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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12-12-07 16:42
ⓒ박동희/김형준
[우리에게 박찬호는 어떤 존재였나, 글|박동희(스포츠춘추)]
'코리안 특급'이 대전역에서 멈췄다.
박찬호(39)는 11월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또 다른 도전과 또 다른 꿈을 설계하기 위해 현역에서 물러난다”며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19년간 미국, 일본, 한국 프로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투구했던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박찬호의 현역 지속과 은퇴를 놓고 갖가지 억측과 소문이 난무했던 야구계는 그의 ‘명예로운 퇴장’ 결정에 격려의 박수와 아쉬움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영원한 현역’으로 남길 바랐던 팬들도 은퇴 소식을 듣고 가슴에 커다란 도우넛 구멍이 생긴 것처럼 상실감을 나타내면서도 ‘코리안 특급’의 새로운 출발에 응원을 보냈다.
박찬호. 그는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그것이 그의 야구인생 끝을 의미한다고 믿는 이는 없다. 그는 마운드에서 내려오며 비로소 전설이 됐고,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작품처럼 영원한 추앙의 대상이 됐다.
박찬호. 그가 한국야구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의 존재만으로 한국야구는 발전했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위로를 받았다. 그를 떠나보내는 이들이 ‘따뜻한 슬픔’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 여기서 묻고자 한다. 과연 박찬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나. 그가 한국야구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나. 그를 기억하는 5명의 사람에게 물었다.
김인식 "박찬호는 한국야구의 은인이다"
김인식 ㅣ 전 한화 감독
김인식과 박찬호. 두 이 모두 이름 앞에 ‘국민’자가 붙는다. 한 명은 국민감독, 다른 한 명은 국민투수다. 두 이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호흡을 맞췄다. 결과는 좋았다. 한국 대표팀은 WBC에서 4강에 진출했고, 인공 호흡기에 의지하던 ‘오래된 스포츠’ 한국 프로야구는 그때부터 부활하기 시작했다.
김인식은 “그때 (박)찬호가 대표팀에서 뛰지 못했다면 4강은 고사하고, 망신만 당할 뻔했다”며 “찬호는 대표팀에서 훈련도 열심히 했지만, 팀 동료들을 독려하고 리드하는 등 헌신적으로 뛰었다”고 회상했다.
김인식은 “찬호를 처음 본 지도 이제 30년이 흘렀다”며 추억에 잠겼다.
“1993년이었을 거야. 지금은 세상을 떠난 고려대 최남수 감독이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이었어. 그때 난 쌍방울 감독을 그만두고 야인으로 있을 때라고. 하루는 최 감독이 ‘대표팀 투수들 좀 봐달라’고 부탁을 했어. 그래 대표팀이 훈련하는 건국대 야구장으로 갔다고. 가보니까 조성민, 임선동 이런 애들이 운동하고 있는 거야. 걔들 이름은 나도 알고 있었지. 아, 그런데 한 젊은 애가 세트 포지션에서 투구를 하는데 좀 이상해. 왜 이상했느냐고? 아니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로 세트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엉덩이 뒤로 뺀 상태에서 1루로 견제구를 던지면 안 되거든. 어차피 1루로 견제하려면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엉덩이가 뒤로 빠져 있는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면 주자가 금방 눈치를 챈단 말이야. 그래 걔한테 가서 그랬어. ‘난 지금 동작이 안 좋다고 본다’고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하더라고. 사실 그땐 찬호 공이 얼마나 빠른지도 몰랐어. 엉덩이 뒤로 빼는 것만 봤지. 뭐 하나 가르치면 금방 알아듣고 잘 하더라고.”
그리고나서 얼마 후. 김인식은 ‘엉덩이를 쭉 뺀 채 세트포지션을 취했던’ 22살의 한양대 투수가 LA 다저스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무려 120만 달러의 거액을 받고 당당하게 미국 무대를 밟았다는 소식이었다.
김인식은 박찬호의 미국행을 듣고 깜짝 놀라기보다 통렬하게 반성했다.
“반성했지. 나 말고도 많은 야구인이 반성했을 거야. 생각해보라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찬호가 던지는 걸 누구도 유심히 보지 않았다고. 미국에서 120만 달러를 안겨줄 정도의 투수였다면 우리도 찬호의 가능성을 봐야 하지 않았겠어? 하지만, 다들 못 봤단 말이야. 제대로 된 스카우트, 지도자였다면 찬호를 놓치지 않았을 테지. 그때 내가 그랬다고. ‘왜 다저스가 박찬호를 데려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야.
모름지기 찬호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많은 지도자, 스카우트가 선수 보는 눈을 키웠을 거라고 봐. 당장 이름값이나 기록보다 성장 가능성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똑똑히 느꼈을 거라고 본다고. 실제로 찬호가 미국으로 간 다음부터 지도자들이 선수들 가르치는 게 달라졌어. 스카우트들도 선수 보는 안목이 변했다고. 난 찬호가 우리 야구에 미친 가장 영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거라고 봐. 우리들의 선수 보는 눈을 키워준 거.”
김인식은 박찬호가 미국에서 뛰면서 비로소 한국야구가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났다고 평했다.
“난 1970년대부터 AFKN(주한 미군방송)을 통해서 메이저리그 경기를 자주 봤어. 그땐 TV 지상파에 AFKN이 나올 때였거든. 그걸 보면서 ‘아, 미국야구는 이렇구나’하는 걸 많이 배웠다고. 한 번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경기를 보는데, 데이브 파커라고 뛰어난 타자가 2번 타자로 나오는 거야. 속으로 ‘아니 왜 저 타자가 3, 4번이 아니고 2번에 나오지’하고 의아해했다고.
