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일 목요일

[매거진S] 박찬호, 긍정의 힘으로 야구를 되찾다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 S]
기사입력 2009-12-03 17:34
ⓒ민훈기


긍정의 힘으로 월드시리즈에 서다 'Chanho, He's OK!'
2009시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두 명의 한국인이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는 떠오르는 외야수 스타 추신수(28)가 빼어난 활약으로 밝은 미래를 기약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는 만 서른여섯의 노장 박찬호가 구원 투수로 변신해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메이저리그의 중앙 무대에 다시 섰습니다.
민기자닷컴은 시즌 종반의 부상을 딛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과 꿈의 무대인 월드시리즈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 박찬호를 2009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박찬호가 걸어온 길은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LA 다저스에서 스타덤에 오른 후 텍사스로 이적하면서 부와 명예를 차지했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전 빅리그의 아무 팀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불명예 은퇴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스프링 캠프에 겨우 합류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친정팀 다저스로 복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더니 올해는 필리스에서 필승조 구원 투수로 확실하게 재기했습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일시 귀국한 박찬호는 기자회견에서 'It's OK!'라는 재기의 발판이 된 긍정적인 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이 과연 15년 넘게 멀고 험한 길을 헤쳐 온 박찬호의 힘이 되었는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신사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샌디에이고 전격 트레이드 상황과 악플러에 대한 생각, 국내 야구 진출을 생각했던 2008년 초 상황, 그리고 그가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긍정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박찬호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어려울 때마다 'It's OK!'라는 생각으로 이겨냈다는 말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어떤 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너무 많이 져봤기 때문에, 너무 많이 실패해봤기 때문에 또 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힘들어도 해낼 수 있고 실패해도 괜찮은 이유를 만든다. 'It's OK, 괜찮아, 문제없어'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쉬워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이 보이지 않다가도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용기 내려는 의지력이 강해지고, 짧든 길든 길이 보이게 된다.
미국 야구에 도전하면서 많은 좌절이 있었을텐데. 첫 번째 시련은 언제였나.
처음 마이너리그로 갔을 때다. 처음엔 크게 아프지 않았다, 뭐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진짜 좌절을 마이너로 가서 겪었다. 잠깐 있었던 빅리그에서 받았던 대우나 인정이나 보호, 그런 것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차별과 다툼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지독히 냉정했고 위로도 전혀 없었고 좌절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서두르고 빨리 잘하려고 했지만 정신적 문화적 장애가 아주 컸다. 육체적으로도 경기를 하려고 이동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처음에 나는 내 능력이 대단해서 메이저리그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착각했다가 나는 그저 일개 대학 다니던 초라한 선수에 불과하구나 하고 느꼈다. 착각이었고 실망했고 부끄러웠다.
포기할 생각도 했었는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나.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당시는 (구단주)피터 오말리씨가 나를 지켜주었다. 매주 내게 편지를 했고 통역과는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면서 포기하면 안 된다고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셨다. 어려서부터 어렵게 운동을 했는데 형제들을 차별하면서까지 나를 늘 지지하고 지원해 주셨다. 그것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저스에서 큰 성공을 했지만 텍사스에서는 참 힘들었다. 텍사스 시절을 내내 곁에서 지켜봤는데 (내색은 잘 하지 않았지만)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말 많은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 힘든 것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참 많았다. 인간적인 삶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늘 최고라는 우쭐함이나 나 자신만을 보호하려는 그런 생활을 연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더 부드러워지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삶의 진실한 의미는 최고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런 좌절에서 가르쳐주는 것 같다.
그 어려움을 이겨낸 힘은 무엇이었나.
노력의 시간들이었다. 역경, 시련, 고통, 아픔.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겪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들 단어는 부정적이지만 의미는 더 큰 진실함과 강함과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생각하고 명상하고 책을 보면서 나의 의지와 뜻과 현실을 비교해봤다.
그리고 야구를 보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야구는 매 회마다 우여곡절이 있다. 인생과 마찬가지다. 혼자 할 수 없으니 더불어 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기고 싶다는 목표는 있지만 어떻게 해 나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대량 실점을 소량 실점으로 막는다든지 위기를 침착하게 넘긴다든지 그런 마음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당시 원형탈모증이 생길 정도였는데.
