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1일 목요일

‘대전고 김동주’ 이우성, “우상과의 비교 영광”

출처: http://osen.mt.co.kr/article/G1109535520
2013.01.31 07:15
OSEN= 박현철 기자



[OSEN=이천, 박현철 기자] “5라운드 정도로 생각했는데 2라운드 지명이라 정말 기뻤어요. 부모님이 두산팬이시라 어렸을 때부터 두산 경기를 자주 봤었거든요”.

지금은 잔류군에서 훈련 중이지만 미래가치가 확실히 높은 선수다. 팀에서도 전지훈련 출발 전 그의 타격 능력을 높이 사 합류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던 바 있다. ‘대전고 김동주’로 불리며 모교의 중심타자로 활약, 2학년 시절부터 청소년 대표팀에도 승선했던 신인 우타자 이우성(19, 두산 베어스)은 더 높은 고지를 향해 싸늘한 날씨 속 도움닫기를 준비 중이다.

에이스 조상우(넥센)와 함께 대전고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한 이우성은 지난해 8월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로 두산의 지명을 받았다. 1학년 시절부터 팀의 주전으로 출장하며 두각을 나타낸 이우성은 2학년 시절부터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며 타격 능력을 인정받았다. 아마추어 야구팬들은 이우성의 타격 모습을 보며 “마치 김동주 같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수비력에서 보완점을 드러내며 전지훈련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우성이지만 교육리그와 마무리훈련을 지켜본 팀 내 관계자, 코칭스태프는 이우성의 타격에 대해 단순히 ‘잘 친다’가 아니라 ‘살벌하게 친다’라고 평했다. 기본적으로 호쾌한 스윙에 실투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 김동주의 전성 시절과 비슷하다는 평가다. 게다가 지난해 전국체전에서는 포수 자리가 구멍 나자 마스크도 썼고 도루도 심심치 않게 성공시키며 야구 센스를 뽐냈다.

김일상 육성팀장은 “당장은 아니지만 2~3년 후 1군에서 큰 힘이 될 만한 타자다. 마인드도 긍정적이라 성공 가능성이 높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도 이천 베어스필드에서 만난 이우성은 전상렬 코치가 때려내는 펑고를 연신 받아내며 수비력 보완에 열중했다. 전지훈련 제외 후 잔류군 편성에 아쉬워하기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며 뛰어오르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사실 지명 전에는 5라운드 정도로 예상했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보다 지명 순위가 높아서 정말 기뻤습니다. 사실 부모님께서 두산 팬이셔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두산 경기를 봤거든요. 평일 6시 30분이 되면 TV 중계도 꼬박꼬박 챙겨봤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뻤어요. 아버지께서 ‘축하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니 열심히 잘 해보자’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아직 고교 정식 졸업장을 받지 않은 선수에게 당장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일본 미야자키로 전지훈련을 떠난 두산 선수단에서 신인은 1라운드 외야수 김인태가 유일하지만 이우성도 전지훈련 명단 포함 가능성을 지녔던 유망주다. 그러나 아직 수비력을 세세히 보완해야 한다는 점에서 잔류군으로 편성되었다. 냉정히 보면 아직 즉시 전력감은 아니지만 훗날 세대교체 선순환을 위해서는 이우성의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두산은 드래프트에서 김인태와 이우성을 장차 팀의 좌우 중심타자 재목감으로 점찍었다.

“주위에서 타격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비는 코칭스태프께서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주시는 만큼 기대치에 맞게 끌어올리고 싶어요. 전지훈련 제외요? 아쉽지 않아요. 오히려 국내에서 훈련하고 있다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계기로 삼으면서 내년 전지훈련에서 제 실력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요”.

이우성을 가리키던 수식어 중 하나는 바로 ‘대전고 김동주’다. 김동주는 베어스 구단 역사 상 가장 오랫동안 위력적인 파괴력을 보여준 4번 타자이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아직 1군 주전 선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한 이우성이지만 타격하는 품새나 힘은 김동주 못지않은 선수로 성장할 만한 가능성을 지녔다는 평이다.

“영광이지요.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고. 김동주 선배님은 제 우상이거든요. 고교 시절 ‘대전의 김동주’라는 별명이 붙으면서 정말 열심히 해서 나중에 꼭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군에서 꾸준히 출장 기회를 얻고 9월 확대 엔트리 시기에 1군 무대를 밟고 싶다는 것이 이우성의 데뷔 첫 해 목표다. 자신의 장점을 자평해달라는 말에 “아직 스스로 장점을 꼽기는 많이 부족하다. 앞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라며 겸손하게 답한 이우성은 미래의 중심타자로 우뚝 서기 위해 찬바람에 맞서며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farinelli@osen.co.kr


10구단 총성없는 전쟁, 연고 고교를 사수하라

출처: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301310100189580015830&servicedate=20130130
2013-01-30 21:12:15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


류현진이 거액을 받고 LA 다저스에 진출하면서 국내 구단들은 유망주 발굴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했다. 또 3년 만에 1차 지명 제도가 부활했다. 10개 구단들은 국내 고교 50여개팀의 연고권을 나눠 갖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한치 양보 없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공항=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13.01.23/

프로야구는 전적으로 사람 장사다. 안목이 있어 제2의 류현진을 일찍 발견해 키워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따라서 요즘 프로 구단들은 유망주 발굴에 혈안이 돼 있다.

2015년부터는 10구단 체제로 팀 수가 늘어난다. 하지만 아직 국내 고교팀 수는 50여개에 머물고 있다. 인적 자원은 그대로인데 프로팀 수만 8개에서 10개로 증가했다. 게다가 지난해말 3년 만에 신인 1차 지명제도가 부활됐다. 프랜차이즈 스타를 조기 발굴 육성하고 또 우수 자원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결정이다. 드래프트 전에 연고 고교팀에서 우선적으로 우수 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엔 1명 또는 최대 2명까지 우선 지명했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아직 몇명으로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요즘 구단들은 재도입된 1차 지명제도를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제10구단 KT는 현재 스카우트팀을 꾸리고 있는 중이다. 10개 구단이 전국 50여개 고교팀의 연고권을 어떻게 나눌 지가 관건이다. 현재 규정상 구단들은 도시연고제다. 따라서 예를 들면 삼성의 경우 대구시,롯데는 부산시, KT는 수원시를 연고로 한다. 서울의 경우는 LG 두산 넥센 3개팀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도시연고제 개념 대로 가자면 서울 연고 3개팀은 14개 고교팀을 배분해야 한다. 삼성은 대구 3개팀을 갖고, 롯데는 부산 5개팀, KT는 수원 1개팀을 갖게 된다. 이렇게 쪼갤 경우 지역간 불균형이 심하다는 지적이 일 수도 있다. 반면 이미 구단들이 해당 연고지에 오랜 시간 투자를 해온 걸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맞서는 목소리도 있다.

9개 구단 스카우트 팀장들은 29일 제주도에서 한 자리에 모여 각 구단의 입장을 들었다. 구단들의 입장을 조율해야 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다음달까지 1차 연고 지명 세부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구단들의 양보를 이끌어 내지 못할 경우 최종안 도출이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10개 구단이 기본적으로 몇 개 팀을 연고팀으로 가져갈 지를 정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그동안 자원이 풍부했던 서울 연고 3개팀과 KIA 롯데는 지금 도시연고 내 고교팀들에 대한 연고권을 모두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빈약한 KT와 NC 등은 광역 연고지 개념을 적용,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 연고 3개팀은 14개 고교팀을 나눠야 하는데 그 방법이 다양하다. 무작위로 경쟁할 수도 있고, 주사위를 던져 팀을 배분할 수도 있다. 일단 KBO는 두산 LG 넥센 3개팀이 논의해서 최종안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다.

KT의 경우 통신 라이벌 SK와 경기 지역 연고를 놓고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그동안 SK는 안산공고, 구리 인창고 같은 경기 고교팀들을 그들의 우산 아래 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KT가 수원시에 자리를 잡으면서 SK 혼자 목소리를 내기 힘들게 됐다. 경기도에는 총 7개 고교팀이 있다.



KBO의 수많은 규약 중 스카우트 관련 규정은 수도 없이 바뀌어 왔다. 규정의 빈틈을 파고드는 경우가 많았다. 전학, 유급 선수에 대해서도 반드시 이번 1차 지명 규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지방 고교팀은 유망주를 발굴해 놓고도 서울 또는 대도시 명문 고교팀으로 선수를 빼앗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도된 전학인 셈이다. 이럴 경우 지방 고교팀의 연고권을 갖고 있는 프로팀은 나중에 그 선수를 지명하는 데 있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또 1차 지명을 위해 의도적으로 유급시키는 병폐가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전학 선수나 유급 선수의 경우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1차 지명 부활에 따른 연고지를 둘러싼 구단간 경쟁은 앞으로 본격화될 것이다.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


2013년 1월 27일 일요일

요미우리 무라타, 비밀병기 이용 동체시력 UP

출처: 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301250100156710012966&ServiceDate=20130125
2013-01-25 14:18:29
nogoon@sportschosun.com


요미우리 거포 무라타가 비밀 병기를 이용해 동체 시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최문영 기자 

타자에게 빠른 순발력 만큼 이나 중요한 게 시력이다. 그중에서도 움직이는 물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동체 시력이 좋아야 정확한 타격을 할 수 있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과거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동체 시력을 테스트했는데 이승엽이 엄청 높게 나왔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동체 시력을 테스트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이승엽은 짧은 시간 스쳐 지나가는 숫자를 보고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테스트를 했는데 아주 높은 정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승엽이 동체 시력만 좋아서 아시아의 홈런왕이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타자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동체 시력이 나쁠 경우 좋은 타격을 하기 어렵다고 볼 수는 있다.

요미우리의 거포 무라타가 동체 시력을 단련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다고 일본 스포츠전문지 산케이스포츠가 25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무라타가 미야자키 훈련캠프에 '비밀 병기'를 지참한다. 그는 지난해 시즌 중반부터 동체 시력을 단련시키는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무라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다"고 말했다.

이 기계는 3D 입체 영상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매일 5~10분 동안 기계를 사용하면 시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봤다.

무라타는 3월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 대표팀 예비 엔트리에 속해 있다.

무라타는 요코하마 시절 두 차례 홈런왕에 올랐던 슬러거였다. 2011년말 요미우리와 FA 계약을 하면서 이적했다.

2012년 타율 2할5푼2리, 12홈런, 58타점으로 기대이하의 성적을 냈다. 요미우리는 센트럴리그와 재팬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노주환 기자nogoon@sportschosun.com






출처: http://www.hani.co.kr/arti/sports/baseball/330490.html
홍석재 기자
2008.12.30 19:02

“날아오는 공 더 잘보이게” ‘동체시력’ 키우는 선수들

오가사와라·이치로 등 이색훈련

이승엽(32·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팀 동료 오가사와라 미치히로(35)가 괜찮은 안과를 찾고 있다. 곧 30대 절반을 넘어서는 오가사와라는 본격적인 ‘노안 방지’ 프로젝트를 시작할 참이다. 그는 “시력은 좋다. 하지만 최대한 오래 현역생활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스포츠신문 <스포츠 호치>는 30일 “오가사와라가 더 긴 현역 생활을 위해 동체시력 손상을 막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동체시력’이란 움직이는 물체나 자신이 움직이면서 사물의 특성을 파악하는 시각 능력이다. 일반적인 정지 시력과는 다르다. 메이저리거 정상급 리딩히터인 스즈키 이치로(35·시애틀)의 경우, 동체시력 향상을 위해 날아오는 테니스공에 적힌 번호(경기 공을 구분하기 위한 손톱 크기 정도의 숫자)를 읽는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쓰이 가즈오(33·휴스턴)도 같은 훈련을 한다.

한신의 가네모토 도모아키(40) 역시 지난해부터 일본 내 이 분야 최고 권위자와 함께 동체시력 훈련을 하는 등 내로라 하는 정상급 선수들이 이 훈련에 돌입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일부 구단은 아예 시각 기능 향상 전문의(optometrist)를 두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이승엽이 일반인들보다 동체시력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시즌 중 인터넷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누리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승엽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동체 시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석재 기자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MK인터뷰] 김태군 “포수로서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친화력”

출처: http://sports.mk.co.kr/view.php?no=62110&year=2013
기사입력 2013.01.25 09:58:34
매경닷컴 MK스포츠(美 투산) 전성민 기자


김태군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NC 다이노스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사진(美 투산)=전성민 기자 

[매경닷컴 MK스포츠(美 투산) 전성민 기자] “그렇지. 이거야. 지금 공 정말 좋다. (노)성호 지금 당장 경기에 나가도 되겠는데.”

