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2-03-30 09:38
ⓒ김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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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정규시즌 개막이 눈앞에 다가왔다. 올시즌 초반 가장 주목받을 선수를 한명만 꼽으라면 단연 한화 박찬호일 것이다. 한양대 재학중인 94년 미국으로 떠났고, 메이저리그 124승이란 관록을 쌓은 뒤 잠시 일본프로야구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한국 무대 등판을 기다려왔던 야구팬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마흔살이 된 박찬호에게서 전성기 시절 구위를 기대하긴 어렵다. 타자를 윽박지르던 라이징패스트볼은 더이상 없다. 하지만 풍부한 경험으로 축적된 다양한 구질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컷패스트볼이다. 직구처럼 날아가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살짝 꺾이는 컷패스트볼은 커터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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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패스트볼 그립이다. 얼핏 보면 포심패스트볼과 거의 차이가 없다. 간혹 이 그립에서 약간 비틀어 잡기도 하는데, 결국 컷패스트볼은 중지의 힘으로 얼마나 잘 찍어누르느냐가 관건이다. (사진 : 스포츠조선 김경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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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가 3월 중순 SK와의 시범경기에서 던질 때 컷패스트볼도 선보였다. 이 경기의 구심을 맡았던 KBO 이민호 심판원은 "커터가 괜찮았다. 카운트가 유리할 때 내야땅볼을 유도하기 좋은 구질로 보였다"고 평가했다.
박찬호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시절 제이미 모이어와 라이언 매드슨에게 커터 던지는 요령을 약간 배웠다. 그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 빅리그 최고 마무리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로부터 본격적으로 커터를 배웠다.
한국프로야구에서도 2000년대 들어와 간간이 커터를 던지는 투수가 있었다. 주로 용병들이었다. 나중엔 국내 투수들도 한두명씩 커터를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국내선수들에게 컷패스트볼은 주요 구질이라고 보기 어렵다.
선발로 뛸 것이 유력시되는 박찬호가 올해 한국프로야구에 연착륙한다면, 그 과정에서 컷패스트볼도 화제에 오를 것이다. 박찬호는 지난 겨울 "컷패스트볼에 자신감이 붙었다. 더 많이 연습해서 원하는 곳에 제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 컷패스트볼이 잘 구사된다면 체인지업이나 투심패스트볼의 위력이 커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새로운 선수의 등장은 이래서 늘 반갑다. 특히 그 선수가 기존에 잘 접할 수 없었던 '무기'를 갖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프로야구 개막을 맞아, 박찬호의 컷패스트볼 이전에 한국프로야구에선 어떤 구질이 '지배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는지를 되짚어보자.
▶ '딸꾹질하는 나비'와 박철순의 팜볼
얼마전 보스턴의 베테랑투수 팀 웨이크필드가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던지는 시속 100㎞대의 너클볼은 매력적이었다. 구속만 놓고 보면 '사회인 야구' 수준. 하지만 너풀너풀 날아오며 타자에게 참을 수 없는 스윙의 유혹을 느끼게 하는 너클볼로 웨이크필드는 한시대를 풍미했다.
▶팀 웨이크 필드의 투구 장면 (영상 제공 : mlbkorea.com)
7년전 보스턴의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 스프링캠프에서 웨이크필드의 불펜 피칭을 포수 뒤에서 지켜보는 기회를 얻었다. 그곳 불펜피칭장은 포수들의 등 뒤에 백스톱이 설치돼있고 그 뒤쪽은 공터였다. 구단 관계자나 취재진이 포수의 등 뒤 3~4m 거리에 서서 관찰할 수 있는 구조였다.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이 왜 대단한지를 체험할 수 있었다. 느릿느릿했지만, 공이 세밀하게 좌우로 흔들리면서 날아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포수는 급하게 움직여야 했다. 너클볼과 관련해 '나비가 딸꾹질을 하며 날아온다'는 표현이 있는데, 과장이 심한 표현이긴 하지만 왜 그렇게 인식되는지를 그날 포트마이어스에서 느낄 수 있었다. 너클볼을 흉내내는 투수들은 많아도 그걸 자유자재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희귀하다. 많은 팬들이 현역 최고 너클볼러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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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프로야구 OB베어스 박철순 선발투수 투구 대전구장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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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원년인 82년, 미국 마이너리그 경력을 갖고 있던 박철순이 36경기에서 15차례 완투를 기록하며 24승4패, 7세이브, 방어율 1.84를 기록했다. 프로 원년의 최고 스타였다.