알고 보니까 그때부터 미국야구는 2번 타자의 중요성을 알았던 거였어. 1번 타자는 발 빠른 선수로 하되 2번 타순에 중장거리 타자를 배치한 거야. 사실 이전만 해도 우리나 미국이나 2번 타자는 체구 작고, 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난 타자들이 맡았거든. 헌데 파커가 2번 타자로 나오니까 상대 팀이 쩔쩔매는 거야. 1루에 나가있는 1번 타자는 언제든 뛸 자세를 취하지, 쉽게 던졌다간 2번 타자한테 장타를 맞을 것 같지, 투수가 힘들어하더라고. 그걸 보고 나도 배웠어.
OB 있을 때 덩치 큰 장원진을 2번 타자에 갖다 놓은 것도 그 영향이 컸다고. 재미난 건 말이야. 그때는 나같은 사람만 메이저리그를 보고 배웠는데, 찬호가 미국 간 다음부턴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됐다는 거야. ‘박찬호 중계’ 보면서 우리가 익히 알지 못했던 선진야구를 배우게 된 거지. 나 말고도 여러 지도자가 메이저리그 중계 보면서 많이 배우고, 현장에서 응용했을 거라고 봐. 찬호는 모르겠지만, 찬호 하나로 한국야구가 상당히 발전했어. 상당히.”
10월 말. 김인식은 박찬호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찬호가 그러더라고. ‘감독님 여기 인천공항입니다. 미국으로 피터 오말리 씨를 만나러 갑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미국 가서 고민 좀 하겠습니다.’ 난 그때 찬호한테 별말 안 했어. ‘잘 다녀오라’고 만 했지. 그러다 11월 30일 다시 전화가 왔어. ‘감독님 아쉽지만 그만해야 겠습니다’하더라고. 착잡하더라고. ‘어차피 은퇴를 결심했으면 앞으로 네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많이 전수해줘라’라고 했어. 한 시대가 이렇게 지나가나 싶더라고.”
김인식은 박찬호가 한국야구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찬호의 영향은 분명해. 찬호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줬어. 어른들한테는 한창 IMF로 어려울 때 위로와 격려가 돼줬다고. 한국야구 저변 확대에 큰 공을 세운 건 말할 것도 없지. 난 찬호가 있었으니까 한국야구가 더 커질 수 있었다고 봐. 한국야구엔 은인과도 같은 존재 아니겠어?”

1991년 주간야구에 실린 박찬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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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구단 운영을 배워 전문야구 경영인으로 거듭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인식은 그런 애제자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한국야구를 보라고. 가장 떨어지는 게 뭐 같아? 구단 운영이야, 운영. 야구는 정말 어려운 스포츠라고. 구단 운영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 야구계를 보라고. 단장, 사장이 수시로 바뀌잖아. 그리고 2, 3년만 지나면 구단 단장, 사장이 감독보다 더 아는 체를 한다고. 성적이 좋으면 자기들이 잘해서 된 줄 알고, 성적이 떨어지면 죄다 감독 책임으로 몬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주장하는 게 ‘구단 단장, 사장도 준비된 사람들이 맡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10년 이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좀더 나은 경영인이 되지 않겠어? 일전에 한신 타이거스에 갔더니 거기 관계자도 ‘무조건 감독, 단장, 사장만 바꾸면 성적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면서 ‘그걸 깨닫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
난 찬호가 구단 단장, 사장이 돼서 멋지게 구단을 운영해줬으면 좋겠어. 프런트 전문화, 선진화에도 앞 서고 말이야. 찬호는 원체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니까 유능한 구단 경영인이 될 거라고 봐. 나중에 여건이 되면 야구 전문경영인 하다가 감독이 돼서 현장에도 오면 좋을 것 같아. 그 노하우와 경험을 사장시키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말이야.”
송승준 "당신의 124승이 내겐 1240승이다!"
송승준 ㅣ 롯데 선발투수
송승준(32)은 ‘1세대 박찬호 키드(Kid)’다. 박찬호를 보고 ‘빅리그 진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그의 성공에 자극 받아 실제로 미국땅을 밟았다.
1999년 경남고를 졸업하자마자 송승준은 90만 달러를 받고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박찬호의 다저스 입단 이후, 13번째 메이저리그 도전자였다. 계약금으로 치자면 고졸 도전자 가운데 봉중근의 120만 달러 이후, 최고 금액이었다. 그만큼 보스턴의 송승준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고, 실력도 출중했다.
송승준은 박찬호가 없었다면 미국 도전의 꿈을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박)찬호 형이 나타나기 전까지 전 목적의식 없이 야구했어요. 그냥 야구를 하라니까 했고, 선배들한테 맞을까 봐 열심히 하는 척했죠. 그리고 메이저리그는 신들이 모인 곳인 줄로만 알았어요. 가끔 스포츠뉴스 해외토픽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스나 랜디 존슨이 투구하는 걸 봤는데, 그 선수들은 마구를 던지는 신으로 보였어요. 저 말고 다른 야구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솔직히 1994년 이전만 해도 아시아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다고, 아시아 선수가 햄버거 먹으면서 공 던진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다 찬호 형이 미국에 진출해 커다란 덩치의 선수들을 삼진으로 잡고, 해마다 10승 이상씩 올리는 걸 보고 깨달았죠. ‘나 같은 한국사람도 할 수 있다’고요.”
송승준은 미국땅을 밟고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찬호 형이 성공했다고 저까지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어요. 하지만, 직접 미국야구를 접해보니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미국 선수들도 다 저와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겪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었구나’ 생각했죠. 마이너리그에서 성적이 좋으면서 더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상이었던 박찬호를 만난 송승준은 그의 명성이 생각보다 더 높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미국 현지에서 찬호 형의 위상은 대단했어요. 아시아 선수가 와서 명문구단 다저스 2선발로 뛰고 있으니 다들 놀랐죠. 찬호 형 때문에 제 국적도 찾은 적이 있어요(웃음). 무슨 사연이냐고요? 2000년대 초반 미국과 북한 갈등이 심했어요. 미국 방송에 북한이 자주 소개됐어요. 하다 방송에 소개되니까 ‘코리안’하면 다 북한 사람인 줄 알던 시절이었죠.