김태군(NC 다이노스)은 포수 마스크를 쓰면 다른 사람이 된다. 투수들을 격려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크고 굵다. 힘이 넘친다. 김태군의 이런 에너지는 투수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김태군은 애리조나주 투산 레이드 파크 아넥스 필드에 차려진 NC 다이노스 전지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시즌까지 LG 트윈스에서 뛰었던 김태군은 빠르게 NC팀에 녹아들고 있다. 노력이 적응 기간을 단축시켰다.

김태군은 인터넷을 통해 NC 선수들의 경기 하이라이트를 자주 본다. 경기 영상을 보면서 투수들이 어떤 유형인지 파악하고 있다. 투구 분석지도 김태군에게 좋은 공부 자료다. 새롭게 알아야 할 투수들이 많다. 그는 투수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있다.

김태군은 자신이 포수로서 가진 가장 큰 장점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그는 “내 생각에는 포수에게 친화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투수들이 나에게 더 다가올 수 있게 또는 내가 더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태군이 불펜 피칭 후 아담 윌크와 사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美 투산)=전성민 기자

2013 시즌 뚜렷한 목표도 세웠다. 신생팀인 만큼 팀 동료들과 정말 거침없이, 미친 듯이 야구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막내인 만큼 여기저기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거침없이 나가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김태군은 팀 동료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1,2군은 볼배합의 차이가 있다. 볼넷을 주더라고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공을 던진다. 또한 투수들은 절대 오버 페이스를 안했으면 좋겠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투구수를 확 올리지 말고 조금씩 올렸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개인적인 목표는 포수로서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다. 공격보다는 수비에 중점을 둘 생각이다. 투수 리드와 경기 운영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타격은 팀 타율 이상으로 잡았다.

김광림 NC 타격 코치는 김태군의 타격이 여기 와서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했다. 김태군은 “이전까지는 공을 민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 코치님께서 공은 때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타구의 질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공을 때렸다”며 변화된 점을 설명했다. 공수를 모두 갖춘 포수로 거듭나기 위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어 김태군은 강인권 NC 배터리 코치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강 코치님께서 매우 잘해주셔서 내가 더 잘해야 할 것 같다”며 “코치님께서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과 코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잘 접목시키라고 해주신다”며 고개 숙였다.

새로운 마음으로 2013 시즌을 준비하는 김태군이 얼마만큼 성장하게 될지 주목된다.

[ball@maekyung.com]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박찬호의 암기문

나는 나의 능력을 믿으며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난도 이겨낼 것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나를 만들 것이며
항상 배우는 사람으로서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늘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새롭게 일할 것이며
어떤 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공시킬 것이다.

나는 항상 의욕이 넘치는 사람으로서
행동과 언어, 그리고 표정을 밝게 힐것이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으로서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나이가 몇 살이든 스무 살의 젊음을 유지할 것이며
한 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나라에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나의 신조를 매일 반복하며 실천할 것이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조범현이 밝힌 삼성 차세대 포수 육성론

출처: http://osen.mt.co.kr/article/G1109527155
2013.01.14 06:54
OSEN= 손찬익 기자

[OSEN=손찬익 기자] '디펜딩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는 진갑용의 계보를 이을 차세대 포수를 발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화수분 야구'를 추구하는 삼성은 조범현 인스트럭터를 영입해 내부 전력 강화에 주력할 예정.

박경완(SK), 진갑용(삼성) 등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를 키운 조 인스트럭터가 바라보는 포수의 최대 덕목은 무엇일까. 조 인스트럭터는 책임감과 희생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포수는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과거 상대했던 내용에 대해 메모를 하는 걸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견해를 밝혔다.

박경완과 진갑용의 성격은 대조적이다. 박경완은 신중하고 진갑용은 활발하다. 조 인스트럭터는 포수의 성격보다 책임감에 더 비중을 뒀다. "포수는 팀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포수의 손가락 사인 하나에 따라 승패가 직결된다. 그만큼 사명감을 가져야 좋은 포수가 된다".



또한 조 인스트럭터는 "포수에게 희생 정신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투수와의 호흡도 잘 해야 하고 자신이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며 "잘 하면 투수 덕분이지만 못하면 포수 책임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고생해도 티도 나지 않지만 희생이 필요한 포지션"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포수는 야구의 3D 업종이라 불린다. 투수 리드뿐만 아니라 벤치의 작전 지시, 주자 견제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 또한 홈으로 쇄도하는 주자와 충돌하거나 블로킹 등 부상 위험 또한 높은 편. 그만큼 쓸만한 포수를 육성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진갑용의 계보를 이을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이지영에 대해 "아직 많이 배워야 한다"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아직 만족하기엔 이르다는 의미였다.

그는 "작년에 1군에서 뛴 게 전부다. 포수는 경험이 중요하다. 경기를 많이 출장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면서도 "어깨가 좋으니까 정확도 높이는 게 숙제"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조 인스트럭터는 김동명과 이흥련에 대해 "매력적인 포수"라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what@osen.co.kr


2013년 1월 12일 토요일

류현진, "꼭 삼진 잡고 싶은 타자는 SF 포지"

출처: http://osen.mt.co.kr/article/G1109526554
2013.01.12 07:02
OSEN= 이상학 기자

[OSEN=이상학 기자] "포지를 삼진 잡고 싶다".

LA 다저스 괴물 투수 류현진(26)이 메이저리그에서 꼭 삼진 잡고 싶은 타자로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포수이자 4번타자 버스터 포지(26)를 꼽았다.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라이벌의 간판타자를 상대로 삼진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숙적 샌프란시스코와 피할 수 없는 경쟁을 다짐했다.

류현진은 지난 11일 SBS 파워FM '김창렬의 올드스쿨'에 게스트로 출연, 최근 근황과 함께 메이저리그 성공에 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꼭 삼진 잡고 싶은 타자는 누군가'라는 질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포수를 보는 포지를 삼진 잡고 싶다. 포수인데도 굉장히 잘 치는 타자"라고 이야기했다.



지난 2008년 샌프란시스코에 1라운드 지명된 우투우타 포수 포지는 2009년 빅리그에 데뷔했고, 지난해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48경기에서 타율 3할3푼6리를 기록, 내셔널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178안타 24홈런 103타점에 볼넷도 69개를 골라내 출루율도 4할8리로 1위. 정확성과 파워 그리고 선구안을 두루 갖췄다. 특히 왼손 투수 킬러라는 점에서 포지는 류현진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다. 지난해 포지는 오른손 투수들을 상대로는 타율 2할9푼2리 11홈런을 기록했지만, 왼손 투수들에게는 타율 4할3푼3리 13홈런을 폭발시켰다. 왼손 투수에게는 삼진도 21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와 올해 무려 19차례나 붙는다.

포지를 꼭 삼진 잡고 싶은 타자로 꼽은 것은 샌프란시스코를 넘겠다는 의지 표현이기도 하다.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는 지역 라이벌이지만, 지난 몇 년간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다. 다저스는 1988년 6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24년간 우승에 실패한 반면 샌프란시스코는 최근 3년 사이 두 차례나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며 통산 7회 우승으로 다저스를 뛰어넘었다.

류현진은 내심 개막 3연전 선발등판에 대한 기대도 살짝 내비쳤다. 그는 "첫 번째 상대가 어느 팀일지 궁금하다. 개막 상대가 샌프란시스코인데 만약 3선발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팀을 상대로 던진다. 한국에서처럼 데뷔전은 10개의 삼진을 잡고 싶다. 아무래도 첫 공은 직구를 던질 것 같은데 포지가 첫 타자가 아니다. 첫 승을 하면 말춤을 추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저스는 한국시간으로 오는 4월2~4일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에서 샌프란시스코와 개막 3연전을 갖는다. 클레이튼 커쇼와 잭 그레인키가 다저스의 1~2선발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만큼 류현진은 3연전 마지막 경기 선발등판을 노려볼 만하다.

한편 박찬호는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지난 1994년 4월9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홈경기에 구원투수로 데뷔 첫 등판, 1이닝 1피안타 2볼넷 2탈삼진 2실점을 기록했다.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는 1995년 5월3일 샌프란시스코와 원정경기에서 5이닝 1피안타 4볼넷 7탈삼진 무실점 역투를 펼치며 데뷔전을 선발승으로 장식한 바 있다.

waw@osen.co.kr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박영길의 타격이야기(1) =정확성의 대명사 장효조 타격의 비결

출처: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1128321.htm
입력: 2013.01.11 10:10
정리 | 박현진기자 jin@sportsseoul.com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교타자로 꼽히는 장효조의 타격 준비동작은 군더더기가 없다. 오른 팔이 잘 펴져 있어 정교한 타격을 할 수 있는 자세다. 약간 위쪽을 향하고 있는 시선과 넓은 스탠스가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의 정교함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스포츠서울DB)

한국에 야구가 들어온지 100년이 훌쩍 넘었고, 프로야구가 출범한지도 30년이 지나면서 야구 기술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같은 국제대회에서 미국 일본 등 야구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이 됐지만 야구이론의 정립면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박영길 본지 객원기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타격이론가이다. 프로야구 롯데 초대 감독을 거쳐 삼성.태평양 감독을 역임한 야구원로로 프로야구 출범 이후 현재까지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봤다. 스포츠서울은 매주 박영길 전 감독이 풀어내는 스타플레이어들의 타격이야기에 선수들의 성장과정과 장단점, 타격이론을 접목해 전달하려한다.<편집자주>


타격의 기본은 무엇일까. 타격은 득점을 얻기 위한 행위라는 점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타격 이론은 스윙을 가르치는데 중점을 뒀다. 그러나 실전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공을 때리는데 집중해야 하고 훈련도 공을 때리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자면 스윙 자체가 아니라 공을 때리기 위해서 팔과 다리를 비롯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얘기해야 한다. 스윙을 고치려들 것이 아니라 공을 때릴 때 팔과 다리의 모양, 쓰임새만 바로 잡으면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다.

필자가 타격이론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사건이 있다. 1985년 일본의 야구 전문지 슈칸베이스볼이 창간 30주년을 기념한 특별 화보를 발행했다. 화보에는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역대 명투수와 타자 30명의 피칭과 타격 장면을 32컷의 연속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그 가운데 오사다하루, 나가시마, 장훈 등 개성넘치는 강타자의 사진도 포함됐는데 놀랍게도 7번째부터 16번째 사진까지는 타격 자세가 거의 일치했다. 장훈은 배트를 눕힌 자세에서 타격에 시동을 걸었고 오사다하루는 배트를 바짝 세우고 한 발을 드는 외다리 타법을 구사했지만 공을 맞히는 임팩트존에서는 똑같은 자세로 공을 때리고 타구에 힘을 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좋은 타자들이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르지 않았고, 그 공통점을 연구하면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타격의 기본은 공을 정확하고 힘있게 때려서 멀리 타구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타격은 정확성과 강한 임팩트, 비거리를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정확하면 3할타자가 될 것이고, 강하게 때릴 수 있으면 홈런타자가 된다. 그 중 첫번째 화두가 정확성이다.


장효조가 왼쪽 팔꿈치를 옆구리 쪽으로 내려붙이면서 타격에 시동을 걸고 있다. 45도 각도로 누워있던 배트도 거의 뒤쪽으로 평평하게 눕기 시작한다. (스포츠서울DB)

한때 국내에서도 찍어치기, 즉 다운스윙을 집중적으로 가르친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는 잘못 배운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한 때 메이저리그 따라잡기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당시 요미우리가 LA 다저스의 캠프에서 스프링캠프를 차렸는데 양 팀 감독들이 야구론을 교환하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다저스의 야구이론과 시스템을 집대성한 '다저웨이'라는 책이 화두가 됐고 메이저리그식 타격의 요체를 "슬로우, 슬로우, 다운"이라고 말한 것을 통역이 잘못 전달해 일본에서 다운스윙이 급속도로 전파됐다. 그것이 60년대 후반부터 한국으로 유입됐는데 최근까지도 찍어치기를 강조하는 타격 이론가들이 적지 않다. 비거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운스윙으로 공을 내리찍듯 때려서 역회전을 만들어내야한다는 물리의 법칙도 동원됐다. 그렇다면 느린 커브를 올려쳐서 홈런을 때려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결국 찍어치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공과 배트가 정면으로 만나게 해야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운스윙을 하다보니 뒷다리에 체중이 많이 남아있게 되는 단점도 있다. 앞다리 쪽으로 체중을 완전히 실어줘야 파워가 살아나는 법이다.


임팩트 직전까지도 장효조의 오른팔은 쭉 펴져 있다. 왼팔은 거의 옆구리에 고정시킨 것 처럼 붙어서 몸통의 회전력을 이용할 준비까지 완벽하다. (스포츠서울DB)

정확성을 거론하기 위해 이 선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장효조다. 역대 한국 타자들 가운데 가장 정교한 타격을 했던 선수가 장효조다. 장효조는 빼어난 선구안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정확하게 공을 때릴 수 있는 팔동작을 갖췄다. 그것이 장효조가 통산 0.331의 경이적인 타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장효조의 타격은 하체보다는 상체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 장효조의 스탠스는 자신의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상체의 준비 동작은 거의 완벽했다.

