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2-03-16 16:54
ⓒ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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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30).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다. 부산에서 그는 ‘야구 대통령’으로 불렸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플레이 또한 뛰어났다. 그는 마치 스릴러 영화와 같았다.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반응하게 만들었다. 그가 타석에 서면 관중은 손에 땀을 쥐었고, 상대 투수의 동공은 흔들렸다. 그런 그의 야구를 국내 야구팬들은 10년 동안 즐겼다. 그리고 이제. 이대호는 한국에 없다. 그의 전설은 일본에서 다시 시작된다. <스포츠춘추>가 일본 오사카에서 이대호를 취재했다.
상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요미우리라….’ 기분이 묘했다. 일본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내렸을 때 기자 앞에 보인 건 오릭스 버펄로스와 요미우리의 시범경기를 알리는 광고판이었다. 요미우리는 과거 이승엽(삼성)이 뛰던 팀이다. 2006년 이승엽이 41홈런을 기록할 때 요미우리는 웬만한 국내 팀의 인기를 능가했다.
재미난 예가 있다. 삼성 주전포수 진갑용이 그즈음 대구의 한 슈퍼마켓에 들렸다. 가게 주인은 삼성 대신 요미우리 경기를 보고 있었다.
진갑용은 막막한 감정을 느꼈다. 연고지 팀의 경기 대신 일본 팀의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니. 실제로 당시 요미우리 경기의 시청률은 국내 프로팀들보다 높았다. 야구계 일부에선 “요미우리가 국내 프로야구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이젠 오릭스일지 모른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이대호는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국외 행을 선택했다. 2년에 7억 엔을 안긴 오릭스가 그가 선택한 새로운 둥지였다.
이젠 오릭스일지 모른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이대호는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국외 행을 선택했다. 2년에 7억 엔을 안긴 오릭스가 그가 선택한 새로운 둥지였다.
2년 7억 엔이면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계약금을 제외한 올 시즌 이대호의 연봉 2억5천만 엔은 지난해 기준으로 따지면 NPB(일본야구기구) 전체 21위이자 퍼시픽리그 타자 가운덴 3번째로 높은 금액이다. 기존 오릭스 최고연봉자이자 에이스인 가네코 치히로보다 9천만 엔이나 많다. 그가 롯데에서 받던 금액과 비교하면? 돈 이야기는 그만하자.
교세라돔에 도착했다. 날씨가 쌀쌀하다. 대기도 쌀뜬 물처럼 뿌옇다. 그런데도 구장 입구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시범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비시즌 동안 야구에 목마른 야구팬이 존재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자로 잰 듯 똑같다. 오릭스 구단 직원의 안내를 받아 구장 지하로 내려갔다. 프레스 카드를 발급받고, 그라운드로 나갔다. 눈앞에 등번호 25번의 선수가 보였다. 바로.
이대호였다.
“시범경기는 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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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라돔 라커룸 앞에 붙여진 오릭스의 올 시즌 포스터. 사진 오른쪽 뒤에 이대호가 보인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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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방송의 다노 가즈히로 캐스터는 오사카에서 인기가 높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다. 기자를 능가하는 취재력 때문이다. 그는 중계 시작 전까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밀착 취재한다. 그 가운데 요즘 그가 집중 관찰하는 선수가 있다.
“이대호다. 왜냐고? 올 시즌 오릭스의 운명이 그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다노 캐스터는 일본 미야코지마 스프링캠프 때부터 이대호를 관찰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명했다. “이대호는 일본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선수”라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스윙이 매우 부드럽다. 야구선수가 아니라 발레리나가 스윙하는 것 같다. 저렇듯 부드러운 스윙은 어느 코스의 어떤 변화구도 때리는 강점이 있다. 거기다 파워도 인상적이다. 스프링캠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오사카에 와서 스윙하는 걸 보면 역시 강타자답다. 프리배팅 때 담장을 시원시원하게 넘긴다. 오릭스에서 꼭 필요한 타자가 될 거다.”