한 번은 동료 선수가 절 보고 ‘북한 출신이 아니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다’라고 했죠. ‘너 찬호 박 알지? 나도 찬호 박처럼 한국(남한)사람이야’하니까 알아듣더라고요. 당시 ‘찬호 박’하면 모르는 선수가 없었어요. 거기다 LA 교민 사회에선 거의 신적인 존재였어요. 무슨 교주 같은 분위기였죠(웃음). 그만큼 교민분들이 찬호 형을 사랑했고, 찬호 형도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으셨어요.”

뉴욕 메츠 시절의 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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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박찬호 키드’ 송승준은 박찬호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었다. 그의 조언이야말로 외로운 20대 청년 송승준을 버틸 수 있게 한 든든한 어깨였다.
“찬호 형이 생긴 것 답지 않게 꼼꼼하세요. 6월 29일이 제 생일인데, 그날 마이너리그 경기 때문에 이동하고 있었거든요. 휴대전화를 보니까 찬호 형이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주셨더라고요. 다른 한국인 선수가 미국 무대에서 첫 승을 따냈을 때도 찬호 형은 잊지 않고 축하해주시곤 했어요.
야구에 대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죠. 아마 미국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 중에서 저보다 찬호 형이랑 자주 통화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전 싱글A에 있을 때 선발등판 하기 전에 꼭 찬호 형께 전화를 드렸어요. 한 번은 몇 경기 던지고나서 “형님 자신이 없습니다”하고 하소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찬호 형이 그러시더라고요.
‘승준아,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공 하나하나에 집중해라. 가령 낮게 던지다가 안타를 맞았다 치자. 그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가 내 공을 쳤어. 좋아. 다시 낮게 던질 테니까 또 쳐봐 이런 마음으로 투구해라. 네가 공 하나하나에 혼을 싣다 보면 어느덧 7회가 되고 경기가 끝나있을 거다.’
찬호 형 조언을 듣고 다음날 등판했는데 그때마다 계속 완봉 경기를 펼쳤어요.”
송승준은 선발투구를 마치고도 박찬호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들었다.
“‘오늘 형님이 조언한데로 던졌더니 결과가 좋았습니다’하고 말씀드리면 찬호 형은 늘 ‘지난 경기는 잊어라. 내일은 내일의 새로운 타자들과 상대해야 한다. 늘 새롭게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던지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때 그 조언이 지금 롯데에 뛰면서도 교훈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던 송승준은 불의의 부상으로 결국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런 그이기에 박찬호의 통산 124승이 얼마나 위대한 대기록인지 잘 안다.
“찬호 형이 아시아 선수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했을 때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게 기억나요. 일반 분들은 그게 어떤 기록인지 실감이 나지 않으실 거예요. 저처럼 미국에서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투수에게 124승은 1,240승처럼 느껴지는 대기록입니다. 미국에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독기를 품고 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제게 정말 124승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124번의 눈물보다 더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기록이에요.”
올 시즌 박찬호가 한화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했을 때 송승준은 뛸 듯이 기뻤다.
“한화 입단 소식을 듣고 찬호 형님께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미국에서 늘 조언해주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형님과 드디어 같이 뛸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고 했죠.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올 시즌 찬호 형과 맞대결한 적이 있느냐고요? 맞대결할 뻔했는데 찬호 형 로테이션이 하루 밀렸어요. 그 바람에 (류)현진이랑 붙었죠(웃음)”
송승준은 박찬호의 은퇴를 전해 듣고 “믿기지가 않았다”고 했다.
“찬호 형은 영원히 마운드 위에 있을지 알았어요. 제가 지금껏 수많은 야구선수와 만났지만, 찬호 형만큼 몸 관리에 철저한 선수는 없었거든요. 참,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더라고요.”

한화 시절의 박찬호(사진=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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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송승준은 박찬호와 함께 제주도에서 개인훈련을 했다. 어느 날, 개인훈련을 끝내고 두 이는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박찬호는 “간단하게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송승준은 속으로 ‘길어도 30분이면 끝나겠지’했다. 하지만, 3시간이 흘러도 웨이트트레이닝장에 들어간 박찬호는 나올 줄 몰랐다.
송승준이 어렵게 다가가 “형님 3시간이 지났는데요”라고 하자, 박찬호는 깜짝 놀라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느냐”며 미안해했다. 송승준이 “대투수 박찬호를 만든 8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각고의 노력이었다”고 평하는 것도 당시의 기억 때문이다.
‘1세대 박찬호 키드’ 박찬호는 송승준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많은 분이 찬호 형을 ‘영웅이다’ ‘한국야구의 기둥이었다’라고 하시는데요. 제게 찬호 형은 ‘꿈의 우물’이었어요. 저처럼 젊은 투수들은 찬호 형이 만들어놓은 우물에서 꿈을 퍼담아 마시곤 했으니까요. 찬호 형이 은퇴하셨어도 그 우물은 끊기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요.”
조지훈 "박찬호 선배님은 전설"
조지훈 ㅣ 한화 신인투수
송승준에게 박찬호가 ‘우상’이었다면, 한화 신인투수 조지훈(18)에게 박찬호는 ‘전설’이었다. 우상과 전설은 다른 의미다. 우상이 존경과 부러움이 합쳐져 ‘반드시 그 뒤를 따르고 싶은 대상’이라면 전설은 존경과 부러움은 있지만,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머나먼 존재 그 이상’이다.
박찬호가 다저스에 입단하던 1994년. 조지훈은 그해 세상 빛을 봤다.