사진을 보면 타격을 위해 들어올린 장효조의 오른팔이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쭉 뻗어 있다. 좌타자인 장효조는 오른팔이지만 우타자들은 왼팔을 가능한한 곧게 뻗어야 정확성을 얻을 수 있다. 골프의 백스윙과 같은 원리다. 팔을 뻗지 못하면 스윙 궤적이 흔들린다. 하물며 서있는 공을 때릴 때도 정확성을 얻기 위해 팔을 뻗는데 팔을 고정시키지 않고 어떻게 움직이는 공을 때릴 수 있겠는가. 장효조 뿐만 아니라 김현수, 양준혁 등 정확도가 높은 타자들의 타격 자세는 한결 같다.


타격을 마친 장효조의 오른쪽 다리가 90도 이상 굽혀져 있다. 체중 이동이 잘됐다는 의미다. (스포츠서울DB)

이 자세에서 배트는 4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해야 한다. 준비단계에서 배트를 앞으로 눕히거나 뒤쪽으로 눕히거나 꽂꽂하게 세우는 것은 관계가 없다. 체중이동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배트가 45도를 유지해야 일정한 스윙을 할 수 있고 공과 배트가 정타로 맞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장효조의 상체는 팔과 배트의 이상적인 각도를 잘 보여준다. 배트가 나오는 지점에서부터는 왼팔이 몸에 거의 붙어있다. 그래야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몸통의 회전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상체 동작 가운데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시선이다. 시선이 약간 위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선을 위로 둘 경우 몸과 공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뒤쪽 어깨가 내려가면서 배트가 몸에서 겉돌게 된다. 바깥쪽 공은 손대기가 어려워지고 몸쪽 빠른 공에도 대응하기가 어렵다. 장효조도 그런 이유 때문에 몸쪽 빠른 공에 약점을 보였다. 조금만 시선을 내려봤으면 더 완벽한 타자가 됐을 것이다.


장효조가 마지막으로 타구에 힘을 실은 뒤 1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는 순간이다. (스포츠서울DB)

반면 장효조의 하체는 장타를 생산하기 어려운 동작을 취하고 있다. 앞서 지적했지만 스탠스가 넓었다. 일반적으로 스트라이드를 내딛는 발이 축족에서 34인치 이상 벌어지면 체중이동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 스트라이드가 넓은 탓에 타격 준비를 취하면서도 체중이 앞다리에 남아있다. 체중을 뒷다리로 실었다가 앞다리로 옮기면서 타구에 힘을 실어야 하는데 체중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홈런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효조의 스탠스를 교정하지 않았던 것은 체중이동을 최소화하는 편이 정확도를 높이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장효조의 경우 파워가 더 실릴 경우 외야 플라이로 그치는 타구만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홈런수는 다소 늘어나더라도 안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타자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살려내는 것도 지도자의 중요한 능력이다.

정리 | 박현진기자 jin@sportsseoul.com


2013년 1월 9일 수요일

70년 만에 나타난 포수 타격왕… SF 포지 상복 터졌다

출처: 한국일보 뉴스
이재상기자 alexei@hk.co.kr
입력시간 : 2012.11.16 22:06:02

고등학교 전교 4등으로 졸업 LA에인절스 뿌리치고 대학 선택
최고의 포수·타자로 명성 쌓은 뒤 샌프란시스코에 당당히 입성
월드시리즈 두 차례 우승 신인왕 타격왕 올스타 재기상 이어
올 내셔널리그 MVP까지 수상 데뷔 4년 만에 모든것 이뤄


  • 샌프란시스코의 안방마님 버스터 포지가 16일(한국시간) 야구기자협회가 선정한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에선정됐다. 포지가 지난달 15일열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챔피언십 1차전에서 파울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AP=연합뉴스

데뷔 4년 만에 모든 것을 이뤘다.

생애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신인상과 70년 만의 포수 타격왕, 월드시리즈 우승에 이어 리그 최우수상(MVP)마저 석권하며 최고의 선수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안방마님 버스터 포지(25)가 16일(한국시간) 열린 미국야구기자협회 투표에서 MVP에 선정됐다. 그는 1위표 32장 가운데 27장을 얻어 총점 422점으로 라이언 브라운(밀워키 브루어스ㆍ285점)을 제치고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앤드루 매커천(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이 245점으로 3위에 자리했다.

내셔널리그에서 포수 MVP가 탄생한 것은 개비 하트넷(1935), 롬바르디(1938), 로이 캄파넬라(1951ㆍ1953ㆍ1955), 조니 벤치(1970·1972)에 이어 포지가 8번째다.

넷째 막내 아들로 태어난 포지는 어려서부터 미식축구, 축구, 농구 등 모든 운동에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리 컨츄리 고교 2학년 때 유격수와 투수를 겸하면서 타율 5할4푼4리 9개의 2루타, 3개의 3루타, 7홈런을 기록하며 이름을 떨쳤다. 비상한 두뇌를 지녔던 포지는 302명의 재학생 중 평점 3.94를 기록, 전체 4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교 졸업장을 받았다. 

2005년 LA 에인절스의 영입 제한을 뿌리치고 플로리다 주립대에 입학한 그는 마이크 마틴 감독의 권유로 1년 만에 유격수에서 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포지는 대학교 3학년 때 타율 4할6푼3리 26홈런 93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대학 포수에게 주는 조니 벤치상을 받으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2009년 전체 5순위로 샌프란시스코에 입단한 그는 9월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빅리그에 처음 데뷔했다. 조금씩 실력을 인정받던 그는 2010년 7월 팀의 '안방마님'이었던 벤지 몰리나를 제치고 주전 포수로 발돋음했다. 그는 그 해에 108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5리 18홈런 67타점을 기록, 샌프란시스코의 56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태며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그러나 포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지난해 5월말 수비 도중 스캇 커즌스(플로리다 말린스)와의 홈 충돌로 종아리뼈 골절과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대형 부상을 당하며 좌절했다.

하지만 피나는 재활 끝에 올해 4월초 복귀한 포지는 148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3푼6리를 기록, 1942년 보스턴 브레이브스 소속의 롬바르디 이후 70년 만에 포수 타격왕에 올랐다. 뛰어난 방망이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투수 리드로 팀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 등극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어 포스트시즌에서도 변함없이 4번 포수로 활약하면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제치고 4연승으로 우승, 두 번째 월드시리즈 반지를 획득했다.

포지는 올 시즌 내셔널리그 올스타, 올해의 재기상(2012), 실버 슬러거(2012), 행크 아론상(2012) 등을 싹쓸이 하며 최고의 포수임을 증명했다.

한편 아메리칸리그에서는 45년만의 타격 3관왕에 오른 미겔 카브레라(29ㆍ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을 제치고 MVP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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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스타] '부활에 성공하다' 버스터 포지

출처: 네이버 뉴스
기사입력 2012-11-26 06:58
김형준 칼럼


ⓒ gettyimages/멀티비츠


베이스볼+ : 이창섭 pbbless@naver.com
올 시즌 특기할만한 부분 중 하나는 포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지난 해 부진(?)했던 마우어는 리그 타격 4위(.319)에 올랐고, 로사리오는 리그 신인선수 중 가장 많은 홈런(28)을 때려냈다. 카를로스 루이스(.325 16홈런 68타점)는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으며, 몰리나는 이제 장타력까지 갖춘 포수가 됐다(.315 .373 .501). 올 시즌 '20홈런 이상' 기록한 포수는 총 9명. 이는 종전 최다 기록이었던 7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였다(1979, 1993, 1996, 1999, 2000, 2009년).
바야흐로 '포수들의 전성시대'가 열린 가운데 이들 중 정점에 선 선수가 있었다. 포수로서 팀의 4번타자를 맡았던 선수. 경기장 밖에서는 클럽하우스 리더 역할까지 해냈던 선수. 샌프란시스코의 안방마님, 버스터 포지(25)는 악몽 같았던 지난 시즌에서 벗어나 자신의 건재함을 모두에게 알렸다.
2011/12시즌 성적 변화(타/출/장)2011시즌 :  45경기   46안타  4홈런   21타점 17득점 .284 .368 .389
2012시즌 : 148경기 178안타 24홈런 103타점 78득점 .336 .408 .549 
샌프란시스코의 지난 시즌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두의 머리 속을 스쳐가는 그 끔찍한 부상 때문이었다. 2011년 5월26일(한국시간), 포지는 플로리다의 스캇 커즌스와 홈에서 크게 충돌했다. [영상] 트레이너의 부축을 받고 경기장을 빠져나간 포지는,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왼쪽 다리 골절과 함께 발목 인대가 모두 손상된 것. 포지는 4일 후 수술을 받았고, 결국 남아있는 경기 일정을 단 하루도 소화하지 못했다(이 사고는 포수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까지 논의될 만큼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포지가 이탈하자 샌프란시스코도 흔들렸다. 지구 선두(27승21패)였던 샌프란시스코는 포지의 부상 이후 59승55패를 기록하면서 애리조나에 8경기 차 뒤진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을 결산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포지의 공백'을 샌프란시스코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주원인으로 꼽았다. 더불어 내년 시즌 샌프란시스코의 열쇠도 그 해 50경기도 채 뛰지 못한 포지에게 달려있다고 전망했다. 샌프란시스코 내 포지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 브루스 보치 감독도 "건강한 포지가 필요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그 사이 포지는 개막전 복귀를 위해 재활에만 몰두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실전 감각을 회복하고자 동생과의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포지가 포수로서 부활하는 데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1루수로 돌려야 된다"는 의견도 나왔으며, 구단 역시 "반드시 포수를 고집하지 않고, 유연성 있게 기용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개막전 상대는 애리조나였다. 애리조나는 지난 해 샌프란시스코의 지구 2연패를 저지한 팀.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개막 첫 시리즈에서도 애리조나에게 싹쓸이 패배를 당했다(특히 3차전은 6-0에서 6-7의 역전패). 충격적인 3연패 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위안거리는 포지였다. 선발 포수 겸 4번타자로 나선 포지는 개막전에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산뜻한 출발을 했다.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는 부상 복귀 후 첫 홈런포도 가동했다. [영상] 굉장히 오랜만에 손맛을 본 포지는 "남은 시즌 동안 차츰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포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포지는 첫 25경기에서 .322 4홈런 11타점을 기록하며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보치 감독은 포지를 기용하는 데 있어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충분한 휴식일을 보장했고, 수비에서 오는 부담감도 덜어줬다. 보치 감독은 포지의 왼쪽 발목에 대해 "아직 불편함이 남아있다"고 말하면서, "나쁘진 않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포지는 발목이 아직 온전하지 않았던 5월에 가장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253 .311 .368).
6월은 포지에게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시간이었다. 바로 6월14일 휴스턴과 맞대결에서 '퍼펙트게임'의 일원이 된 것. [영상] 포지는 그 경기를 두고 "야구를 시작한 이후 가장 긴장됐던 경기"라고 전했다. 포스트시즌이나 월드시리즈에 나설 때의 긴장감과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 또한 포지는 케인과 자신의 의견이 다를 때면 주저하지 않고 케인의 의견을 따랐다고 밝혔다(7회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라우리를 체인지업으로 삼진 처리한 장면이 대표적인 예). 퍼펙트게임의 주인공, 케인도 포지의 경기 운영에 박수를 보냈다. 케인은 "이것은 나와 버스터의 합작품"이라는 말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포지는 생각보다 평범한 전반기를 보냈다(전반기 .289 10홈런 43타점). 하지만 팬들은 경기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즐거워했다. 그 결과, 포지는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됐다. 그것도 내셔널리그 역대 최다 득표(762만1370표)를 획득하면서 얻어낸 올스타였다(종전 2011년 라이언 브론 592만8004표).
포지의 활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포지에게 전반기는 '추진력'을 얻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포지는 마치 처음부터 후반기에 모든 승부를 건 사람처럼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 7월 말부터 '13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면서, 3경기 연속 홈런도 쏘아올렸다. ESPN에 따르면, 후반기 들어 포지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을 때려냈을 때 타율이 .508(61타수31안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부분별 최소 타율도 .333). 구질 공략도 뛰어났다. 패스트볼 상대 타율은 .556를 기록했으며(4홈런), 가장 큰 약점을 노출했던 슬라이더도 훌륭하게 대처해냈다(.417/포지는 통산 .234의 슬라이더 상대 타율을 기록).
팀도 순위 싸움에서 뒤쳐지지 않았다. 2위로 전반기를 마쳤던 샌프란시스코는, 후반기가 되면서 다저스와 한 층 더 치열한 선두 다툼을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포지와 함께 팀 타선을 이끌었던 멜키 카브레라가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중심타자를 잃은 샌프란시스코는 충격에 휩싸였다. 더욱이 기예르모 모타에 이어 올해만 팀 내 두 번째 금지 약물 복용자였기에 여파가 컸다. 자칫 팀이 붕괴될 수도 있었던 순간. 하지만 지난 해와 달리 올해는 확실한 구심점이 있었다. 포지는 침착하게 분위기를 추스렸고, 팀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자신 역시 "멜키는 없지만, 우리가 시작한 일을 잘 마무리하겠다"고 재차 각오를 다잡았다.
이번에도 포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는 카브레라의 공백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후 45경기에서 30승15패(.667)를 질주하며 지구 우승 자리에 올랐다. 포지도 같은 기간 .348 5홈런 27타점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명실상부 후반기 최고의 타자(후반기 .385 14홈런 60타점)로 거듭난 포지는, 1942년 어니 롬바르디 이후 70년 만에 내셔널리그 포수 타격왕이 됐다. 여기에 포지는 2003년 하비 로페스 이후 처음으로 100타점을 돌파한 내셔널리그 포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 타격왕을 차지한 역대 포수들 가운데 100타점까지 동시에 달성한 선수는 포지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
*포지는 주자가 있을 때 집중력이 더 좋아지는 타자(.353 .426 .591). 내셔널리그 타자 중 득점권에서 포지보다 더 좋은 타격을 펼친 타자는 없었다(.340/최소 150타수). 이에 보치 감독은 포지를 "클러치 상황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타자"라고 지목한 바 있다. 게다가 포지는 메이저리그에서 좌투수의 공을 가장 잘 때려내는 타자이기도 했다(.433 13홈런). 이러한 기록은 샌프란시스코가 좌완 선발을 상대할 시 압도적인 성적을 낳는 데 기여했다(40승19패).
포지가 건강하게 시즌을 보내자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포지는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서 홈런을 날려 팀의 포스트시즌 첫 점수를 뽑아냈다. 5차전에서는 승부에 쐐기를 박는 만루홈런[영상]을 터뜨렸고, 상대의 흐름을 끊는 멋진 수비도 선보였다. [영상] 챔피언십시리즈 동안 다소 주춤(26타수4안타)했던 포지는,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또 한 번 중요한 홈런을 때려냈다. 그리고 불과 세 번째 시즌 만에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의 전설로 추앙받는 크리스티 매튜슨(1회), 윌리 메이스(1회), 윌리 매코비(0회), 배리 본즈(0회)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시즌이 끝난 후, 포지의 이름은 각 종 시상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포지는 실버슬러거에 선정됐으며, "다신 받고 싶지 않다"고 수상 소감을 말한 올해의 재기상도 받았다(월드시리즈 도중 행크애런 상도 손에 넣었다). 샌프란시스코 선수 가운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선수에게 주는 '윌리 맥 어워드'도 포지의 몫이었다. 라이언 브론과 각축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던 리그 MVP 역시 포지에게 돌아갔다. 포지는 한 시즌에 월드시리즈 우승과 MVP를 석권한 역대 세 번째 포수가 됐다(1951년 요기 베라, 1955년 로이 캄파넬라). 메이저리그 역사 상 포지 이전에 타격왕과 월드시리즈 우승, MVP를 모두 차지한 선수는 총 6명. 이들 중 5명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이다(조 디마지오, 스탠 뮤지얼, 윌리 메이스, 미키 맨틀, 딕 고트, 프랭크 로빈슨).
돌아온 포지는 훌륭하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건강을 지킨 시즌 동안 포지는 개인과 팀의 영광을 모두 챙겼다. 고무적인 부분은 포지가 항상 팀의 영광을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현지에서는 데릭 지터와 비교하는 의견이 급격히 많아졌다. 혹은 수상 내역만 본다면 윌리 메이스가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존재했다(메이스도 신인상 이후 데뷔 3년 만에 타격왕-월드시리즈 우승-MVP를 차지했다). 벌써부터 대선수들과 함께 이름이 오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잊지 말자. 포지의 대서사시는 이제 막 3페이지를 장식했을 뿐이다.
역대 포수 단일 시즌 WAR 순위(*는 MVP 수상)
1. 자니 벤치(1972) : 8.5* / 1. 마이크 피아자(1997) : 8.5
3. 개리 카터(1982) : 8.3
4. 자니 벤치(1974) : 7.7
5. 조 마우어(2009) : 7.6*
6. 대럴 포터(1979) : 7.4
7. 버스터 포지(2012) : 7.2* / 7. 개리 카터(1984) : 7.2
9. 자니 벤치(1970) : 7.1*
10. 칼튼 피스크(1972) : 7.0