당시 박철순이 너클볼 비슷한 변화구를 던졌다. 회전이 많지 않은 공이 타자 앞에서 뚝 떨어졌다. 그 시절엔 그걸 너클볼이라고 여겼던 관계자들이 많다. 훗날 박철순 본인이 밝혔듯, 그가 던진 공은 너클볼이 아니라 팜볼이었다. 체인지업 계열이라고 보는 게 맞다.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은 손끝으로 공을 찍어서 밀어던지는 구질이다. 팜볼은 손바닥으로 공을 감싸듯 쥔다. 실밥을 제대로 채는 구질이 아니라는 점에선 너클볼과 비슷할 것이다. 지난달 KIA 윤석민이 전훈캠프에서 팜볼을 두차례 정도 테스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됐는데, 올해 실전에서 보여주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팜볼 역시 재미삼아 던질 수 있는 구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철순이 당시 리그를 평정했던 건 단순히 팜볼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팜볼을 상당히 자유롭게 제구할 수 있었다는 게 더 근본적인 이유다. 프로 초창기의 프로야구 타자들에겐 박철순의 팜볼 역시 '나비가 맹렬히 날아오다 갑자기 푹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을 지 모른다. 잘 접하지 못했던 구질이 갖는 힘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선 본격적인 의미의 너클볼러는 없었다. 간혹 섞어던지는 케이스만 있었을 뿐이다. 박철순 이후 팜볼을 주무기로 사용한 투수도 없었다는 게 야구인들의 기억이다.
▶최동원의 커브, 선동열의 슬라이더
메이저리그나 한국프로야구나 마찬가지다. 80년대까지는 정통적인 구질이 인기를 모았다. 국내에선 프로 초창기에 최동원의 '폭포수 커브'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연말 개봉됐던 야구영화 '퍼펙트게임'을 보면, 최동원의 커브를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해 궤적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실은 영화에서의 궤적보다 실제 꺾이는 각이 더 컸다. 최동원의 커브는 릴리스 직후 약간 위로 솟구쳐다가 타자 앞에서 훅 가라앉는 듯한 궤적을 그린다. 그의 커브를 상대했던 당대의 타자들은 "머리쪽으로 공이 날아오는 것 같아 움츠러드는 순간, 뚝 떨어지며 포수 미트에 꽂힌다"고 말한다.
▶최동원의 투구 장면
커브의 각이 크다는 건 타자들의 중심을 무너뜨리는데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높은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가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 중심이 덜컥덜컥 움직이게 된다. 중심이 흐트러지면 배트 컨트롤도 어려워진다. 골프선수가 티샷할 때 어떻게든 헤드업을 막으려는 것도 중심과 관련된 문제다.
