖아요. 야구 하면서도 이젠 정말 못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처음에 야구를 시작할 때도 여러 환경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또 나를 만들어가는 것들이더라고요.
 박찬호 도전과 승리 117+
1승
13승
17승
39승
한국 최초 빅리그 승
11K 화려한 비상
복통도 이겨내고
발차기 사건

마이너리그 생활은 정말 고달픕니다. 끝도 없는 이동과 쥐꼬리 연봉에 열악한 환경 등. 그나마 트리플A는 나은 편이라지만 특히 빅리그의 호화스런 생활을 10년 이상 했던 박찬호가 마이너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질 않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이너인데도 그의 성적은 형편이 없어서(97년 마이너 두 팀에서의 성적은 6승14패였습니다.) 야구에 왜 아직도 그토록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아직도 지켜내지 못한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빅리그에 복귀해서 잘 해낼 수 있다는 꿈이 살아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박찬호는 작년에 보란 듯이 친정팀 다저스에서 재기했습니다.
주로 구원으로 뛰었지만 빅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구위를 되찾았고, 올 겨울 일찌감치 필라델피아와 계약을 체결하고 어쩌면 그의 야구 생애에서 마지막 목표가 될지도 모를 선발 복귀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올 시즌 전망
박찬호가 작년 다저스에서 보여준 구위는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150km대의 강속구도 살아났고, 슬라이더와 커브로 예리함을 되찾았습니다. 5번 선발 포함해 53게임에 등판해 4승4패에 3.40의 평균자책점(ERA)을 남겼습니다.
사실 그의 기록은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었습니다. 정규 시즌이 끝난 후 필라델피아와의 NLCS 취재를 하며 만난 자리에서 박찬호는 ERA가 나빠진 뒷얘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야구 욕심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박찬호가 작년에 나름대로 세운 목표는 100이닝이었습니다. 시즌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그 목표 달성이 쉽지 않아 보이자 자원 등판이 늘었습니다. 아무래도 구원 투수로 첫 시즌 잦은 등판을 겪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 그러나 박찬호는 토리 감독이 물으면 언제든 등판하겠다고 답했고,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전반기에 2.63이던 ERA가 후반기에는 5.04였습니다.(결국은 95.1이닝으로 마쳤습니다.)

여담이지만 동료 좌안 투수 조 바이멜의 부진도 한 몫을 했습니다. 시즌 막판 박찬호가 등판해 내보낸 주자들을 바이멜은 어김없이 실점했습니다. 14득점인가가 박찬호가 내보내고 바이멜이 들여보낸 점수라고 했습니다. 시즌이 끝나고 바이멜은 미안하다면 박찬호에게 제일 좋아하는 샴페인이 뭔지 한 병 사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작년 다저스에서의 재기는 박찬호에게 마지막 불꽃을 태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오프 시즌에 일찌감치 필리스와 연봉 250만 달러에 인센티브 250만 달러의 1년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필리스 5선발 쟁탈전에서 박찬호는 호투를 거듭하며 선발 진입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3번의 시범 경기에서 11.2이닝을 던지며 2실점으로 1.54의 ERA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료 제이미 모이어에게 받은 정보로 새롭게 변화를 준 체인지업이 계속 효과를 발휘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경쟁자 중에는 카일 켄드릭(ERA 12.10)과 카르스코(ERA 6.30)는 힘들어졌고, A.J. 햅이 2.45의 ERA로 준수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햅은 왼손이 부족한 불펜으로 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또한 에이스인 콜 해멀스가 팔꿈치 염증으로 고생하고 있어 개막전까지 회복이 불투명해 경우에 따라서는 4선발 이상의 자리를 차고 들어갈 가능성마저 생겼습니다.
만으로 서른여섯을 눈앞에 둔 박찬호가 다시 선발 자리를 꿰차고 풀 시즌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습니다. 특히 지난 시즌에 거의 구원 투수로만 뛰었기 때문에 긴 이닝을 소화하면서 장거리 레이스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꿈을 버리지 않고 도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최선의 노력으로 그 꿈을 다시 이뤄낸다면 야구팬들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매거진S

올 시즌 박찬호가 선발로 재기할 것이라는데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2013년 1월 1일 화요일