2013년 1월 8일 화요일

버스터 포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포수, 관련 글 (링크)



1. 'MVP' 버스터 포지, "SF에서 뛰는 내가 행운아" (2012)

2. 'MVP 모드' 버스터 포지 - 던질 곳이 없다

3. 라이언 브런 "포지, MVP 자격 있다" - 투표 '말, 말, 말'

4. '조기 강판' 배리 지토, "포지도 틀릴 때 있어 - 내 잘못"

5. ESPN insider: 美전문가 '버스터 포지, MVP로 손색 없다'

6. 부르스 보치 감독 "버스터 포지가 다 했다" 극찬

7. 팀 린스컴 "버스터 포지, 같은 팀이라서 다행"

8. ESPN The Mag: '천재 포수' 버스터 포지의 세상이 왔다

9. ESPN insider: "버스터 포지는 야구계의 래리 버드"
   주) 래리버드: 전 미국 프로농구 보스턴 셀틱스 선수이며, 보스턴의 영웅으로 칭송 됨

10. 버스터 포지 "(부상으로) 시즌 끝 - 포수 포지션은 무조건 계속"

11. 샌프란시스코, 월드시리즈 우승(2010) - 선수들 '말, 말, 말'



‘WS 우승’ SF의 복덩이 버스터 포지… ‘3년 만에 2번 ML 정상’

출처: 스포츠 동아
입력 2012-10-29 13:44:39
동아닷컴 조성운 기자


사진출처: http://aras.kr/20166433108?Redirect=Log&from=postView 캡쳐

[동아닷컴]

단 한 명의 포수가 비운의 팀(?)이라 불리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3년 만에 2번이나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팀으로 변모시켰다.

포지는 지난 2008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5번째 픽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지명됐다.

이후 포지는 2009년 잠시 메이저리그 무대에 모습을 보인 뒤 이듬해인 2010년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하며 주전 마스크를 썼다.

신인 포수에게 주전 마스크를 맡기는 모험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이는 효과 만점이었다.

그 해 포지는 108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5와 18홈런 67타점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으며 MVP 투표에서도 무려 11위를 차지했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 홈런 1개를 포함해 20타수 6안타를 때려내며 타율 0.300을 기록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팀은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뉴욕 자이언츠 시절이던 1954년 마지막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른 샌프란시스코로서는 감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샌프란시스코 팬들은 고령이 된 윌리 메이스가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린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보여줬다는 전설적인 바스켓 캐치를 회상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지난 시즌 5월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플로리다의 포수 스캇 커즌스와 충돌하며 발목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한 것.

이 부상 때문에 포지는 지난해 단 45경기에만 출전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후유증을 오래 앓을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다.

하지만 포지는 부활했고 이번 시즌 148경기에 출전해 타율 0.336과 24홈런 103타점을 기록했다. 타율은 내셔널리그 모든 타자 중 최고 기록.

화려하게 부활한 포지는 이러한 성적과 어리지만 팀의 리더로서 팀을 포스트시즌 무대에 진출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현재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MVP 후보로 꼽히고 있다. 또한 이미 올해의 재기상 내셔널리그 선수 부문을 받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샌프란시스코는 포지가 입단한 후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활약한 2010년부터 이번 해까지 3년 동안 2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는 것.

배리 본즈가 홈런왕을 차지하던 시절에도 이루지 못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월드시리즈 우승. 단 한 명의 어린 포수가 입단 한 이후 샌프란시스코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쉽게 패하지 않는 끈끈한 팀이 됐다.

그 결과는 3년 간 2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가 포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아닷컴 조성운 기자 madduxly@donga.com


2013년 1월 6일 일요일

[김나라의 그레이 존]‘국민투수’ 박찬호의 세 가지 성공 비결

출처: http://osen.mt.co.kr/article/G1109523523
2013.01.06 07:20
OSEN= 홍윤표 기자



박찬호(40. 전 한화 이글스)가 은퇴를 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야구선수는 아마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보통 한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이름을 알 수 있는 인물들 앞에 ‘국민가수’, ‘국민배우’ 등과 같은 ‘국민’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국민투수’ 박찬호는 야구인으로서 그 호칭이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박찬호가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야구를 오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가 성공하는 중요한 비결 세 가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마치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가 그런 특징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 보다는 그가 꾸준히 그 점들을 지키고 개발해왔던 것이 현재의 그를 있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비결은 뚜렷한 목표의식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한 뒤부터 그는 하나같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을 현재 우러러 보고 있는 선수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그것이다. 모호하고, 막연한 꿈이 아니라 마치 현재 눈앞에 있는 현재 벌어진 일처럼 선명하게 꿈꾸었다. 목표가 뚜렷하고 구체적일수록 동기는 강렬해 지게 마련이다.

2012년 시즌을 마감하며 야구팬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박찬호가 은퇴를 할 것인지, 아니면 1년이라도 더 현역에서 활동을 하게 될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관심만큼이나 박찬호의 고민의 시간도 길었다. 깊은 고민 끝에 그는 결정을 내렸고, 팬들은 그의 은퇴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두 번째 비결은 바로 강하고 균형 잡힌 동기이다. 목표를 이루어 내겠다는 강한 동기는 목표로 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목표에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선수 개인의 내적인 동기들, 그러니까 오늘 보다 내일 더 좋은 공을 던지겠다, 좀 더 완성된 나 자신이 되겠다는 것과 같은 내적 동기들과 함께, 주변사람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거나, 메이저리거가 되겠다는 것, 높은 연봉을 받고 싶다는 것과 같은 외적인 동기들이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박찬호는 내적인 동기와 외적인 동기의 균형을 잘 잡아 나갔다.

세 번째 비결은 꾸준한 자기 통제이다. 박찬호는 꼭 이루고 싶었던 목표를 어렵게 이루어냈을 때의 희열을 안다. 쉽게 그냥 얻어지는 것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냈을 때의 기쁨이 더 크고 값지다는 것을 안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지금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해 왔는지 증언한다. 박찬호는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체력을 관리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성공한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앞으로 그가 새롭게 쌓아갈 새로운 커리어에 분명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그의 커리어는 단순히 잘 쌓아 놓은 스펙이 아니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국민을 감동시켰던 발자취이다. 박찬호같이 자신의 꿈을 사랑하고, 그것을 향해 열정적으로 나아가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노력하는 선수들이 계속 늘어난다면 한국 야구계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고려대 학생상담 센터 상담교수


2013년 1월 5일 토요일

야구, 고통의 ‘살빼기 시즌’

출처: www.dongA.com
기사입력 2013-01-05 03:00:00
ⓒ박민우 기자


1월부터 해외 전지훈련… 감량 - 체력 강화 구슬땀

2013년 프로야구 정상을 향한 전쟁이 시작됐다. 

올해 프로야구 공식 개막일은 3월 30일. 그러나 9개 구단은 이미 출발선상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각 구단의 해외 전지훈련이 이달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전 굳히기’ ‘주전 도약’ 등 저마다의 목표를 정한 선수들은 전지훈련을 앞두고 벌써부터 굵은 땀방울 쏟아내고 있다.

○ 살과의 전쟁 선포 

KIA는 4일 투수조를 소집했다. 9개 구단 중에서 가장 먼저 훈련을 시작한 것. 7일부터는 야수조까지 모두 합류한다. 선수들에게 15일까지 체지방 비율을 23% 이하로 낮추라고 주문한 선동열 KIA 감독은 “1월 초 체력 테스트를 통과 못한 선수를 제외하고 전지훈련 명단을 짤 것”이라고 엄포를 내린 상태다. 지난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선수들이 전지훈련에 합류하지 못한 것을 이미 목격한 선수들은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올해는 한술 더 떠 선 감독의 요청으로 한화에서 건너온 하나마쓰 고지 트레이닝 코치가 선수들을 더욱 ‘살과의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저승사자’로 통할 정도다. 하나마쓰 코치는 직접 개발한 트레이닝 프로그램으로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근육을 집중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 ‘악’ 소리 나는 체력테스트

LG 선수들은 지난해처럼 첫 소집일이 두렵다. 지옥 같은 체력테스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기태 LG 감독은 지난해처럼 7일 시무식을 마친 뒤 ‘체력장’을 실시하기로 했다.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50m와 4km 코스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리고 배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윗몸일으키기를 해야 한다

지난해에는 에이스였던 박현준(영구제명) 유원상 우규민 등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정초부터 ‘낙오자’로 찍히지 않기 위해 선수들은 소집 전부터 자율훈련을 통해 시험에 대비하고 있다. 삼성 필승 불펜으로 활약하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으로 LG 유니폼을 입은 정현욱과 새로 합류한 현재윤 손주인 김효남 등도 첫 테스트를 위해 땀을 짜내고 있다.