부드러운 스윙은 공감이었다. 이대호의 스윙은 롯데에 있을 때도 칼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자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어떤 코스에 공이 와도 배트를 테니스 라켓마냥 쉽게 휘둘러 안타를 뽑아냈다. 파워가 좋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선 아니었다. 이대호는 스프링캠프에서 파워 스윙보단 정교한 스윙으로 일관했다. 일본 투수들의 제구를 파악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이대호가 배팅케이지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프리배팅의 시작이었다. 홈 플레이트 근처에 설치된 두 개의 배팅케이지 가운데 이대호가 들어선 건 우투수 상대용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타격훈련도 실전처럼 한다. 배팅볼 투수부터 다르다. 한국은 타격코치, 전력분석원, 구단 매니저 심지어는 프런트가 배팅볼을 던진다. 당연히 구속이 느리다. 그래도 상관없다. 정확히 공을 던지면 그만이다. 타자들도 타격훈련을 ‘컨디션을 확인하고, 몸을 푸는 정도’로 생각한다. 타격훈련 때 공이 담장 밖으로 나가면 신이 나고, 아니면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나’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구단마다 배팅볼 전문 투수들이 있다. 배팅볼 투수는 빠른 공과 변화구를 섞어가며 실전처럼 던진다. 제구도 정확하다. 포수 역시 장비를 갖춘 채 타자 뒤에 앉아 있다.
요미우리의 최선참 불펜포수는 한국인이다. 과거 쌍방울에서 뛰었던 유환진(39)이다. 2000년부터 올 시즌까지 13년 동안 요미우리에서 불펜포수를 맡고 있다. 그만큼 일본 프로야구를 잘 아는 이도 없다.
“여기 일본에서 배팅볼을 대충 던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타자 출신 배팅볼 투수도 거의 없다. 투수 출신과 타자 출신의 공끝과 투구 궤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타자들이 정확한 타격감각을 유지하려면 확실히 투수 출신 배팅볼 투수가 던져야 한다. 포수가 앉아 있는 것 역시 타자들의 실전 감각 유지 차원이다. 타자들은 타격훈련 중에도 포수에게 ‘이 정도면 볼인가, 스트라이크인가’ 묻는다. 스트라이크 존은 포수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구단의 대우도 좋다. 요미우리 배팅볼 투수 가운데 연봉 1천만 엔(약 1억3천만 원) 이상이 4, 5명이나 된다. 불펜포수 연봉도 꽤 높다. 구단에서 이들의 가치와 필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우리 팀에도 좌·우완 배팅볼 전문투수가 5명씩 있다”고 말했다.
“딱!” 경쾌한 타구음이 구장 전체에 울렸다. 이대호의 타구가 우측 담장을 훌쩍 넘겼다. 다음 타구도 마찬가지였다. 스프링캠프와는 차원이 다른 비거리였다. 잠시 후, 이대호는 좌투수 상대용 배팅케이지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이대호의 타구는 외야 깊숙이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이대호가 장타를 염두한 스윙을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랬다. 이대호는 “요즘 계속 공을 띄우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프링캠프 때는 일단 방망이에 맞추는 연습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공을 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큰 타구를 날리려고 노력 중이다.”
일부에선 스프링캠프 때의 이대호를 보고 “일부러 장타를 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일본 스트라이크 존과 투수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첨언이 따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타격 정확성에만 치중하면 정규 시즌에서 장타를 때리기 힘들고, 투수들에게 위압감도 줄 수 없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과연 이대호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했다.
“스프링캠프에선 (장타를) 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공을 배트 중심에 맞추고, 일본 투수들의 공을 많이 보는 게 중요했다. 경험을 쌓고, 적응해야 하니까.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풀스윙을 시험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배트 스피드가 얼마나 나오는지도 확인하고 있다.”
이대호는 2할대 초반의 타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스윙을 연습하는 기간이라, 지금은 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분석했다.
사실이었다. 이대호는 자신이 설정한 단계에 따라 차분히 타격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오릭스 코칭스태프도 이대호의 생각을 존중하고 있다. 이대호의 큰 타구를 바라보는 오릭스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대호 “위협구? 가만 있지 않는다!”
이대호 “위협구? 가만 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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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 배팅 이후 공을 줍는 이대호.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고연봉답지 않게 겸손하고 성실한 선수"로 통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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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팀과 훈련 시간은 비슷하지만, 오릭스의 훈련량은 많다. 강도도 세다. 구장 전체를 쓰고, 일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두 개의 배팅케이지에서 타자들이 타격훈련을 하는 동안 내·외야 수비훈련, 주루훈련, 투수들의 스트레칭이 동시에 한 구장에서 진행됐다. 3루 쪽 파울 지역에선 포수들의 송구훈련이 이뤄지고 있었다. 전체 선수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셈이었다.