“박찬호 선배님이 메이저리그를 호령하실 때 전 초등학생이었어요. 중학교 때까지 아침마다 박찬호 선배님의 경기를 봤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박찬호처럼 위대한 투수가 돼야지’하면서 꿈을 키웠죠. 특히나 저도 오른손 투수라서, 더 닮고 싶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제 또래 학생야구 선수들은 다 그랬을 거예요.”
조지훈이 TV 속의 박찬호를 실제로 본 건 2006년 겨울이었다. 당시 조지훈은 서울 고명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박찬호 장학회에서 해마다 ‘꿈나무 야구장학생 장학금 전달식’을 했어요. 그때 장학금을 받으려고 나갔다가 처음 박찬호 선배님을 뵙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저런 분을 직접 만나다’니 정말 꿈만 같았죠. 그때 우리들이 질문하고 박찬호 선배님이 조언을 들려주시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박찬호 선배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셨어요. ‘난 초등학교 시절 훈련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항상 집 앞 언덕을 토끼뜀이나 오리걸음으로 올랐다. 투수는 하체가 생명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하체가 발달한 것 같다. 너희도 하체의 중요성을 알고, 작은 부분서부터 실천해라.’”
‘박찬호 키드’ 조지훈은 송승준처럼 박찬호를 보면서 메이저리그 진출 꿈을 키웠다. 빅리그에 진출해 박찬호처럼 커다란 체구의 미국 선수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조지훈에게 박찬호는 ‘전설’이지, 극복할 우상은 아니었다.
“고교 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관심을 나타내곤 했어요. 코치님 아시는 분 가운데 메이저리그 육성팀에 있는 분이 계셨거든요. 전지훈련 갔을 때 그분이 ‘우리 팀에 오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하셨어요. 하지만, 전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아마 저말고도 제 또래 고교 투수들은 거의 같은 생각이었을 거예요. 결국 메이저리그 관계자분들이 손을 떼셨죠. 후회요? 전혀요. 전 지금도 한화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에요.”

류현진(사진 왼쪽부터)과 박찬호(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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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80년대생 야구 유망주들까지 앞다퉈 미국 무대에 도전했다면 90년대생 박찬호 키드들은 미국행 제안을 스스로 거절하고 있다. 100만 달러를 제시해도 과거처럼 덥석 물지 않는다. 되레 당장의 계약금이 낮아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길 바란다. 유창식, 하주석(이상 한화), 올해 윤형배(NC), 조상우(넥센), 조지훈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어째서 ‘90년대생 박찬호 키드들’은 80년대생들처럼 미국 무대 도전을 원치 않는 것일까. 조지훈은 “우리 세대는 현실적으로 꿈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미국 무대에서 성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다 알아요. 경쟁도 심하고, 어린 나이에 가면 실패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죠. 무엇보다 말이 잘 안 통하니까 미국 코치님들한테서 많은 걸 배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바엔 한국에 남아 실력을 쌓고, 이름을 알린 다음에 해외진출을 모색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강해요.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 생각일 거예요. 그래서 전 처음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목표로 했고, 해외무대는 그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그렇다고 90년대생 박찬호 키드들은 도전과 모험을 회피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준비된 도전’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이 국외진출 시 더 성공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 수많은 유망주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도 박찬호, 김병현, 추신수 등 극소수 선수만이 성공했다는 걸 되새겨볼 때 90년대생 박찬호 키드의 선택은 ‘경험을 통한 냉정한 진단’인지 모른다. 이제 그.들.의 우.상.은 류.현.진.이.다.
19살 조지훈은 대선배 박찬호를 ‘신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박찬호 선배는 제겐 신적인 존재세요. 엄청 존경하는 선배님이죠. 그 어린 나이에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 혼자 가서 124승을 거뒀다는 게 신기할 뿐이에요. 신이 아니고서 어떻게 그런 결과를 낼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인간은 신 앞에서 작아진다. 조지훈도 그랬다.
“한화에 입단하고, 대전 어느 미용실에서 박찬호 선배님을 뵌 적이 있어요. 파마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인사 드렸느냐고요? 아니요. 무서워서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왔어요.”
조지훈은 박찬호의 은퇴 소식을 듣고 어깨가 축 내려갔다.
“1년 더 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대선배님의 노하우와 경험을 옆에서 듣고,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래선지 은퇴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 아쉬웠어요.”
조지훈이 박찬호를 닮고 싶은 부분 역시 매우 현실적이다. 그 또래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이나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 등 ‘위대한 야구인 박찬호’보단 ‘야구선수 박찬호’를 더 닮고 싶어한다.
“박찬호 선배님은 몸 관리가 철저하신 것같아요. 그래서 40살까지 현역으로 뛰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점을 닮고 싶어요. 몸 관리를 철저히 해서 박찬호 선배님처럼 좋아하는 야구를 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길수 "박찬호는 IMF 고통을 치유해주는 희망 연고였다"

안길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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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수 ㅣ 야구팬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9회 말 2사 만루 위기를 맞았다. 무능한 위정자들의 실정과 탐욕에 눈이 먼 기업가들로 이 나라는 파탄 직전으로 몰렸다. 결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며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참혹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국가경제 붕괴는 가족 해체로 이어졌고, 서민들에게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때 대한민국의 위안이 돼준 이가 있었다. 박찬호였다. 안길수(39)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IMF였을 때에요. 그때 ‘삼립식품’이라는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사는 게 힘들 시기였죠. 당시 유일한 기쁨이 박찬호 중계였어요. 박찬호가 선발등판하는 날이면 오전부터 회사 사람들이 한두 명씩 사라졌어요. 어디에 있나 찾아보면 회사 한쪽에 설치된 TV 앞에 있었어요. 그땐 인터넷 중계도, DMB도 없던 시절이니까 말단직원, 과장. 부장님 할 것 없이 TV 앞에 모여 박찬호 중계를 함께 볼 수밖에 없었어요.”