○ 최장 54일간 ‘지옥 훈련’

‘디펜딩 챔피언’ 삼성은 소집일 바로 다음 날인 10일 투수조와 포수조를 괌으로 보내 가장 먼저 전지훈련에 돌입한다. 훈련 기간도 54일로 가장 길다. 남들에겐 휴양지지만 전지훈련 온 선수들에겐 그야말로 ‘지옥’. 2차 훈련은 실전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연습경기를 주로 하지만 1차는 체력훈련이 중점이다.

김응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화도 훈련 기간이 삼성 못지않다. 장소도 옮기지 않고 일본 오키나와에서 53일간 맹훈련에 나선다. 두산도 한화와 마찬가지로 한 곳에서 훈련할 예정이다. 두산 관계자는 “김진욱 감독이 훈련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막내 NC는 2차 전지훈련 장소를 WBC 1라운드가 열리는 대만 자이로 정했다. 한국 대표팀의 연습 상대를 자처하고 나서 실전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계산이다.

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


강민호 “알아서 주십시오” 연봉협상 ‘백지위임’ 배짱

출처: www.dongA.com
기사입력 2013-01-05 07:00:00
ⓒ김영준 기자


롯데 강민호가 연봉 백지위임 카드를 던졌다. 예비 FA(프리에이전트)로서 올 시즌을 마친 뒤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에서다. 스포츠동아DB

롯데 구단 “가장 마지막에 하자” 협상 미뤄

롯데 연봉협상 테이블의 최고 주목선수인 포수 강민호(28)가 백지위임을 선언했다. 예비 프리에이전트(FA)로서 2013시즌 직후 펼쳐질 롯데와의 FA 밀당(밀고 당기기)의 서막을 알리는 고도의 수싸움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백지위임은 강민호의 선제공격으로 해석된다.

강민호는 최근 롯데 이문한 운영부장과의 만남에서 “(2013년 연봉은) 알아서 주십시오”라고 밝혔다. 이에 이 부장은 “가장 마지막에 하자”고만 답했다. 강민호가 백지위임 카드를 꺼내들고 나올지는 짐작하지 못한 것이다. 

강민호의 지난해 연봉은 3억원. 용덕한이 트레이드로 영입되기 전까지 사실상 롯데의 유일한 1군 포수로서 시즌 119경기를 책임졌다. 400타수 109안타(타율 0.272) 19홈런 66타점을 기록했다. 롯데가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까지 올랐기에 인상 요인은 충분하다.

관건은 예비 FA로서 강민호에게 얹혀질 플러스알파다. 20대 후반의 국가대표 포수라는 희소성을 갖고 있다. 게다가 공격형 포수다. 통산 114홈런 455타점을 기록 중이다. 2013년 FA 시장에 별들이 쏟아진다고 해도 시장환경은 강민호에게 불리하지 않다. 무엇보다 포수는 항상 수요보다 공급이 절대 부족한 포지션이다. 당장 롯데부터 강민호가 빠져나가면 마땅한 대안이 없다. 강민호가 역대 FA 몸값 신기록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보는 근거다. 강민호의 2013년 연봉을 두고 ‘5억원은 가뿐히 넘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도는 것도 그래서다.

롯데도 강민호에게 2013년 연봉을 넉넉히 안겨주면, 설령 FA 시장에서 놓치더라도 최소 200%(보상선수 지명 시)∼최대 300%(보상금만 받을 시)의 보상금을 챙길 수 있다. 그러나 강민호만 연봉을 많이 올려주면, 고과대로 연봉을 받았거나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여타 선수들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롯데가 백지위임을 받고도 강민호의 연봉 발표를 맨 뒤로 미룬 이유다.

한편 롯데는 4일 투수 최대성과 200% 오른 9000만원에 재계약했다. 투수 이용훈(1억원)과 내야수 박종윤(1억700만원)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억대 연봉에 진입했다. 이밖에 투수 이명우는 9000만원, 내야수 박준서와 용덕한은 각각 6100만원과 6000만원에 도장을 찍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트위터@matsri21


2013년 1월 3일 목요일

[매거진S] 우리에게 61번은 박찬호였다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12-12-07 16:42
ⓒ박동희/김형준



[우리에게 박찬호는 어떤 존재였나, 글|박동희(스포츠춘추)]
'코리안 특급'이 대전역에서 멈췄다.
박찬호(39)는 11월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또 다른 도전과 또 다른 꿈을 설계하기 위해 현역에서 물러난다”며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19년간 미국, 일본, 한국 프로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투구했던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박찬호의 현역 지속과 은퇴를 놓고 갖가지 억측과 소문이 난무했던 야구계는 그의 ‘명예로운 퇴장’ 결정에 격려의 박수와 아쉬움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영원한 현역’으로 남길 바랐던 팬들도 은퇴 소식을 듣고 가슴에 커다란 도우넛 구멍이 생긴 것처럼 상실감을 나타내면서도 ‘코리안 특급’의 새로운 출발에 응원을 보냈다.
박찬호. 그는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그것이 그의 야구인생 끝을 의미한다고 믿는 이는 없다. 그는 마운드에서 내려오며 비로소 전설이 됐고,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작품처럼 영원한 추앙의 대상이 됐다.
박찬호. 그가 한국야구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의 존재만으로 한국야구는 발전했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위로를 받았다. 그를 떠나보내는 이들이 ‘따뜻한 슬픔’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 여기서 묻고자 한다. 과연 박찬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나. 그가 한국야구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나. 그를 기억하는 5명의 사람에게 물었다.
김인식 "박찬호는 한국야구의 은인이다"

김인식 ㅣ 전 한화 감독
김인식과 박찬호. 두 이 모두 이름 앞에 ‘국민’자가 붙는다. 한 명은 국민감독, 다른 한 명은 국민투수다. 두 이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호흡을 맞췄다. 결과는 좋았다. 한국 대표팀은 WBC에서 4강에 진출했고, 인공 호흡기에 의지하던 ‘오래된 스포츠’ 한국 프로야구는 그때부터 부활하기 시작했다.
김인식은 “그때 (박)찬호가 대표팀에서 뛰지 못했다면 4강은 고사하고, 망신만 당할 뻔했다”며 “찬호는 대표팀에서 훈련도 열심히 했지만, 팀 동료들을 독려하고 리드하는 등 헌신적으로 뛰었다”고 회상했다.
김인식은 “찬호를 처음 본 지도 이제 30년이 흘렀다”며 추억에 잠겼다.
“1993년이었을 거야. 지금은 세상을 떠난 고려대 최남수 감독이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이었어. 그때 난 쌍방울 감독을 그만두고 야인으로 있을 때라고. 하루는 최 감독이 ‘대표팀 투수들 좀 봐달라’고 부탁을 했어. 그래 대표팀이 훈련하는 건국대 야구장으로 갔다고. 가보니까 조성민, 임선동 이런 애들이 운동하고 있는 거야. 걔들 이름은 나도 알고 있었지. 아, 그런데 한 젊은 애가 세트 포지션에서 투구를 하는데 좀 이상해. 왜 이상했느냐고? 아니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로 세트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엉덩이 뒤로 뺀 상태에서 1루로 견제구를 던지면 안 되거든. 어차피 1루로 견제하려면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엉덩이가 뒤로 빠져 있는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면 주자가 금방 눈치를 챈단 말이야. 그래 걔한테 가서 그랬어. ‘난 지금 동작이 안 좋다고 본다’고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하더라고. 사실 그땐 찬호 공이 얼마나 빠른지도 몰랐어. 엉덩이 뒤로 빼는 것만 봤지. 뭐 하나 가르치면 금방 알아듣고 잘 하더라고.”

그리고나서 얼마 후. 김인식은 ‘엉덩이를 쭉 뺀 채 세트포지션을 취했던’ 22살의 한양대 투수가 LA 다저스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무려 120만 달러의 거액을 받고 당당하게 미국 무대를 밟았다는 소식이었다.
김인식은 박찬호의 미국행을 듣고 깜짝 놀라기보다 통렬하게 반성했다.
“반성했지. 나 말고도 많은 야구인이 반성했을 거야. 생각해보라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찬호가 던지는 걸 누구도 유심히 보지 않았다고. 미국에서 120만 달러를 안겨줄 정도의 투수였다면 우리도 찬호의 가능성을 봐야 하지 않았겠어? 하지만, 다들 못 봤단 말이야. 제대로 된 스카우트, 지도자였다면 찬호를 놓치지 않았을 테지. 그때 내가 그랬다고. ‘왜 다저스가 박찬호를 데려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야.
모름지기 찬호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많은 지도자, 스카우트가 선수 보는 눈을 키웠을 거라고 봐. 당장 이름값이나 기록보다 성장 가능성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똑똑히 느꼈을 거라고 본다고. 실제로 찬호가 미국으로 간 다음부터 지도자들이 선수들 가르치는 게 달라졌어. 스카우트들도 선수 보는 안목이 변했다고. 난 찬호가 우리 야구에 미친 가장 영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거라고 봐. 우리들의 선수 보는 눈을 키워준 거.”
김인식은 박찬호가 미국에서 뛰면서 비로소 한국야구가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났다고 평했다.
“난 1970년대부터 AFKN(주한 미군방송)을 통해서 메이저리그 경기를 자주 봤어. 그땐 TV 지상파에 AFKN이 나올 때였거든. 그걸 보면서 ‘아, 미국야구는 이렇구나’하는 걸 많이 배웠다고. 한 번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경기를 보는데, 데이브 파커라고 뛰어난 타자가 2번 타자로 나오는 거야. 속으로 ‘아니 왜 저 타자가 3, 4번이 아니고 2번에 나오지’하고 의아해했다고.
알고 보니까 그때부터 미국야구는 2번 타자의 중요성을 알았던 거였어. 1번 타자는 발 빠른 선수로 하되 2번 타순에 중장거리 타자를 배치한 거야. 사실 이전만 해도 우리나 미국이나 2번 타자는 체구 작고, 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난 타자들이 맡았거든. 헌데 파커가 2번 타자로 나오니까 상대 팀이 쩔쩔매는 거야. 1루에 나가있는 1번 타자는 언제든 뛸 자세를 취하지, 쉽게 던졌다간 2번 타자한테 장타를 맞을 것 같지, 투수가 힘들어하더라고. 그걸 보고 나도 배웠어.
OB 있을 때 덩치 큰 장원진을 2번 타자에 갖다 놓은 것도 그 영향이 컸다고. 재미난 건 말이야. 그때는 나같은 사람만 메이저리그를 보고 배웠는데, 찬호가 미국 간 다음부턴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됐다는 거야. ‘박찬호 중계’ 보면서 우리가 익히 알지 못했던 선진야구를 배우게 된 거지. 나 말고도 여러 지도자가 메이저리그 중계 보면서 많이 배우고, 현장에서 응용했을 거라고 봐. 찬호는 모르겠지만, 찬호 하나로 한국야구가 상당히 발전했어. 상당히.”
10월 말. 김인식은 박찬호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찬호가 그러더라고. ‘감독님 여기 인천공항입니다. 미국으로 피터 오말리 씨를 만나러 갑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미국 가서 고민 좀 하겠습니다.’ 난 그때 찬호한테 별말 안 했어. ‘잘 다녀오라’고 만 했지. 그러다 11월 30일 다시 전화가 왔어. ‘감독님 아쉽지만 그만해야 겠습니다’하더라고. 착잡하더라고. ‘어차피 은퇴를 결심했으면 앞으로 네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많이 전수해줘라’라고 했어. 한 시대가 이렇게 지나가나 싶더라고.”
김인식은 박찬호가 한국야구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찬호의 영향은 분명해. 찬호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줬어. 어른들한테는 한창 IMF로 어려울 때 위로와 격려가 돼줬다고. 한국야구 저변 확대에 큰 공을 세운 건 말할 것도 없지. 난 찬호가 있었으니까 한국야구가 더 커질 수 있었다고 봐. 한국야구엔 은인과도 같은 존재 아니겠어?”