요즘 프로야구에선 삼성 윤성환이 좋은 커브를 던지는데, 최동원의 커브와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성환이 컨디션이 좋은 날 그가 커브를 던지면, 타자들이 움찔움찔 중심이 흔들리는 걸 목격할 수 있다. 만약 윤성환이 시속 150㎞짜리 포심패스트볼도 갖춘 투수였다면 최동원 못지 않은 투수가 됐을 거라는 평가도 있다. 물론 "그래서 신은 공평하다"고 농담하는 코치들도 있다. 삼성 오승환에게 더 긴 손가락과 변화구 감각까지 주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배적 구질'을 언급할 때 과거 다관왕을 수시로 차지했던 선동열의 슬라이더를 빼놓을 순 없다. 시속 140㎞대 후반의 묵직한 직구와 짝을 이룬 그의 슬라이더는 '잠자리처럼 사라지는' 구질이었다고 한다. 바로 앞에 잠자리가 하늘하늘 떠있을 때는 눈에 잘 보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휙 하고 방향을 꺾으면 어디로 갔는 지 알 길이 없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막판의 너풀대며 달아나는 변화가 큰 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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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대를 풍미했던 선동열 감독의 슬라이더 그립(사진 : 스포츠조선 조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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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의 슬라이더가 더욱 위력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이기적인 투구폼'과도 연관이 있다. 옛 선배기자들의 비유에 따르면, 투수 선동열은 낙지 같은 투구폼을 갖고 있었다. 테이크백이 이뤄진 뒤 스트라이드를 하면서 전체적으로 몸이 납작해진다. 던지는 오른쪽 팔을 쭉 뻗으면, 다른 투수들에 비해 더 낮은 곳에서 릴리스가 이뤄진다. 낮게 출발한 공이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낮은 코스로 꽂히고, 때론 약간 솟구친 듯하다 가라앉으며 옆으로 휙 달아나니 타자들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퍼펙트게임'에서 영화배우 조승우는 헤어스타일과 안경, 그리고 다소 딱딱해보이는 투구폼을 통해 최동원의 피칭 스타일을 어느 정도 흉내냈다. 하지만 양동근은 선동열의 실제 투구폼과 거리가 있었다. 선동열의 투구폼은 지금 현역 투수들이 따라하기에도 힘들다고 한다. 그만큼 유연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라 해도 단시일에 흉내낼 수 없는 폼이다.
최근 시범경기때 광주에서 선동열 감독을 만났다. 선 감독은 영화 얘기가 나오자 "양동근이 그 영화 찍고 나서 야구 영화는 힘들어서 앞으로 안 하겠다고 했다더라. 피칭 동작을 배우기 위해 훈련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외국인타자 등장과 떨어지는 변화구의 필요성
현역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기억으로는, 투수 선동열은 몸쪽 공을 잘 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전에 선동열 감독에게 그 이유를 묻자 "혹시 몸에라도 맞히면 크게 다칠 것 같아서"라는 답변이 나왔다. 물론 진담반 농담반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굳이 몸쪽 공까지 던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가운데 직구를 뿌리고, 슬라이더만 섞어도 워낙 공에 위력이 있으니 타자들이 제대로 못맞혔다.
만약 투수 선동열이 지금 시점에 뛰었다면 성적이 어떻게 바뀌었을 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총 367경기에서 1647이닝을 던지는 동안 탈삼진 1698개, 피홈런 28개, 완투 68차례, 완봉 29차례, 통산 방어율 1.20의 기록을 남겼다. 과거 시절이라 해도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런 선동열도 96년 일본에 진출한 뒤 타자 앞에서 떨어지는 구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일본 타자들이 상대적으로 정교했기 때문이다. 그후 이것저것 던져보다 '싱커성 포크볼'을 장착했다. 선동열 감독은 "손가락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포크볼을 잘 던질 수 없었다. 일본에서 첫해에 실패한 뒤 노력 끝에 슬라이더를 더 다듬었고 싱커성 포크볼을 연마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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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감독이 2006년 삼성 시절 보여준 싱커성 포크볼 그립. 기존의 슬라이더만으로는 일본 주니치에서 어려움을 겪자 이런저런 시도 끝에 장착한 구질이라고 했다.(사진 : 스포츠조선 조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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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이 일본에서 떨어지는 구질의 필요성을 느낀 뒤 얼마 안가 한국프로야구에도 변화가 생겼다. 98년에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됐다. 큰 변수가 됐다. 타이론 우즈 같은 거포 용병들을 떠올려보자. 잠실구장의 우중간 펜스 뒤에는 '우즈 홈런존'이 있었다. 힘이 좋고 팔도 긴 우즈가 바깥쪽 공도 '미는 게 아니라 때려서' 우중월 홈런을 양산했다. 투수들이 용병 타자들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이젠 외곽 제구력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미 일본프로야구에선 오래전부터 직구처럼 오다가 뚝 떨어지는 포크볼이 좋은 투수의 필수 구질이었다. 한일 슈퍼게임 혹은 각종 국제대회를 통해 일본 투수들과 상대해본 국내 타자들도 포크볼의 위력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다.