영원한 61번 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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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찬호의 1승은 ‘나의 1승’이던 시절이었다. 박찬호는 평범한 야구선수가 아니라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주는 ‘내 분신’이자 우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는 ‘희망 연고’였다.
“지금 젊은 분들은 IMF 시절을 잘 모를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망 없는 시대에 살았는지 말이죠. 그때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이 박찬호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생각해보세요.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10승 투수가 나오기 힘든데,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에서 18승을 거뒀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겠습니까. 박찬호가 세계 최고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을 잡을 때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을 수밖에 없었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도로에 차가 없었지만, 박찬호가 한창 잘 던지던 1990년대 중반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랬던 것 같아요.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도로에 정말 차가 다니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국민의 박찬호에 대한 감정이입은 그가 광고로 나온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즈음 박찬호 선수가 삼보 컴퓨터 체인지업 광고를 찍었어요. 그때 정말 많은 사람이 그 컴퓨터를 산 걸로 기억해요. 나이키도 그렇고. 어느 집이든 박찬호 투구 장면이 찍힌 브로마이드 사진 하나 정도는 걸려 있던 시절이었죠. 과장이 아니라 정말 국민 영웅이 따로 없었습니다.”
박찬호가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유무형의 영향을 미쳤다면 박찬호 중계는 한국야구팬들의 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한국 프로야구가 전부인 줄 알았던 한국야구팬들은 그때부터 메이저리그의 선진야구를 지켜봤고, 팬들의 높아진 눈높이는 결국 한국야구의 질적인 발전을 유도했다.
“1990년대 중후반엔 인터넷도, 케이블 TV도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그런데도 지금보다 많은 야구팬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저스 선수들은 이름까지 외고 있을 정도였죠. 지상파의 박찬호 중계를 보며 덤으로 다른 선수들까지 주목하게 된 결과였죠.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며 많은 야구팬이 색다른 야구를 느끼고, 야구 보는 눈도 더 깊어진 게 확실합니다. 덕분에 한국야구계도 야구팬의 발전한 눈높이에 부응하려고 질적 향상에 신경 쓰기 시작했죠.”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로 거액을 받고 옮겼을 때 많은 팬은 그의 신화가 계속 되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박찬호는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며 급기야 ‘먹튀’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안 씨는 “그와 동시대를 살며 상처를 치유받았던 야구팬이라면 비난이나 ‘영웅의 몰락’이라는 평가보단 ‘반드시 재기할 것이라 믿었을 것”이라며 “그는 여전히 우리의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안 씨는 박찬호의 은퇴 소식을 접하고, 한편으론 ‘잘한 결정’이라 생각했단다.
“우리 세대는 박찬호가 어떤 투수였는지 잘 압니다. 국민적 영웅이었죠.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그저 ‘메이저리그에서 뛰다 온 선수’정도로만 아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한화에 입단한다고 했을 때도 영웅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강했는지 모릅니다. 막상 한화로 왔을 땐 저도 모르게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한화 타선이 터지길 바랐어요. 그게 팬의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의 퇴장은 진한 아쉬움도 남겼다. 그의 은퇴가 젊은 날과의 이별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박찬호 선수가 은퇴하며 이제 형님으로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사라졌다는 게 가슴 아팠어요. 남은 현역 선수 가운데 제가 형님으로 부를 수 있는 선수는 LG 최동수, 넥센 송지만 선수 정도밖에 없습니다. 저도 중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박찬호를 응원하는 미국 한인팬 가족(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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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씨는 박찬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느냐고 묻자 “남자들의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남자들의 영웅이었죠. 어렵고 힘들 때 위로와 꿈이 돼준 선수였어요. 도서관 위인전에서 볼 수 있는 영웅을 우리는 5일에 한번씩 TV를 통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야구경영인 수업 잘 마치시고,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안 씨에게 삶의 위로와 용기를 줬던 박찬호. 하지만, 박찬호만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건 아니었다. 지난 11월 2일 MBC 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3‘에서 안 씨는 ’돌멩이‘란 노래를 불러 많은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줬다.
방송에서 안 씨는 “서른아홉살을 마무리하면서 정말 해보고 싶었던 게 개그맨이었다. 항상 도전은 하지 않고 ‘될까 말까’만 고민하면서 39년을 살았다. 이제는 가족 앞에 당당해지고 싶다”며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혀 많은 이의 공감을 불렀다.
우리에게 박찬호는 그런 존재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굴러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란 돌멩이의 가사처럼 박찬호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좋은 날’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처럼 이젠 우리가 박찬호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다.
[61번 박찬호 명장면 10선, 글|김형준 기자]

입단식에서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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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 메이저리그에 등장하다(1994년 4월9일)
입단 동기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역대 17,18번째이자,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박찬호는, 개막 후 네 번째 경기에서 마침내 마운드에 올랐다. 당시 박찬호의 나이는 만 20세282일. 다저스 투수로는 1980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19세319일)와 1988년 라몬 마르티네스(20세144일) 이후 최연소 데뷔였다(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992년 20세341일 데뷔). 0-4로 뒤진 9회초 박찬호가 올라왔다(토미 라소다 감독은 6회말이 끝나자 일찌감치 박찬호에게 9회 등판을 통보했다).
그러나 스프링캠프에서 던진 23이닝(6경기 ERA 2.35)이 경험이 전부였던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버거운 상대였다. 박찬호는 첫 두 타자(4번 프레드 맥그리프, 5번 데이빗 저스티스)를 볼넷으로 내보낸 후 테리 펜들턴에게 2타점 2루타를 맞았다. 그러나 하비 로페스-마크 램키-투수 머커를 삼진-땅볼-삼진으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무리함으로써, 팀 최초의 동양인 선수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다저스 팬들의 기립박수 속에 내려갔다.