1991년 주간야구에 실린 박찬호 기사
박찬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구단 운영을 배워 전문야구 경영인으로 거듭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인식은 그런 애제자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한국야구를 보라고. 가장 떨어지는 게 뭐 같아? 구단 운영이야, 운영. 야구는 정말 어려운 스포츠라고. 구단 운영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 야구계를 보라고. 단장, 사장이 수시로 바뀌잖아. 그리고 2, 3년만 지나면 구단 단장, 사장이 감독보다 더 아는 체를 한다고. 성적이 좋으면 자기들이 잘해서 된 줄 알고, 성적이 떨어지면 죄다 감독 책임으로 몬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주장하는 게 ‘구단 단장, 사장도 준비된 사람들이 맡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10년 이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좀더 나은 경영인이 되지 않겠어? 일전에 한신 타이거스에 갔더니 거기 관계자도 ‘무조건 감독, 단장, 사장만 바꾸면 성적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면서 ‘그걸 깨닫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
난 찬호가 구단 단장, 사장이 돼서 멋지게 구단을 운영해줬으면 좋겠어. 프런트 전문화, 선진화에도 앞 서고 말이야. 찬호는 원체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니까 유능한 구단 경영인이 될 거라고 봐. 나중에 여건이 되면 야구 전문경영인 하다가 감독이 돼서 현장에도 오면 좋을 것 같아. 그 노하우와 경험을 사장시키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말이야.”
송승준 "당신의 124승이 내겐 1240승이다!"

송승준 ㅣ 롯데 선발투수
송승준(32)은 ‘1세대 박찬호 키드(Kid)’다. 박찬호를 보고 ‘빅리그 진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그의 성공에 자극 받아 실제로 미국땅을 밟았다.
1999년 경남고를 졸업하자마자 송승준은 90만 달러를 받고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박찬호의 다저스 입단 이후, 13번째 메이저리그 도전자였다. 계약금으로 치자면 고졸 도전자 가운데 봉중근의 120만 달러 이후, 최고 금액이었다. 그만큼 보스턴의 송승준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고, 실력도 출중했다.
송승준은 박찬호가 없었다면 미국 도전의 꿈을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박)찬호 형이 나타나기 전까지 전 목적의식 없이 야구했어요. 그냥 야구를 하라니까 했고, 선배들한테 맞을까 봐 열심히 하는 척했죠. 그리고 메이저리그는 신들이 모인 곳인 줄로만 알았어요. 가끔 스포츠뉴스 해외토픽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스나 랜디 존슨이 투구하는 걸 봤는데, 그 선수들은 마구를 던지는 신으로 보였어요. 저 말고 다른 야구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솔직히 1994년 이전만 해도 아시아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다고, 아시아 선수가 햄버거 먹으면서 공 던진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다 찬호 형이 미국에 진출해 커다란 덩치의 선수들을 삼진으로 잡고, 해마다 10승 이상씩 올리는 걸 보고 깨달았죠. ‘나 같은 한국사람도 할 수 있다’고요.”
송승준은 미국땅을 밟고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찬호 형이 성공했다고 저까지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어요. 하지만, 직접 미국야구를 접해보니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미국 선수들도 다 저와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겪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었구나’ 생각했죠. 마이너리그에서 성적이 좋으면서 더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상이었던 박찬호를 만난 송승준은 그의 명성이 생각보다 더 높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미국 현지에서 찬호 형의 위상은 대단했어요. 아시아 선수가 와서 명문구단 다저스 2선발로 뛰고 있으니 다들 놀랐죠. 찬호 형 때문에 제 국적도 찾은 적이 있어요(웃음). 무슨 사연이냐고요? 2000년대 초반 미국과 북한 갈등이 심했어요. 미국 방송에 북한이 자주 소개됐어요. 하다 방송에 소개되니까 ‘코리안’하면 다 북한 사람인 줄 알던 시절이었죠.
한 번은 동료 선수가 절 보고 ‘북한 출신이 아니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다’라고 했죠. ‘너 찬호 박 알지? 나도 찬호 박처럼 한국(남한)사람이야’하니까 알아듣더라고요. 당시 ‘찬호 박’하면 모르는 선수가 없었어요. 거기다 LA 교민 사회에선 거의 신적인 존재였어요. 무슨 교주 같은 분위기였죠(웃음). 그만큼 교민분들이 찬호 형을 사랑했고, 찬호 형도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으셨어요.”

뉴욕 메츠 시절의 박찬호
‘1세대 박찬호 키드’ 송승준은 박찬호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었다. 그의 조언이야말로 외로운 20대 청년 송승준을 버틸 수 있게 한 든든한 어깨였다.
“찬호 형이 생긴 것 답지 않게 꼼꼼하세요. 6월 29일이 제 생일인데, 그날 마이너리그 경기 때문에 이동하고 있었거든요. 휴대전화를 보니까 찬호 형이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주셨더라고요. 다른 한국인 선수가 미국 무대에서 첫 승을 따냈을 때도 찬호 형은 잊지 않고 축하해주시곤 했어요.
야구에 대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죠. 아마 미국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 중에서 저보다 찬호 형이랑 자주 통화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전 싱글A에 있을 때 선발등판 하기 전에 꼭 찬호 형께 전화를 드렸어요. 한 번은 몇 경기 던지고나서 “형님 자신이 없습니다”하고 하소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찬호 형이 그러시더라고요.
‘승준아,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공 하나하나에 집중해라. 가령 낮게 던지다가 안타를 맞았다 치자. 그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가 내 공을 쳤어. 좋아. 다시 낮게 던질 테니까 또 쳐봐 이런 마음으로 투구해라. 네가 공 하나하나에 혼을 싣다 보면 어느덧 7회가 되고 경기가 끝나있을 거다.’
찬호 형 조언을 듣고 다음날 등판했는데 그때마다 계속 완봉 경기를 펼쳤어요.”
송승준은 선발투구를 마치고도 박찬호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들었다.
“‘오늘 형님이 조언한데로 던졌더니 결과가 좋았습니다’하고 말씀드리면 찬호 형은 늘 ‘지난 경기는 잊어라. 내일은 내일의 새로운 타자들과 상대해야 한다. 늘 새롭게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던지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때 그 조언이 지금 롯데에 뛰면서도 교훈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던 송승준은 불의의 부상으로 결국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런 그이기에 박찬호의 통산 124승이 얼마나 위대한 대기록인지 잘 안다.
“찬호 형이 아시아 선수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했을 때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게 기억나요. 일반 분들은 그게 어떤 기록인지 실감이 나지 않으실 거예요. 저처럼 미국에서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투수에게 124승은 1,240승처럼 느껴지는 대기록입니다. 미국에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독기를 품고 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제게 정말 124승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124번의 눈물보다 더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기록이에요.”
올 시즌 박찬호가 한화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했을 때 송승준은 뛸 듯이 기뻤다.
“한화 입단 소식을 듣고 찬호 형님께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미국에서 늘 조언해주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형님과 드디어 같이 뛸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고 했죠.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올 시즌 찬호 형과 맞대결한 적이 있느냐고요? 맞대결할 뻔했는데 찬호 형 로테이션이 하루 밀렸어요. 그 바람에 (류)현진이랑 붙었죠(웃음)”
송승준은 박찬호의 은퇴를 전해 듣고 “믿기지가 않았다”고 했다.
“찬호 형은 영원히 마운드 위에 있을지 알았어요. 제가 지금껏 수많은 야구선수와 만났지만, 찬호 형만큼 몸 관리에 철저한 선수는 없었거든요. 참,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더라고요.”

한화 시절의 박찬호(사진=한화)
2000년대 초반. 송승준은 박찬호와 함께 제주도에서 개인훈련을 했다. 어느 날, 개인훈련을 끝내고 두 이는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박찬호는 “간단하게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송승준은 속으로 ‘길어도 30분이면 끝나겠지’했다. 하지만, 3시간이 흘러도 웨이트트레이닝장에 들어간 박찬호는 나올 줄 몰랐다.
송승준이 어렵게 다가가 “형님 3시간이 지났는데요”라고 하자, 박찬호는 깜짝 놀라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느냐”며 미안해했다. 송승준이 “대투수 박찬호를 만든 8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각고의 노력이었다”고 평하는 것도 당시의 기억 때문이다.
‘1세대 박찬호 키드’ 박찬호는 송승준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많은 분이 찬호 형을 ‘영웅이다’ ‘한국야구의 기둥이었다’라고 하시는데요. 제게 찬호 형은 ‘꿈의 우물’이었어요. 저처럼 젊은 투수들은 찬호 형이 만들어놓은 우물에서 꿈을 퍼담아 마시곤 했으니까요. 찬호 형이 은퇴하셨어도 그 우물은 끊기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요.”
조지훈 "박찬호 선배님은 전설"

조지훈 ㅣ 한화 신인투수
송승준에게 박찬호가 ‘우상’이었다면, 한화 신인투수 조지훈(18)에게 박찬호는 ‘전설’이었다. 우상과 전설은 다른 의미다. 우상이 존경과 부러움이 합쳐져 ‘반드시 그 뒤를 따르고 싶은 대상’이라면 전설은 존경과 부러움은 있지만,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머나먼 존재 그 이상’이다.
박찬호가 다저스에 입단하던 1994년. 조지훈은 그해 세상 빛을 봤다.
“박찬호 선배님이 메이저리그를 호령하실 때 전 초등학생이었어요. 중학교 때까지 아침마다 박찬호 선배님의 경기를 봤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박찬호처럼 위대한 투수가 돼야지’하면서 꿈을 키웠죠. 특히나 저도 오른손 투수라서, 더 닮고 싶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제 또래 학생야구 선수들은 다 그랬을 거예요.”
조지훈이 TV 속의 박찬호를 실제로 본 건 2006년 겨울이었다. 당시 조지훈은 서울 고명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박찬호 장학회에서 해마다 ‘꿈나무 야구장학생 장학금 전달식’을 했어요. 그때 장학금을 받으려고 나갔다가 처음 박찬호 선배님을 뵙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저런 분을 직접 만나다’니 정말 꿈만 같았죠. 그때 우리들이 질문하고 박찬호 선배님이 조언을 들려주시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박찬호 선배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셨어요. ‘난 초등학교 시절 훈련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항상 집 앞 언덕을 토끼뜀이나 오리걸음으로 올랐다. 투수는 하체가 생명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하체가 발달한 것 같다. 너희도 하체의 중요성을 알고, 작은 부분서부터 실천해라.’”
‘박찬호 키드’ 조지훈은 송승준처럼 박찬호를 보면서 메이저리그 진출 꿈을 키웠다. 빅리그에 진출해 박찬호처럼 커다란 체구의 미국 선수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조지훈에게 박찬호는 ‘전설’이지, 극복할 우상은 아니었다.
“고교 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관심을 나타내곤 했어요. 코치님 아시는 분 가운데 메이저리그 육성팀에 있는 분이 계셨거든요. 전지훈련 갔을 때 그분이 ‘우리 팀에 오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하셨어요. 하지만, 전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아마 저말고도 제 또래 고교 투수들은 거의 같은 생각이었을 거예요. 결국 메이저리그 관계자분들이 손을 떼셨죠. 후회요? 전혀요. 전 지금도 한화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에요.”