98년에 투수 이광우가 검지와 중지 사이를 약 1㎝ 찢는 수술을 받아 화제가 됐다. 투수치고 손이 작았던 이광우는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공을 깊고 강하게 쥘 수 있도록 수술을 택했다. 실제 이광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다.
▶ 왜 너도나도 체인지업인가
노모 히데오의 성공적인 빅리그 진출, 사사키 가즈히로의 빅리그 마무리계 접수 등, 포크볼을 잘 던지는 일본인투수들의 활약상이 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그러나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대한 필요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프로야구는 포크볼을 실전 구질로 채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포크볼에 대한 이미지가 한-일 양국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너무 일찍 포크볼을 배우면 팔꿈치가 상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투수가 엄청난 팔스윙을 하면서도 버텨내는 건 마지막 순간에 실밥을 채면서 힘을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크볼은 실밥을 채지 않는 구질이다. 잘못 던지면 팔꿈치에 부하가 걸린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프로야구 지도자들은 "제대로 된 폼으로만 던지면 포크볼 많이 던져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견해를 보인다. 한국 야구는 한계투구수를 중시하는 미국 야구에 이론적으로 가까워졌다. 반면 일본에선 "투수가 밸런스만 유지할 수 있다면 200~300개씩 던져도 탈이 없다"는 쪽이다. 포크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는 이유다. 또한 한국프로야구에는 포크볼 요령을 제대로 배울만한 지도자, 혹은 지도 패턴이 드물었다.
그후 본격적인 포크볼 보다는 한국에선 스플리터가 애용되기 시작했다. 본래 포크볼이 크게 보면 스플리터의 일종이다. 하지만 요즘 언급되는 스플리터는 포크볼보다 손가락을 덜 벌려 잡고 던지는 구질을 의미한다. 반포크볼이라 볼 수 있다. 반포크볼을 미국에선 주로 스플릿핑거패스트볼(split-finger fastball)이라 부르고 우리나라에선 스플리터라고 표현한다. 포크볼에 비하면 낙폭이 작지만 더 빠르다.
이같은 배경 속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프로야구에서 최고 인기를 얻은 변화구는 단연 체인지업이다. 4년여전 야구대표팀의 전훈캠프에 참가했던 박찬호로부터 체인지업과 커브의 릴리스포인트 차이를 설명들은 적이 있다. 그는 "커브를 던질 때와 달리 체인지업은 직구와 똑같은 릴리스포인트에서 던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과 함께 커브를 던지는 시늉을 했는데 체인지업에 비해 약간 바깥쪽에서 손짓이 이뤄졌다. 커브는 자칫 타자에게 '신호'를 줄 수 있지만, 체인지업은 제대로 던지면 투구폼 자체로는 타자에게 읽히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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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류현진의 서클체인지업그립. 왼손투수 류현진이 던지면 오른손타자의 바깥쪽으로 약간 휘며 떨어진다. 헛스윙을 이끌어내기 좋은 구질이다.(사진 : 스포츠조선 전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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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업의 본래 뜻은 구속 변화다. 구속 변화를 통해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직구와 똑같은 폼으로 던지지만 대신 떨어지는 변화구로 의미가 고정됐다. 체인지업의 그립은 투수마다 조금씩 다르다. 과거 손민한처럼 반포크볼 비슷하게 잡거나 현대에서 뛴 용병 미키 캘러웨이처럼 너클볼 비슷한 그립으로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쥐는 서클체인지업이 대세다. 과거 구대성도 팔이 숨겨져나오는 독특한 투구폼으로 체인지업을 잘 던졌다. 최근에는 한화 류현진, SK 정우람 등을 포함해 좋은 투수들이 역회전성인 서클체인지업을 많이 던진다. 오른손투수가 왼손타자를 상대로 좋은 서클체인지업을 던지면, 바깥쪽으로 약간 휘면서 낮게 떨어지는 궤적을 보인다.