한편 박찬호의 데뷔전에서는 대기록도 나왔다. 애틀랜타 좌완 켄트 머커가 노히트노런을 만들어낸 것. 애틀랜타로서는 1973년 필 니크로 이후 첫 1인 노히트로, 다음 노히트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글래빈-스몰츠-매덕스는 애틀랜타에서 도합 1347경기에 선발로 나서고도 한 번의 노히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편 이 경기 이후 18년 동안 노히트를 당하지 않았던 다저스는 올해 시애틀 투수 6명에게 합작 노히트를 헌납했다. 박찬호는 4월15일 두 번째 등판(세인트루이스 원정)에서 3이닝 3실점으로 고전했다. 그리고 길고 고달펐던 마이너 수련이 시작됐다.

루키 시즌의 박찬호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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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 완투승을 따내다(1997년 8월12일)
노장 너클볼러 톰 캔디오티(39)와의 5선발 경쟁에서 승리한 박찬호(24)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이어나갔다. 특히 7월 더위 시작과 함께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 7월26일 필라델피아전과 8월1일 컵스전에서는 연달아 8이닝 1실점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두 경기 모두 1회 1실점 후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컵스전에서는 완투를 위해 9회에도 올라왔다가 선두타자 새미 소사에게 볼넷을 내주고 교체된 것이 아쉬었다.
8월12일 다저스타디움 경기. 4만6000명의 관중 중 8000명이 넘는 한인이 경기장을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 가운데, 박찬호에게 다시 첫 완투 완봉의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 만난 컵스 타선을 상대로 7회까지 단타 3개와 볼넷 1개 무실점으로 막아낸 것. 5회 1사 후 케빈 오리를 상대하면서 발목을 삐끗했던 박찬호는, 8회초 1사 후 투수 타석에 등장한 대타 데이브 한센에게 솔로홈런을 맞아 완봉이 날아갔지만, 나머지 5명을 모두 범타로 돌려세우고 첫 완투승을 따냈다. 박찬호가 통산 선발 287경기에서 완투에 성공한 것은 10경기.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왜 완투를 안 하나요'는 질문과 함께 진출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통산 116경기에서 완투에 성공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페르난도 타티스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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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이닝에 맞은 두 방(1999년 4월24일)
1998시즌 도중 빌 러셀 감독을 해임한 다저스는, 1999년 새 감독으로 데이비 존슨(현 워싱턴)을 선택했다. 벤치코치 마이크 소시아(현 에인절스)가 선수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몬트리올에서 건너온 케빈 말론 단장은 '다저스 성골' 소시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존슨은 1986년 메츠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1996-1997년 볼티모어의 2년 연속 챔피언십시즈 진출을 이끈 명장. 박찬호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감독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12월 방콕아시안게임 출전의 피로를 풀지 못한 박찬호에게 1999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로 남았다. 4월24일 세인트루이스와의 홈경기. 시즌 네 번째 등판에 나선 박찬호는 2회부터 불안한 징후를 보이더니 3회 안타-몸맞는공-안타-만루홈런으로 시작과 함께 4점을 내줬다. J D 드루를 땅볼로 잡아냈지만 다시 솔로홈런 허용. 이후 볼넷 2개와 야수선택, 실책과 적시타로 2점을 더 내준 박찬호는, 계속된 1사 만루에서 맥과이어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냈다(다저스의 우익수는 강견의 몬데시였다). 하지만 만루홈런 후 다시 등장한 타티스에게 또 만루홈런을 맞았다. 3회에만 홈런 3개를 맞고 11점(6자책)을 내준 것. 이로써 박찬호는 1890년 빌 필립스(피츠버그)에 이어 한 이닝 만루홈런 두 개를 맞은 역대 두 번째 투수가 됐으며, 1946년 루디 요크(보스턴)에게 두 방을 허용한 텍스 셜리(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한 경기에서 한 타자에게 두 개의 만루홈런을 맞았다. 그리고 한 이닝에서 한 타자에게 두 개를 맞은 건 박찬호가 처음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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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벨처와의 충돌(1999년 6월6일)
소시아가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고 처음 방문한 다저스타디움 3연전은 시리즈 내내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에인절스와 다저스는 1997년에 일어난 박찬호와 토니 필립스 간의 빈볼시비(당시 피아자는 가장 앞장서서 박찬호를 보호함으로써 우왕좌왕 수비를 통해 한국 팬들로부터 받았던 감점을 많이 만회했다) 이후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오고 있었다. 4회 맷 월벡에게 불의의 만루홈런을 맞은 박찬호는 5회말 1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대고 1루로 뛰어갔다. 그리고 직접 태그를 하러 온 에인절스 투수 팀 벨처와 부딪혔다. 잠시 몇 마디를 주고 받나 싶었던 둘은, 박찬호가 갑자기 팔꿈치로 가격한 후 발차기를 날리며 하나로 뒤엉켰다. 박찬호는 자신을 강하게 태그한 벨처에게 "What's happening?"이라고 했는데, F로 시작되는 단어의 답이 돌아오자 참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벨처는 4회와 5회 벌라디 타석에서 박찬호가 거푸 위협구를 던진 것에 기분이 상해 있던 상황이었다. 박찬호의 퇴장은 분위기 반전을 불러왔다. 다저스가 6회 몬데시의 적시 2루타에 이은 디본 화이트의 만루홈런으로 순식간에 5-4 역전에 성공한 것. 오난 마사오카와 마이크 매덕스가 이어던진 다저스는 결국 7-4의 역전승을 거뒀다. 몸싸움시 발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깬 박찬호에게는 7경기 출장정지와 3000달러 벌금의 징계가 내려졌다. 그리고 에인절스는 훗날 텍사스에 온 박찬호를 가장 크게 괴롭혔다(8경기 1승6패 9.64).