공부도 홈런, 서울대 새내기 이정호의 당찬 꿈


출처: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607/10309607.html?ctg=1400&cloc=joongang|home|newslist1
[중앙일보] 2013.01.01 00:00 / 수정 2013.01.01 00:00
정종훈 기자

공부도 홈런, 서울대 새내기 이정호의 당찬 꿈
덕수고 야구선수 이정호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합격한 이정호. 야구방망이를 힘차게 휘두르며 “대학에선 투수로도 뛰고 싶다”고 말했다. [안성식 기자]

덕수고 졸업반 이정호(19)가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간의 관심이 쏟아졌다. 2012년 고교야구 주말리그와 대통령배 등 5개 대회에서 타율 0.310을 기록한 야구 선수가,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 수시 전형으로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기엔 모자람 없는 기량을 갖고 있다. 그의 서울대 입학은 ‘운동 선수와 학업은 거리가 멀다’는 일반적 인식을 깨버리는 ‘사건’으로 평가 받았다.

3주 전 이슈의 중심에 섰던 당사자는 담담했다. 그러면서도 새해, 꿈많은 새내기 대학생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생긴다”는 그는 “의지를 한 번도 놓지 않았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교 진학 후에도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비법은 따로 없었던 거다. 성실하고 우직했을 뿐이다.

야구부 훈련 때문에 학원에 갈 수 없었던 그는 수업시간에 더 집중했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잘 시간을 아껴가며 복습을 했다. “시험과 경기가 겹칠 때는 머리 속이 하얗게 됐다”고 했다. 이럴 때마다 서울대에 입학하겠다는 목표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수시 원서도 특기자 전형이 없는 서울대에만 넣었다.

2학년부터 시작된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도 도움이 됐다. 1학년 때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지만 주말에만 경기를 하는 주말리그가 시행되자 전교 9등까지 석차가 올랐다. 때문에 이정호는 “주말리그제를 확대해 더 많은 학생들이 학업과 운동을 함께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대 입학은 혼자 힘만으로 할 수 없었다. 학업과 운동을 같이할 수 있게 배려해 준 정윤진 야구부 감독, 공부의 끈을 놓지 않게 도와 준 부모님, 그리고 필기 노트를 빌려주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은 친구들이 모두 은인이었다.

이정호는 어느덧 그를 바라보는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다. 그는 “내 운동능력이 아주 뛰어난 건 아니다. 그래서 공부도 같이 해야겠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주변 환경이 따르지 않았다면 서울대 입학은 불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야구부 친구들이 기초를 쌓아놓지 않아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유니폼을 입고 선수로 뛰어본 만큼 나중에 선수 입장에서 체육 행정을 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야구 선수의 꿈도 접지는 않았다. 합격하자마자 13학번 중 처음으로 서울대 야구부에 가입 원서를 냈다. 이달에는 제주도로 전지훈련도 떠난다. 덕수고에서 주로 우익수를 맡았던 이정호는 “대학에서는 투수로도 뛸 수 있다”고 기대했다.

정종훈 기자

덕수고 외야수 이정호, 서울대 합격 쾌거

SBS ESPN | 2012-12-10 14:45:44

덕수고 외야수 이정호, 서울대 합격 쾌거



공부하는 학생 선수 양성을 목표로 대한야구협회가 교육과학기술부,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으로 2011년부터 시행한 고교야구 주말리그의 성공적인 정착을 알리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왔다. 주인공은 덕수고 졸업예정인 외야수 이정호(18). 고교 3학년까지 대한야구협회 등록 선수로 활동한 선수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은 사실상 최초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인 이정호는 지난 7일 서울대학교가 발표한 2013학년도 수시 최종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정호는 2012년도 고교야구 주말리그(동일권)[서울권]에서 타율 3할3푼3리(12타수 4안타)의 고감도 타격을 선보이며 덕수고가 우승하는데 일조하며 수훈상을 수상했으며 8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상비군(40명) 명단에도 포함된 바 있다.