다저스 시절 모든 국민이 나의 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텍사스로 가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존심은 뭉개지고 존재가치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악플러들. 정말 수많은 악플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나 대신 싸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수십 개의 악플 중에도 한두 개의 선플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해 주고 지원해주던 그분들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다시 재기하고 좋아지니까 악플러들도 바뀌더라. 나를 괴롭혔던 요인들, 야유하는 팬들, 기사를 나쁘게 쓴 기자들, 그러나 그 자체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시련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꼭 재기해서 저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자극제가 됐다.  
텍사스에서의 부진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이유라면.
우선 (재활이)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 감독의 차별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인권이 완전히 묵살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준비가 됐다고 하면 마이너에 내버려뒀고, 몸이 안 좋을 때는 던지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꿨다. 오죽 내게 자신감이 없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난 개인적인 생각만 하지만 저 사람은 팀을 생각하니까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죽고 눈치 볼 것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트레이닝실로 가려면 감독방을 지나야 하는데 처음엔 그를 피해 다녔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매일 내가 먼저 가서 인사를 하고 농담을 건네고 했다. 깜짝 놀라더라. 계속 그렇게 하니까 자신감이 생겼고, 나를 다르게 보고 쉽게 대하지 못했다.
'약하면 계속 당할 수 밖에 없다. 강해져야 하고 대담해야 하고 그리고 지식과 지혜가 풍부해야 한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면서 몸도 다시 좋아졌다. 2005년에는 다시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당시 텍사스에서 20경기 선발에 8승5패를 기록하다가 트레이드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된 상황은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나.
나도 전혀 몰랐었다. 트레이드 당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토론토전에서 등판 준비를 하는데 경기 45분 전에 갑자기 던지지 말라는 통고를 받았다. 나는 그 경기는 던져야 한다고 실랑이를 했다. 전날 한인 타운에서 교민들도 많이 만났고, 그날 경기장에서 많은 한국분들이 오셨다. 그리고 당시 몸도 많이 좋아졌고 정말 잘 던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걱정도 됐다, 혹시 트레이드가 깨지면 어쩌나 하고.(웃음) 그러나 텍사스는 나를 없애버릴 절호의 기회였고, 샌디에이고도 (거액 연봉의)필 네빈을 내보낼 절호의 기회였다. 실랑이를 하다가 시간이 흘렀고 결국 등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짐을 싸고 호텔로 갔다. 속으론 후련했다.
2006년 여름 장출혈과 수술도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는데.
처음 출혈이 있었는데 부위를 찾지 못했고 피가 멈춘 후 수혈을 받으니 몸이 갑자기 좋아져 또 두 경기를 던졌다. 두 번째 출혈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증상은 오히려 덜했는데 검사를 해보니 장에 난 구멍도 의사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출혈도 아주 많았다. 피의 3분의 1 이상이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곧바로 장의 구멍 난 부위를 절제하고 접합하는 큰 수술을 했다. 당시 10명의 피를 수혈받았는데 작년인가 검사를 해보니 여러 명의 피가 섞이다 보니 많이 탁해져서 약도 먹고 식이 요법 등으로 힘들게 피를 다시 맑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8월에 수술을 받고 42일 만에 복귀해 경기에서 던졌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었나.
처음엔 1주일 동안 걷지도 못했을 정도로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요해서 복귀한 것은 아니었다. 아예 필요성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거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듯이 나는 야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해보니 회복이 빨랐고, 그래서 결국 정규 시즌 막판에 복귀했다. 그래서 첫 포스트 시즌 등판도 이루어지지 않았나.
2년 반 전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 애리조나에서 만난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라도 야구를 계속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느냐고 반문했었는데. 포기할 생각은 정말 없었나.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그만둬야할지 계속 심각하게 생각했고 마음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낸다면 더한 역경과 그리움과 아쉬움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계속 도전을 하면 적어도 끝은 아니지 않은가. 포기하는 순간 내가 목표로 정했던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도전을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배수의 진이 있었다.
배수의 진이라니.
만약 그 시즌을 그렇게 보내고도 다음 시즌(2008년)에도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야구는 나를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2008년 초 다저스에서 기회를 주었는데.
일본에서 WBC 훈련을 하고 있는데 다저스에서 연락이 왔다. 초청선수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길은 생겼다 싶었다. 몸만 안 아프면 잘해낼 자신은 있었다.