류현진(사진 왼쪽부터)과 박찬호(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사실이다. 80년대생 야구 유망주들까지 앞다퉈 미국 무대에 도전했다면 90년대생 박찬호 키드들은 미국행 제안을 스스로 거절하고 있다. 100만 달러를 제시해도 과거처럼 덥석 물지 않는다. 되레 당장의 계약금이 낮아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길 바란다. 유창식, 하주석(이상 한화), 올해 윤형배(NC), 조상우(넥센), 조지훈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어째서 ‘90년대생 박찬호 키드들’은 80년대생들처럼 미국 무대 도전을 원치 않는 것일까. 조지훈은 “우리 세대는 현실적으로 꿈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미국 무대에서 성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다 알아요. 경쟁도 심하고, 어린 나이에 가면 실패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죠. 무엇보다 말이 잘 안 통하니까 미국 코치님들한테서 많은 걸 배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바엔 한국에 남아 실력을 쌓고, 이름을 알린 다음에 해외진출을 모색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강해요.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 생각일 거예요. 그래서 전 처음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목표로 했고, 해외무대는 그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그렇다고 90년대생 박찬호 키드들은 도전과 모험을 회피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준비된 도전’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이 국외진출 시 더 성공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 수많은 유망주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도 박찬호, 김병현, 추신수 등 극소수 선수만이 성공했다는 걸 되새겨볼 때 90년대생 박찬호 키드의 선택은 ‘경험을 통한 냉정한 진단’인지 모른다. 이제 그.들.의 우.상.은 류.현.진.이.다.
19살 조지훈은 대선배 박찬호를 ‘신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박찬호 선배는 제겐 신적인 존재세요. 엄청 존경하는 선배님이죠. 그 어린 나이에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 혼자 가서 124승을 거뒀다는 게 신기할 뿐이에요. 신이 아니고서 어떻게 그런 결과를 낼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인간은 신 앞에서 작아진다. 조지훈도 그랬다.
“한화에 입단하고, 대전 어느 미용실에서 박찬호 선배님을 뵌 적이 있어요. 파마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인사 드렸느냐고요? 아니요. 무서워서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왔어요.”
조지훈은 박찬호의 은퇴 소식을 듣고 어깨가 축 내려갔다.
“1년 더 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대선배님의 노하우와 경험을 옆에서 듣고,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래선지 은퇴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 아쉬웠어요.”
조지훈이 박찬호를 닮고 싶은 부분 역시 매우 현실적이다. 그 또래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이나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 등 ‘위대한 야구인 박찬호’보단 ‘야구선수 박찬호’를 더 닮고 싶어한다.
“박찬호 선배님은 몸 관리가 철저하신 것같아요. 그래서 40살까지 현역으로 뛰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점을 닮고 싶어요. 몸 관리를 철저히 해서 박찬호 선배님처럼 좋아하는 야구를 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길수 "박찬호는 IMF 고통을 치유해주는 희망 연고였다"

안길수 씨
안길수 ㅣ 야구팬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9회 말 2사 만루 위기를 맞았다. 무능한 위정자들의 실정과 탐욕에 눈이 먼 기업가들로 이 나라는 파탄 직전으로 몰렸다. 결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며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참혹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국가경제 붕괴는 가족 해체로 이어졌고, 서민들에게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때 대한민국의 위안이 돼준 이가 있었다. 박찬호였다. 안길수(39)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IMF였을 때에요. 그때 ‘삼립식품’이라는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사는 게 힘들 시기였죠. 당시 유일한 기쁨이 박찬호 중계였어요. 박찬호가 선발등판하는 날이면 오전부터 회사 사람들이 한두 명씩 사라졌어요. 어디에 있나 찾아보면 회사 한쪽에 설치된 TV 앞에 있었어요. 그땐 인터넷 중계도, DMB도 없던 시절이니까 말단직원, 과장. 부장님 할 것 없이 TV 앞에 모여 박찬호 중계를 함께 볼 수밖에 없었어요.”

영원한 61번 박찬호
당시 박찬호의 1승은 ‘나의 1승’이던 시절이었다. 박찬호는 평범한 야구선수가 아니라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주는 ‘내 분신’이자 우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는 ‘희망 연고’였다.
“지금 젊은 분들은 IMF 시절을 잘 모를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망 없는 시대에 살았는지 말이죠. 그때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이 박찬호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생각해보세요.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10승 투수가 나오기 힘든데,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에서 18승을 거뒀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겠습니까. 박찬호가 세계 최고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을 잡을 때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을 수밖에 없었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도로에 차가 없었지만, 박찬호가 한창 잘 던지던 1990년대 중반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랬던 것 같아요.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도로에 정말 차가 다니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국민의 박찬호에 대한 감정이입은 그가 광고로 나온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즈음 박찬호 선수가 삼보 컴퓨터 체인지업 광고를 찍었어요. 그때 정말 많은 사람이 그 컴퓨터를 산 걸로 기억해요. 나이키도 그렇고. 어느 집이든 박찬호 투구 장면이 찍힌 브로마이드 사진 하나 정도는 걸려 있던 시절이었죠. 과장이 아니라 정말 국민 영웅이 따로 없었습니다.”
박찬호가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유무형의 영향을 미쳤다면 박찬호 중계는 한국야구팬들의 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한국 프로야구가 전부인 줄 알았던 한국야구팬들은 그때부터 메이저리그의 선진야구를 지켜봤고, 팬들의 높아진 눈높이는 결국 한국야구의 질적인 발전을 유도했다.
“1990년대 중후반엔 인터넷도, 케이블 TV도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그런데도 지금보다 많은 야구팬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저스 선수들은 이름까지 외고 있을 정도였죠. 지상파의 박찬호 중계를 보며 덤으로 다른 선수들까지 주목하게 된 결과였죠.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며 많은 야구팬이 색다른 야구를 느끼고, 야구 보는 눈도 더 깊어진 게 확실합니다. 덕분에 한국야구계도 야구팬의 발전한 눈높이에 부응하려고 질적 향상에 신경 쓰기 시작했죠.”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로 거액을 받고 옮겼을 때 많은 팬은 그의 신화가 계속 되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박찬호는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며 급기야 ‘먹튀’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안 씨는 “그와 동시대를 살며 상처를 치유받았던 야구팬이라면 비난이나 ‘영웅의 몰락’이라는 평가보단 ‘반드시 재기할 것이라 믿었을 것”이라며 “그는 여전히 우리의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안 씨는 박찬호의 은퇴 소식을 접하고, 한편으론 ‘잘한 결정’이라 생각했단다.
“우리 세대는 박찬호가 어떤 투수였는지 잘 압니다. 국민적 영웅이었죠.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그저 ‘메이저리그에서 뛰다 온 선수’정도로만 아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한화에 입단한다고 했을 때도 영웅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강했는지 모릅니다. 막상 한화로 왔을 땐 저도 모르게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한화 타선이 터지길 바랐어요. 그게 팬의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의 퇴장은 진한 아쉬움도 남겼다. 그의 은퇴가 젊은 날과의 이별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박찬호 선수가 은퇴하며 이제 형님으로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사라졌다는 게 가슴 아팠어요. 남은 현역 선수 가운데 제가 형님으로 부를 수 있는 선수는 LG 최동수, 넥센 송지만 선수 정도밖에 없습니다. 저도 중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박찬호를 응원하는 미국 한인팬 가족(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안 씨는 박찬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느냐고 묻자 “남자들의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남자들의 영웅이었죠. 어렵고 힘들 때 위로와 꿈이 돼준 선수였어요. 도서관 위인전에서 볼 수 있는 영웅을 우리는 5일에 한번씩 TV를 통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야구경영인 수업 잘 마치시고,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안 씨에게 삶의 위로와 용기를 줬던 박찬호. 하지만, 박찬호만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건 아니었다. 지난 11월 2일 MBC 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3‘에서 안 씨는 ’돌멩이‘란 노래를 불러 많은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줬다.
방송에서 안 씨는 “서른아홉살을 마무리하면서 정말 해보고 싶었던 게 개그맨이었다. 항상 도전은 하지 않고 ‘될까 말까’만 고민하면서 39년을 살았다. 이제는 가족 앞에 당당해지고 싶다”며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혀 많은 이의 공감을 불렀다.
우리에게 박찬호는 그런 존재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굴러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란 돌멩이의 가사처럼 박찬호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좋은 날’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처럼 이젠 우리가 박찬호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다. 
[61번 박찬호 명장면 10선, 글|김형준 기자]

입단식에서 ⓒ gettyimages/멀티비츠
1. 한국인, 메이저리그에 등장하다(1994년 4월9일)
입단 동기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역대 17,18번째이자,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박찬호는, 개막 후 네 번째 경기에서 마침내 마운드에 올랐다. 당시 박찬호의 나이는 만 20세282일. 다저스 투수로는 1980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19세319일)와 1988년 라몬 마르티네스(20세144일) 이후 최연소 데뷔였다(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992년 20세341일 데뷔). 0-4로 뒤진 9회초 박찬호가 올라왔다(토미 라소다 감독은 6회말이 끝나자 일찌감치 박찬호에게 9회 등판을 통보했다).
그러나 스프링캠프에서 던진 23이닝(6경기 ERA 2.35)이 경험이 전부였던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버거운 상대였다. 박찬호는 첫 두 타자(4번 프레드 맥그리프, 5번 데이빗 저스티스)를 볼넷으로 내보낸 후 테리 펜들턴에게 2타점 2루타를 맞았다. 그러나 하비 로페스-마크 램키-투수 머커를 삼진-땅볼-삼진으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무리함으로써, 팀 최초의 동양인 선수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다저스 팬들의 기립박수 속에 내려갔다.
한편 박찬호의 데뷔전에서는 대기록도 나왔다. 애틀랜타 좌완 켄트 머커가 노히트노런을 만들어낸 것. 애틀랜타로서는 1973년 필 니크로 이후 첫 1인 노히트로, 다음 노히트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글래빈-스몰츠-매덕스는 애틀랜타에서 도합 1347경기에 선발로 나서고도 한 번의 노히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편 이 경기 이후 18년 동안 노히트를 당하지 않았던 다저스는 올해 시애틀 투수 6명에게 합작 노히트를 헌납했다. 박찬호는 4월15일 두 번째 등판(세인트루이스 원정)에서 3이닝 3실점으로 고전했다. 그리고 길고 고달펐던 마이너 수련이 시작됐다.

루키 시즌의 박찬호 ⓒ gettyimages/멀티비츠
2. 첫 완투승을 따내다(1997년 8월12일)
노장 너클볼러 톰 캔디오티(39)와의 5선발 경쟁에서 승리한 박찬호(24)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이어나갔다. 특히 7월 더위 시작과 함께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 7월26일 필라델피아전과 8월1일 컵스전에서는 연달아 8이닝 1실점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두 경기 모두 1회 1실점 후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컵스전에서는 완투를 위해 9회에도 올라왔다가 선두타자 새미 소사에게 볼넷을 내주고 교체된 것이 아쉬었다.
8월12일 다저스타디움 경기. 4만6000명의 관중 중 8000명이 넘는 한인이 경기장을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 가운데, 박찬호에게 다시 첫 완투 완봉의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 만난 컵스 타선을 상대로 7회까지 단타 3개와 볼넷 1개 무실점으로 막아낸 것. 5회 1사 후 케빈 오리를 상대하면서 발목을 삐끗했던 박찬호는, 8회초 1사 후 투수 타석에 등장한 대타 데이브 한센에게 솔로홈런을 맞아 완봉이 날아갔지만, 나머지 5명을 모두 범타로 돌려세우고 첫 완투승을 따냈다. 박찬호가 통산 선발 287경기에서 완투에 성공한 것은 10경기.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왜 완투를 안 하나요'는 질문과 함께 진출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통산 116경기에서 완투에 성공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mlb.com 영상] 박찬호의 9K 경기 (2008년 6월22일)