첫 24경기에서 6승10패 5.77에 그치며 논텐더 트레이드 가능성까지 제기됐던 박찬호는, 그러나 마지막 9경기에서 7승1패 3.83을 기록하고 이듬해 부활의 전주곡을 올렸다. 한편 박찬호가 등판한 1999년 9월24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는 흥미로운 기록 하나가 탄생했다. 1-2-3차전 에릭 가니에(캐나다) 제프 윌리엄스(호주) 이스마일 발데스(멕시코)에 이어 박찬호(대한민국)가 4차전 선발로 나섬으로써, 처음으로 4연전 시리즈에 나선 선발투수 네 명이 전원 비미국인이면서 모두 국적이 달랐던 것이다. 해외 선수시장을 가장 먼저 개척한 '프런티어 구단' 다저스 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의미있는 기록이었다.
5. 최다 탈삼진 경기(2000년 8월30일)
이듬해 박찬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승 5위(18승) 평균자책점 7위(3.27)와 함께 탈삼진(217개, 1위 랜디 존슨 347개)과 피안타율(.214, 1위 케빈 브라운 .213)에서 각각 리그 2위에 오른 것. 시즌 전 박찬호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박찬호는 에이전트를 스캇 보라스로 교체했는데, 보라스가 소개해준 스포츠 심리학자 하비 도프먼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른 한 가지는 채드 크루터라는 전담 포수가 등장한 것이다. 1998년 다른 다저스 투수들처럼 찰스 존슨의 뛰어난 리딩 능력과 수비력을 만끽했던 박찬호는, 1999년에는 토드 헌들리와 호흡을 맞춰야 했는데, 헌들리는 박찬호의 주무기인 하이 패스트볼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낮은 공만 요구했다. 만루홈런 두 방을 맞은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찬호는 처음 크루터가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도 변화구 사인을 내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지만, 이후 크루터의 볼배합에 적응하면서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8월30일 밀워키 원정경기. 평소보다 구속이 적게 나온 그 날(최고 구속 151km), 박찬호는 대신 최고의 제구력을 뽐냈다. 5회까지 캐로스의 실책을 제외하고 주자를 출루시키지 않았던 박찬호는, 6회에도 첫 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하지만 대타 마크 스위니에게 볼넷, 제임스 머튼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함으로써 노히트가 날아가고 20.2이닝 연속 무실점이 중단됐다(캐로스의 실책이 안타라고 생각한 박찬호는 노히트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고).
박찬호는 8회까지 14개의 삼진을 잡아냄으로써 다저스 투수로는 1996년 노모 이후 처음으로 14K를 만들어냈다. 9회를 삼진 3개로 끝낼 경우 노모의 최고 기록이자 다저스 역대 2위 기록과 타이를 이룰 수 있었던 상황(1위 코팩스-라몬 마르티네스 18개). 그러나 투구수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129개). 결국 9회에는 고개를 휙 돌리는 준비 동작으로 인기를 끌었던 마이크 패터스가 등판했고, 박찬호는 8이닝 14K 2실점(1안타 3볼넸) 승리에 만족해야 했다. BK로 불린 김병현에게 'Born to K'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한 이태일 기자(현 NC 다이노스 사장)는 경기 후 박찬호 기사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달았다. '순금보다 빛난 14K'

풋풋했던 모습 ⓒ 순(純)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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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 완봉승을 따내다(2000년 9월30일)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박찬호는 2000년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샌디에이고 원정경기를 13K 무실점(2안타 1볼넷)으로 끝낸 것(116구). 141번째 선발 등판에서 만들어낸 감격적인 첫 완봉승으로(통산 3완봉), 투수 우디 윌리엄스에게 허용한 볼넷만 아니었다면 무사사구 완봉승도 될 수 있었다. 특히 박찬호는 1-0 간발의 리드를 지키고 있던 8회초 타석에서 풀카운트 승부 끝에 윌리엄스가 던진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을 밀어서 우측 담장을 넘김으로써 한달 전 하비에르 바스케스로부터 뽑아낸 통산 1호에 이어 2호 홈런을 기록했다.
한편 박찬호가 때린 홈런은 1953년에 세운 208개 팀 기록을 넘어서는 시즌 209호 홈런으로, 박찬호의 홈런볼은 다저스의 팀 박물관으로 향했다. 리그 3위 커브가 타자들을 마음껏 농락한 이날, 박찬호는 탈삼진 13개 중 12개를 변화구로 잡아냈으며, 2루조차 밟게 하지 않았다. 마지막 세 경기에서 8이닝 8K 무실점, 8이닝 13K 무실점, 13K 완봉승의 25이닝 34K 무실점을 기록하고 평균자책점을 3.67에서 3.27로 낮춘 박찬호로서는 남아 있는 경기가 더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7. 첫 한국인 올스타가 되다(2001년 7월11일)
2001년 7월5일 새벽. 많은 한국 팬들은 초초하게 미국발 소식을 기다렸다. 전년도 리그 우승 팀 감독으로서 올스타 감독이 된 바비 발렌타인 메츠 감독이 투수와 후보 야수 명단을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평균자책점 5위, 탈삼진 4위였던 박찬호는, 결국 그렉 매덕스, 케리 우드, 웨이드 밀러 등의 경쟁자를 제치고 올스타로 선정됐다. 박찬호는 전반기를 .191의 피안타율로 끝냈는데, 이는 케리 우드(.211)에 앞선 리그 1위였으며, 아메리칸리그 1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194보다도 좋았다. 11일 시애틀 세이프코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 선발 랜디 존슨(2이닝 3K 무실점)에 이어 3회 두 번째 투수로 나선 박찬호는 첫 타자로 나선 칼 립켄 주니어를 상대로 엉성한 초구를 던졌다. 이는 담장을 넘었고, 올스타전 역사상 최고령 홈런을 기록한 립켄은 MVP가 됐다.