그럼 2008년 스프링 캠프에서 잘 안됐더라면 국내 팬들이 일찍 박찬호가 한국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겠다.(웃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약간 두려워진다. 우리 타자들이 너무 잘해서 망신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웃음) 한국 야구에서 반드시 뛰고 싶다. 잘 던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경기를 던지더라도 보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프로팀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는 것이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다. 그리고 한국 야구 흥행에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정인가.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은 메이저리그에서 더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다.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계속 도전을 한다는 말인가.
이젠 10승을 하려고 도전하고 사이영상을 타려고 도전하고 그리고 그저 야구를 계속하려고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홈런 타자들은 갑자기 파워가 떨어지면 안타로 버텨갈 수는 없지만 투수는 힘이 떨어져도 컨트롤과 제구력으로 이어갈 수 있다. 아직은 충분히 해낼 수 있기에 도전을 멈출 수는 없다.
강속구 투수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자신도 원래 힘을 앞세운 투수이지 제구력이 아주 뛰어난 투수는 아니었지 않은가.
내게도 분명 약점이 있다. 그러나 텍사스 시절 슬럼프와 부상으로 힘이 떨어졌을 때 제구력과 정교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연구를 했다. 예전에 클레멘스와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대단한 강속구 투수였지만 그보다도 정교함과 제구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투수가 됐다. 나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부족함은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It's OK'라고 생각했다. 그 길었던 힘든 시간 속에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그런데 제구도 좋아진데다 오히려 구속이 살아나면서 더 효과적인 투수가 된 것 같다. 구속 회복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는 구원 투수로 더 효과적인 피칭을 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
다시 200이닝을 던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즘은 200이닝 던지는 투수 자체가 드물다. 그리고 구원 투수도 매력이 있다. 작년에 다저스에서도 많이 배웠고, 올해 필리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또 많이 배웠다.
구속을 다시 찾은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이창호 개인 트레이너에게 제대로 된 운동법을 배워 몇 년째 하고 있고, 스트레칭도 하루 세 번씩 빠지지 않고 한다. 턱관절 교정도 많았고 음식 조절도 집사람이 세심하게 해준다. 부상에서 완쾌된 것도 중요하고 장 수술 후 꾸준한 운동으로 필요한 근육도 많이 키웠다.
메이저리그에서 마흔까지 뛰고 싶다는 목표는 아직도 그대로인가. 지도자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2~3년 더 던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지도자는 어쩌면 내 삶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자기의 길을 가르쳐주면 안 되고 야구면 야구, 축구면 축구를 가르쳐줘야 한다. 모두가 나처럼 될 수는 없다. 더 잘 될 수도 있고, 더 안 될 수도 있다. 명예나 부가 아니라 걸어온 길, 야구의 방법 그런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야구 장학금 등 자신도 그렇고 미국의 선수들은 사회봉사나 기부 등을 아주 활발히 한다. 우리도 점점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것 같다. 그 점에 대한 견해를 말해 달라.
아직 우리는 문화적인 구조가 확실히 돼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려서부터 그저 쓰던 것을 물려주는 정도를 배웠다. 야구장학금은 97년에 시작했으니 13년째 하고 있는데 장학생이 400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처음에 (김)병현이와 (김)태균이도 장학생이었다는 말을 들으니 흐뭇했다. 프로 선수 중에도 꽤 있는 것 같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기부를 한다는 것은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는 후배와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 자신은 결국 나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남이 해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나아가길 바란다. 착각, 질투, 콤플렉스 그런 모든 부정적인 요인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삶이 남에게 어떻게 보여 지느냐 때문에 노력한다면 항상 불안정할 수 있다. 그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늘 팬에게 크게 감사하고 부모, 선생님, 아내, 가족 모두를 사랑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내가 공을 던지는 순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내가 던지고 싶은 곳에 던지기 위해서만 던진다. 또 그 다음 공도 마찬가지다.
긴 시간 감사한다. 그런데 아직 내년에 뛸 팀에 대한 소식은 없는지.
즐거웠다. 아직은 팀 소식이 없다. 필리스가 되든 다른 팀이 되든지 편안하게 잘 던질 수 있는 팀을 선택하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승리할 수 있는 팀,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는 팀을 신중하게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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