페르난도 타티스 ⓒ gettyimages/멀티비츠
3. 한 이닝에 맞은 두 방(1999년 4월24일)
1998시즌 도중 빌 러셀 감독을 해임한 다저스는, 1999년 새 감독으로 데이비 존슨(현 워싱턴)을 선택했다. 벤치코치 마이크 소시아(현 에인절스)가 선수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몬트리올에서 건너온 케빈 말론 단장은 '다저스 성골' 소시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존슨은 1986년 메츠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1996-1997년 볼티모어의 2년 연속 챔피언십시즈 진출을 이끈 명장. 박찬호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감독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12월 방콕아시안게임 출전의 피로를 풀지 못한 박찬호에게 1999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로 남았다. 4월24일 세인트루이스와의 홈경기. 시즌 네 번째 등판에 나선 박찬호는 2회부터 불안한 징후를 보이더니 3회 안타-몸맞는공-안타-만루홈런으로 시작과 함께 4점을 내줬다. J D 드루를 땅볼로 잡아냈지만 다시 솔로홈런 허용. 이후 볼넷 2개와 야수선택, 실책과 적시타로 2점을 더 내준 박찬호는, 계속된 1사 만루에서 맥과이어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냈다(다저스의 우익수는 강견의 몬데시였다). 하지만 만루홈런 후 다시 등장한 타티스에게 또 만루홈런을 맞았다. 3회에만 홈런 3개를 맞고 11점(6자책)을 내준 것. 이로써 박찬호는 1890년 빌 필립스(피츠버그)에 이어 한 이닝 만루홈런 두 개를 맞은 역대 두 번째 투수가 됐으며, 1946년 루디 요크(보스턴)에게 두 방을 허용한 텍스 셜리(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한 경기에서 한 타자에게 두 개의 만루홈런을 맞았다. 그리고 한 이닝에서 한 타자에게 두 개를 맞은 건 박찬호가 처음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 gettyimages/멀티비츠
4. 벨처와의 충돌(1999년 6월6일)
소시아가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고 처음 방문한 다저스타디움 3연전은 시리즈 내내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에인절스와 다저스는 1997년에 일어난 박찬호와 토니 필립스 간의 빈볼시비(당시 피아자는 가장 앞장서서 박찬호를 보호함으로써 우왕좌왕 수비를 통해 한국 팬들로부터 받았던 감점을 많이 만회했다) 이후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오고 있었다. 4회 맷 월벡에게 불의의 만루홈런을 맞은 박찬호는 5회말 1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대고 1루로 뛰어갔다. 그리고 직접 태그를 하러 온 에인절스 투수 팀 벨처와 부딪혔다. 잠시 몇 마디를 주고 받나 싶었던 둘은, 박찬호가 갑자기 팔꿈치로 가격한 후 발차기를 날리며 하나로 뒤엉켰다. 박찬호는 자신을 강하게 태그한 벨처에게 "What's happening?"이라고 했는데, F로 시작되는 단어의 답이 돌아오자 참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벨처는 4회와 5회 벌라디 타석에서 박찬호가 거푸 위협구를 던진 것에 기분이 상해 있던 상황이었다. 박찬호의 퇴장은 분위기 반전을 불러왔다. 다저스가 6회 몬데시의 적시 2루타에 이은 디본 화이트의 만루홈런으로 순식간에 5-4 역전에 성공한 것. 오난 마사오카와 마이크 매덕스가 이어던진 다저스는 결국 7-4의 역전승을 거뒀다. 몸싸움시 발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깬 박찬호에게는 7경기 출장정지와 3000달러 벌금의 징계가 내려졌다. 그리고 에인절스는 훗날 텍사스에 온 박찬호를 가장 크게 괴롭혔다(8경기 1승6패 9.64).
첫 24경기에서 6승10패 5.77에 그치며 논텐더 트레이드 가능성까지 제기됐던 박찬호는, 그러나 마지막 9경기에서 7승1패 3.83을 기록하고 이듬해 부활의 전주곡을 올렸다. 한편 박찬호가 등판한 1999년 9월24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는 흥미로운 기록 하나가 탄생했다. 1-2-3차전 에릭 가니에(캐나다) 제프 윌리엄스(호주) 이스마일 발데스(멕시코)에 이어 박찬호(대한민국)가 4차전 선발로 나섬으로써, 처음으로 4연전 시리즈에 나선 선발투수 네 명이 전원 비미국인이면서 모두 국적이 달랐던 것이다. 해외 선수시장을 가장 먼저 개척한 '프런티어 구단' 다저스 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의미있는 기록이었다.
5. 최다 탈삼진 경기(2000년 8월30일)
이듬해 박찬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승 5위(18승) 평균자책점 7위(3.27)와 함께 탈삼진(217개, 1위 랜디 존슨 347개)과 피안타율(.214, 1위 케빈 브라운 .213)에서 각각 리그 2위에 오른 것. 시즌 전 박찬호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박찬호는 에이전트를 스캇 보라스로 교체했는데, 보라스가 소개해준 스포츠 심리학자 하비 도프먼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른 한 가지는 채드 크루터라는 전담 포수가 등장한 것이다. 1998년 다른 다저스 투수들처럼 찰스 존슨의 뛰어난 리딩 능력과 수비력을 만끽했던 박찬호는, 1999년에는 토드 헌들리와 호흡을 맞춰야 했는데, 헌들리는 박찬호의 주무기인 하이 패스트볼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낮은 공만 요구했다. 만루홈런 두 방을 맞은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찬호는 처음 크루터가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도 변화구 사인을 내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지만, 이후 크루터의 볼배합에 적응하면서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8월30일 밀워키 원정경기. 평소보다 구속이 적게 나온 그 날(최고 구속 151km), 박찬호는 대신 최고의 제구력을 뽐냈다. 5회까지 캐로스의 실책을 제외하고 주자를 출루시키지 않았던 박찬호는, 6회에도 첫 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하지만 대타 마크 스위니에게 볼넷, 제임스 머튼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함으로써 노히트가 날아가고 20.2이닝 연속 무실점이 중단됐다(캐로스의 실책이 안타라고 생각한 박찬호는 노히트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고).
박찬호는 8회까지 14개의 삼진을 잡아냄으로써 다저스 투수로는 1996년 노모 이후 처음으로 14K를 만들어냈다. 9회를 삼진 3개로 끝낼 경우 노모의 최고 기록이자 다저스 역대 2위 기록과 타이를 이룰 수 있었던 상황(1위 코팩스-라몬 마르티네스 18개). 그러나 투구수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129개). 결국 9회에는 고개를 휙 돌리는 준비 동작으로 인기를 끌었던 마이크 패터스가 등판했고, 박찬호는 8이닝 14K 2실점(1안타 3볼넸) 승리에 만족해야 했다. BK로 불린 김병현에게 'Born to K'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한 이태일 기자(현 NC 다이노스 사장)는 경기 후 박찬호 기사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달았다. '순금보다 빛난 14K'

풋풋했던 모습 ⓒ 순(純)스포츠
6. 첫 완봉승을 따내다(2000년 9월30일)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박찬호는 2000년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샌디에이고 원정경기를 13K 무실점(2안타 1볼넷)으로 끝낸 것(116구). 141번째 선발 등판에서 만들어낸 감격적인 첫 완봉승으로(통산 3완봉), 투수 우디 윌리엄스에게 허용한 볼넷만 아니었다면 무사사구 완봉승도 될 수 있었다. 특히 박찬호는 1-0 간발의 리드를 지키고 있던 8회초 타석에서 풀카운트 승부 끝에 윌리엄스가 던진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을 밀어서 우측 담장을 넘김으로써 한달 전 하비에르 바스케스로부터 뽑아낸 통산 1호에 이어 2호 홈런을 기록했다.
한편 박찬호가 때린 홈런은 1953년에 세운 208개 팀 기록을 넘어서는 시즌 209호 홈런으로, 박찬호의 홈런볼은 다저스의 팀 박물관으로 향했다. 리그 3위 커브가 타자들을 마음껏 농락한 이날, 박찬호는 탈삼진 13개 중 12개를 변화구로 잡아냈으며, 2루조차 밟게 하지 않았다. 마지막 세 경기에서 8이닝 8K 무실점, 8이닝 13K 무실점, 13K 완봉승의 25이닝 34K 무실점을 기록하고 평균자책점을 3.67에서 3.27로 낮춘 박찬호로서는 남아 있는 경기가 더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7. 첫 한국인 올스타가 되다(2001년 7월11일)
2001년 7월5일 새벽. 많은 한국 팬들은 초초하게 미국발 소식을 기다렸다. 전년도 리그 우승 팀 감독으로서 올스타 감독이 된 바비 발렌타인 메츠 감독이 투수와 후보 야수 명단을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평균자책점 5위, 탈삼진 4위였던 박찬호는, 결국 그렉 매덕스, 케리 우드, 웨이드 밀러 등의 경쟁자를 제치고 올스타로 선정됐다. 박찬호는 전반기를 .191의 피안타율로 끝냈는데, 이는 케리 우드(.211)에 앞선 리그 1위였으며, 아메리칸리그 1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194보다도 좋았다. 11일 시애틀 세이프코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 선발 랜디 존슨(2이닝 3K 무실점)에 이어 3회 두 번째 투수로 나선 박찬호는 첫 타자로 나선 칼 립켄 주니어를 상대로 엉성한 초구를 던졌다. 이는 담장을 넘었고, 올스타전 역사상 최고령 홈런을 기록한 립켄은 MVP가 됐다.
박찬호는 이후 이반 로드리게스(땅볼)-이치로(땅볼)-알렉스 로드리게스(삼진)를 모두 잡아내고 이닝을 끝냈지만, 결승점을 내줌으로써 패전투수가 됐다. 2001년 올스타전은 시즌 후 은퇴를 발표한 립켄과 토니 그윈을 위한 무대였다. 그리고 이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맞은 231개의 홈런 중 가장 훈훈한 홈런으로 기억됐다. 그렇다면 박찬호는 립켄에게 일부러 홈런을 맞은 것일까. 박찬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상대하게 된 타자가 립켄인 줄 몰랐으며, 패스트볼을 가볍게 던진다는 것이 실투가 된 것뿐이라고 밝혔다.
8. 본즈와의 정면 승부(2001년 10월6일)
2001년 9월,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타자 한 명을 피해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다. 당시 '야구의 신'으로 군림했던 본즈가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8호를 날린 후 집중견제를 당하며 7경기에서 15개의 볼넷을 얻어낸 본즈는, 10월5일 휴스턴전에서 70호를 때려내고 맥과이어와 타이를 이뤘다. 본즈에게 남은 경기는 다저스와의 마지막 3연전. 1차전 선발로 나선 박찬호는 놀랍게도 정면승부를 선택했다. 그러나 피칭을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1회말 두 번째 타자 리치 오릴리아를 상대하는 도중 허리 통증이 발생한 것. 박찬호는 그 해 경기 도중 세 번의 허리 통증을 느꼈는데, 이 통증이 가장 극심했다.
박찬호는 허리 통증 때문에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세트 포지션으로 던져야 했고, 1회 첫 대결(149km 패스트볼)과 2회 두 번째 대결(커브)에서 모두 홈런을 허용함으로써 본즈에게 홈런 신기록을 내줬다(71,72호). 마지막 등판을 3.29로 시작, 개인 최고 기록(3.27) 경신을 기대했던 박찬호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즌 마무리였다. 4이닝 8실점(7자책) 패전을 안은 박찬호는 결국 3.50으로 시즌을 끝냈다. 한편 다음날 휴식을 취한 본즈는 최종전에서 데니스 스프링거로부터 한 방을 더 때려내고 '73'이라는 전대미문의 숫자로 시즌을 끝냈다.
[mlb.com 영상] 본즈의 71,72호
하필이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이 상대한 타자가 본즈였다는 것은 박찬호에게 불운했다. 박찬호는 본즈에게 가장 많은 8개의 홈런을 맞았으며(게레로-헬튼-플로이드-다이 4개) 가장 많은 타점(14)과 가장 많은 볼넷(15) 또한 허용했다. 한편 박찬호가 매번 본즈에게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1998년 박찬호는 17타석 연속 출루 도전에 나선 본즈를 삼진으로 잡아냄으로써 신기록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1998년까지 본즈를 상대로 17타수4안타(.236) 2홈런으로 선전했던 박찬호는, 그러나 이후로는 30타수9안타(.300) 6홈런에 그쳤다.

우승 확정의 순간. 36번은 그렉 매덕스 ⓒ gettyimages/멀티비츠
9. 아쉽게 놓친 네 번째 완봉승(2006년 5월6일)
2005년 트레이드 마감일. 박찬호의 고달펐던 텍사스 생활(68경기 22승23패 5.79)이 3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필 네빈과의 맞트레이드로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게 된 것. 이듬해 5번째 선발 경기에서, 박찬호는 마치 다저스 시절로 돌아간 모습을 보였다. 컵스 에이스 삼브라노(7이닝 10K 무실점)와의 맞대결에서 9이닝 4K 무실점(2안타 4볼넷)의 판정승을 거둔 것. 그러나 이날 샌디에이고 타자들은 박찬호에게 한 점도 지원해주지 못했다. 9회까지 121개를 던진 박찬호는, 결국 0-0 상황에서 10회 트레버 호프먼에게 마운드를 물려줘야만 했다(샌디에이고 11회 1-0 승리). 샌디에이고 투수가 9이닝을 2피안타 이하 무실점으로 막고도 승리투수가 되지 못한 것 팀 창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두 경기에서도 6이닝 무실점과 7이닝 1자책을 기록하며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오는 듯했던 박찬호는, 그러나 이후 설렘과 한숨을 번갈아가며 안겨줬다. 그리고 비운의 장파열로 시즌을 마감했다. 박찬호의 마지막 선발 시즌이었다(21선발 7승7패 4.81). 2007년 메이저리거로서 단 하루 마운드에 올랐던 박찬호는, 2008년 다저스 복귀와 함께 불펜투수로서의 메이저리거 인생 제 2막을 열었다. 그리고 2009년,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고 마침내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메이저리그에서 입은 마지막 유니폼 ⓒ 순(純)스포츠
10. 124승, 마지막 승리(2010년 10월2일)
2010년 박찬호는 월드시리즈 우승 팀 양키스에 입단하고 아메리칸리그 재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박찬호의 구위는 1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양키스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박찬호는 결국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고 내셔널리그로 돌아왔다. 9월13일 통산 123승째 승리를 거두자 '노모와 아시아 투수 타이를 이뤘다'는 현지 보도가 소개됐다. 피츠버그 존 러셀 감독과 선수들도 박찬호에게 다음 승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됐다.
정규시즌 마감을 3일 앞둔 160번째 경기. 러셀 감독은 3-1로 앞선 5회, 선발투수(다니엘 매커친)를 내리고 박찬호를 올렸다.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박찬호도 온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리베라로부터 배웠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던 커터가 생애 최고의 움직임을 보인 그 날, 박찬호는 3이닝 6K 퍼펙트를 기록하고 승리투수가 됐다. 매커친을 비롯한 동료들의 축하 속에, 박찬호의 길었던 메이저리그 여정은 막을 내렸다. 도전과 좌절의 연속 속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개척자의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mlb.com 영상] 박찬호의 124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