아울러 서울대 체육과 수시 모집 지원자격인 최저학력기준을 통과해 공부하며 운동하는 학생선수 육성이라는 주말리그의 목표에 부합하는 성과의 첫 주인공이 됐다. 대한야구협회는 올해 다시 상비군제도를 도입했으며 이정호도 그 혜택을 이번 입시에서 보았다. 협회는 앞으로 매년 상비군 선발을 할 예정이며 야구 실력이 뛰어난 선수는 물론 공부하는 야구 선수들을 상비군으로 선발하게 된다.

협회와 정부 관계 부처는 이정호의 합격 소식에 주말리그가 학원스포츠의 정상화를 통한 건전한 학내 분위기 확산과 공부와 운동을 병행함으로써 교양과 야구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육성하는 현실적인 제도임을 확신하게 됐으며 앞으로도 이정호와 같은 사례가 이어져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 서울대학교 야구부는 LG 트윈스와 히어로즈 프로야구 감독을 역임한 이광환 감독이 지도하고 있으며 이정호는 서울대 야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면서 서울대 출신 최초의 프로야구선수의 꿈까지 실현하기 위해 운동과 공부에 모두 매진할 예정이다.

[OSEN]

공부하는 야구선수 이정호, 서울대 합격 쾌거

출처: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1116980.htm
[스포츠서울] 입력: 2012.12.09 10:36 / 수정: 2012.12.09 10:36
김경윤기자 bicycle@sportsseoul.com

공부하는 야구선수 이정호, 서울대 합격 쾌거


덕수고 이정호가 지난 6월 12일 덕수고 운동장에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서울대에 진학하고 싶다"고 밝힌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6개월 뒤 서울대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김경윤기자 bicycle@sportsseoul.com

'공부하는 야구선수' 덕수고 이정호가 7일 발표된 서울대 체육교육과 수시전형 최종합격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정호는 9일 스포츠서울과의 전화통화에서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도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 정말 기쁘고 또 감사하다"고 말했다.

고교 야구선수가 서울대에 입학한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드문 일이다. 서울대는 체육특기생 전형이 없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호는 낮에는 훈련, 밤에는 공부에 집중하며 서울대 입시를 준비했고, 결국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이정호는 초등학교 때까지 반 석차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야구를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 이후 성적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야구만 잘하면 대학과 프로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주변 분들이 공부에 대해 강조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정호의 성적은 고교 진학 후 심각하게 떨어졌다. 1학년 때 받은 최종 내신 등급은 5.8등급이었다. 절망적이었다.

이정호는 학습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고교야구 주말리그제'가 시작된 2학년 때부터 운동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매달렸다. 주말리그제는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주중 학교 수업을 모두 받게 하는 제도다. 이정호는 주말리그제가 활성화된 고교 2학년 때부터 수업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받은 뒤 밤 10시까지 야구 훈련을 진행했다. 집에 돌아온 밤 11시부터는 자율학습을 하며 부족한 공부에 매달렸다. 하루 수면 시간은 단 3시간. 코피가 쏟아지면 휴지로 코를 막고 공부를 계속했다. 일주일에 3~4일은 코피가 쏟아졌다. 하얗게 밤을 지새는 일수는 많아졌고 문제집은 눈물과 코피로 얼룩이 졌다.

잠과의 전쟁이었다. 이정호는 "수업을 놓치면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두,세 배의 시간이 든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모든 집중력을 쏟아냈다. 학교 수업시간이 이 내용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담임교사인 조정우 씨는 "야구부 학생 중 이렇게 성실하게 공부하는 친구를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정호의 성적은 전교 9등까지 올라갔다.


덕수고 이정호 / 김경윤기자 bicycle@sportsseoul.com

선수 신분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정호는 올해 고교야구 대회 23게임에 출전해 타율 0.310을 기록했다. 특히 청룡기 야구대회에선 12타수 6안타 4득점을 기록하며 타율 0.500을 마크했다. 덕수고 정윤진 감독은 "이정호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서 크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유지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훈련에 성실히 참가했고 또 실력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정호는 이광환 감독이 이끄는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아직 프로선수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도 운동과 공부를 모두 열심히 하겠다. 서울대 야구부 출신 프로선수 1호가 되는 것이 꿈이다"라고 말했다.

김경윤기자 bicycl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