박찬호는 이후 이반 로드리게스(땅볼)-이치로(땅볼)-알렉스 로드리게스(삼진)를 모두 잡아내고 이닝을 끝냈지만, 결승점을 내줌으로써 패전투수가 됐다. 2001년 올스타전은 시즌 후 은퇴를 발표한 립켄과 토니 그윈을 위한 무대였다. 그리고 이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맞은 231개의 홈런 중 가장 훈훈한 홈런으로 기억됐다. 그렇다면 박찬호는 립켄에게 일부러 홈런을 맞은 것일까. 박찬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상대하게 된 타자가 립켄인 줄 몰랐으며, 패스트볼을 가볍게 던진다는 것이 실투가 된 것뿐이라고 밝혔다.
8. 본즈와의 정면 승부(2001년 10월6일)
2001년 9월,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타자 한 명을 피해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다. 당시 '야구의 신'으로 군림했던 본즈가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8호를 날린 후 집중견제를 당하며 7경기에서 15개의 볼넷을 얻어낸 본즈는, 10월5일 휴스턴전에서 70호를 때려내고 맥과이어와 타이를 이뤘다. 본즈에게 남은 경기는 다저스와의 마지막 3연전. 1차전 선발로 나선 박찬호는 놀랍게도 정면승부를 선택했다. 그러나 피칭을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1회말 두 번째 타자 리치 오릴리아를 상대하는 도중 허리 통증이 발생한 것. 박찬호는 그 해 경기 도중 세 번의 허리 통증을 느꼈는데, 이 통증이 가장 극심했다.
박찬호는 허리 통증 때문에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세트 포지션으로 던져야 했고, 1회 첫 대결(149km 패스트볼)과 2회 두 번째 대결(커브)에서 모두 홈런을 허용함으로써 본즈에게 홈런 신기록을 내줬다(71,72호). 마지막 등판을 3.29로 시작, 개인 최고 기록(3.27) 경신을 기대했던 박찬호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즌 마무리였다. 4이닝 8실점(7자책) 패전을 안은 박찬호는 결국 3.50으로 시즌을 끝냈다. 한편 다음날 휴식을 취한 본즈는 최종전에서 데니스 스프링거로부터 한 방을 더 때려내고 '73'이라는 전대미문의 숫자로 시즌을 끝냈다.
하필이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이 상대한 타자가 본즈였다는 것은 박찬호에게 불운했다. 박찬호는 본즈에게 가장 많은 8개의 홈런을 맞았으며(게레로-헬튼-플로이드-다이 4개) 가장 많은 타점(14)과 가장 많은 볼넷(15) 또한 허용했다. 한편 박찬호가 매번 본즈에게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1998년 박찬호는 17타석 연속 출루 도전에 나선 본즈를 삼진으로 잡아냄으로써 신기록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1998년까지 본즈를 상대로 17타수4안타(.236) 2홈런으로 선전했던 박찬호는, 그러나 이후로는 30타수9안타(.300) 6홈런에 그쳤다.

우승 확정의 순간. 36번은 그렉 매덕스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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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쉽게 놓친 네 번째 완봉승(2006년 5월6일)
2005년 트레이드 마감일. 박찬호의 고달펐던 텍사스 생활(68경기 22승23패 5.79)이 3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필 네빈과의 맞트레이드로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게 된 것. 이듬해 5번째 선발 경기에서, 박찬호는 마치 다저스 시절로 돌아간 모습을 보였다. 컵스 에이스 삼브라노(7이닝 10K 무실점)와의 맞대결에서 9이닝 4K 무실점(2안타 4볼넷)의 판정승을 거둔 것. 그러나 이날 샌디에이고 타자들은 박찬호에게 한 점도 지원해주지 못했다. 9회까지 121개를 던진 박찬호는, 결국 0-0 상황에서 10회 트레버 호프먼에게 마운드를 물려줘야만 했다(샌디에이고 11회 1-0 승리). 샌디에이고 투수가 9이닝을 2피안타 이하 무실점으로 막고도 승리투수가 되지 못한 것 팀 창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두 경기에서도 6이닝 무실점과 7이닝 1자책을 기록하며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오는 듯했던 박찬호는, 그러나 이후 설렘과 한숨을 번갈아가며 안겨줬다. 그리고 비운의 장파열로 시즌을 마감했다. 박찬호의 마지막 선발 시즌이었다(21선발 7승7패 4.81). 2007년 메이저리거로서 단 하루 마운드에 올랐던 박찬호는, 2008년 다저스 복귀와 함께 불펜투수로서의 메이저리거 인생 제 2막을 열었다. 그리고 2009년,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고 마침내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메이저리그에서 입은 마지막 유니폼 ⓒ 순(純)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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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4승, 마지막 승리(2010년 10월2일)
2010년 박찬호는 월드시리즈 우승 팀 양키스에 입단하고 아메리칸리그 재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박찬호의 구위는 1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양키스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박찬호는 결국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고 내셔널리그로 돌아왔다. 9월13일 통산 123승째 승리를 거두자 '노모와 아시아 투수 타이를 이뤘다'는 현지 보도가 소개됐다. 피츠버그 존 러셀 감독과 선수들도 박찬호에게 다음 승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됐다.
정규시즌 마감을 3일 앞둔 160번째 경기. 러셀 감독은 3-1로 앞선 5회, 선발투수(다니엘 매커친)를 내리고 박찬호를 올렸다.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박찬호도 온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리베라로부터 배웠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던 커터가 생애 최고의 움직임을 보인 그 날, 박찬호는 3이닝 6K 퍼펙트를 기록하고 승리투수가 됐다. 매커친을 비롯한 동료들의 축하 속에, 박찬호의 길었던 메이저리그 여정은 막을 내렸다. 도전과 좌절의 연속 속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개척자의 아름다운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