최근 삼성 류중일 감독을 목동구장에서 만났다. 류 감독은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왜 프로야구를 하지 않는지 이유를 아는가? 신사들이 하기엔, 야구가 너무 상대를 속이는데 열중하는 스포츠라서 그렇다더라"고 말하며 웃었다. 직구를 던지는 척 하면서 변화구를 던지고, 타격을 하는 척 하다가 기습번트를 대는 게 야구다.
류중일 감독의 농담과 체인지업의 특성이 잘 연관된다. 포심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같은 폼, 같은 릴리스포인트에서 던질 수 있는 구질이다. 타자를 속이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체인지업은 슬라이더, 포크볼과 달리 어깨와 팔꿈치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는 강점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체인지업을 2000년대 이후 최고 인기 구질로 끌어올린 이유일 것이다. 물론 대전제가 있다. 좋은 직구를 갖춘 투수라야, 체인지업도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 투수에게 최고의 친구는 역시 직구다
▶오승환의 투구 장면
삼성 김태한 투수코치는 지난해 마무리투수 오승환의 구위 회복을 설명하면서 "프로야구에는 다양한 구질이 있다. 투수마다 선호하는 변화구도 다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게 있다. 투수에게 최고의 친구는 역시 직구다. 빠르고 힘있는 직구를 갖고 있는 투수가 제구가 되는 좋은 변화구를 던질 때 돋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승환의 강력한 포심패스트볼과 보통 투수들의 변화구를 놓고 "어느 쪽이 더 치기 힘든 마구 같은가"라고 질문하면 답은 뻔하다는 얘기다.
지난 10여년간 메이저리그에서 '체인지업의 대가'로 이름났던 투수들을 떠올려보자. 페드로 마르티네스, 요한 산타나, 트레버 호프먼, 에릭 가니에, 제이미 모이어, 그렉 매덕스 등 여러 선수가 있다. 가만히 보면 체인지업만 잘 던지는 투수들이 아니다. 좋은 직구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직구 스피드가 떨어져도 제구력이 좋은 투수들이다.
빌리 와그너의 100마일짜리 포심패스트볼,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 배리 지토의 커브, 트레버 호프먼의 체인지업에 그렉 매덕스의 제구력을 모두 갖춘 투수는 현실에선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엔 투수코치들이 구질과 구위를 언급할 때 궁극적으론 직구가 어느 정도 힘이 있느냐를 중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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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박찬호가 지난해 오릭스 전훈캠프에서 장난삼아 너클볼을 던져보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박찬호가 실전에서 너클볼을 던질 일은 없다. 박찬호의 너클볼 그립을 유심히 살펴보면 최근 은퇴한 너클볼의 대가 팀 웨이크필드와는 달리 공을 손끝으로 완전히 찍어 잡지는 않은 점을 볼 수 있다. (사진 : 스포츠조선 조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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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박찬호의 컷패스트볼로 돌아가보자. 이민호 심판원은 "볼카운트가 유리할 때 땅볼 유도에 좋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컷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엔 그에 앞서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려면 힘있는 직구가 필요하다. 때론 포수 미트만 보고 한가운데 높게 넣어도 타자가 파울에 그칠 수 있는 포심패스트볼이 필요하다.
결국엔 정규시즌에 들어가서 직구 위력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박찬호의 피칭 내용이 결정될 것이다. 시범경기에선 최고 146~147㎞까지 직구 구속이 나왔지만, 평균적으로는 145㎞를 넘지 못하고 있다. 구속도 구속이지만, 아직은 위력적인 공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마흔살이 된 박찬호가 140㎞대 중반의 공을 여전히 던진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조금 더 나은 직구를 선보이게 된다면, 그가 갖고 있는 컷패스트볼도 각광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많은 팬들이 박찬호의 컷패스트볼을 보다 자주 볼 수 있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글|김남형 기자(스포츠조선)
▶보너스 영상 '박찬호의 투구법 강의' (영상 : 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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