한국 같으면 타격훈련도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수비훈련이 진행되면 잠시 쉴 수도 있다. 외야에서 투수들이 몸을 푸는 건 자칫 타구에 맞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 그러나 일본은 외야에 그물망이 설치돼 타구로부터 투수들을 보호한다.
이대호도 계속 이어지는 훈련에 지치는지 타격훈련이 끝나고서 연방 땀을 닦았다.“오릭스는 확실히 훈련량이 많다.” 이대호의 고백이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그래도 훈련할 맛이 난다. 배팅볼도 실전처럼 정성껏 던지고, 원체 구단 스태프가 많아선지 훈련도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용품 지원도 엄청나다. 한국 같으면 필요한 용품을 선수가 사야 하는데, 일본은 구단이 전폭적으로 용품을 지원한다.”
이대호가 땀을 닦는 사이 요미우리 불펜포수 유환진이 다가왔다. 유환진은 일본 진출 한국선수들에겐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척의 돛단배 같은 존재다. 일본 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허우적대는 선수들이 있다면 언제든 그가 달려와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조성민, 정민태, 정민철, 이승엽 등 요미우리 진출 한국선수뿐만 아니라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뛰던 이병규도 유환진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이대호와 유환진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유환진은 쉴 새없이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이대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둘은 이미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오늘 처음 봤다. (이)대호가 야구후배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서로 이름은 들었을 테니까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유환진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었다.
“일본 투수들이 위협구를 던지면 가만히 있지 말라고 했다. 한국 선수들은 몸에 공을 맞아도 워낙 착해 고분고분하게 1루로 걸어간다. 하지만, 다른 외국인 선수들은 투수한테 바로 쫓아간다. 처음부터 얕잡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대호의 반응이 궁금했다.
“대호가 씨익 웃으면서 그러더라. ‘저도 성격이 있는데. 가만 안 있죠’”
유환진의 조언은 매우 중요했다. 일본투수들은 몸쪽 위협구를 자주 던진다. 타자를 움찔하게 만들어 타격 밸런스를 무너트리는 게 목적이다. 그래놓고 바깥쪽 공을 던져 타자는 꼼짝 못하게 만든다. 몸쪽 위협구는 내·외국인 타자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외국인 타자에게 다소 편한 마음으로 던질 뿐이다. 일본도 한 다리 건너면 죄다 선·후배 사이고,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관계라, 내국인 타자에겐 위협구를 던져도 덜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외국인 타자는 첫 위협구가 중요하다. 한번 참고 넘어가면 또 위협구가 날아온다. 이승엽이 대표적이다. 이승엽은 일본 야구인들이 꼽는 역대 최고의 한국 선수다. 성적은 둘째 치더라도 일본인들이 ‘존경한다’고 말할 만큼 인성이 좋았다. 야구를 대하는 자세도 늘 진중했다. 한국선수들이 팀을 떠나면 꼭 한마디씩 뒷말이 나오지만, 이승엽과 선동열 (KIA 감독)만 유이하게 뒷말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좋으면 꼴찌한다’고 이승엽은 너무 착했다. 위협구가 날아오면 투수를 힐끗 쳐다볼뿐 조용히 1루까지 걸어갔다. 그래서 일본을 떠날 때까지 계속 위협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과거 두산에서 뛰던 주니치 시절의 타이론 우즈는 달랐다. ‘위협구다’ 싶으면 바로 투수를 향해 뛰어갔다. 주먹다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새 우즈는 ‘악동’이 됐고, 소문은 금세 퍼졌다. 일본 투수들은 벤치에서 위협구 사인이 나와도 우즈가 타석에 서면 망설였다. 우즈는 ‘악동 효과’를 톡톡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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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불펜포수 유환진(사진 오른쪽)이 이대호(등번호 25)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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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도 잘 알고 있었다. 스프링캠프에서 이미 “고의적 위협구가 들어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의 발언은 순식간에 리그 전체로 퍼졌다.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훈련을 지켜보는 <스포츠춘추> 옆으로 한 일본 스포츠전문지 기자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호 선수가 한국에 있을 때도 성격이 다혈질이었나?”
‘이대호의 선한 얼굴을 보면 도저히 그 발언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스포츠춘추>는 ‘스포츠를 바라보는 내눈은 문맹이며, 색맹이다. 인종과 국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국제경기라도 어느나라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 않고, 진실을 전달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우정이 우선할 때도 있다.
“롯데 시절 별명이 ‘사직 휘발유’였다. 자극하지 않으면 순한 양이지만, 한번 도발 당하면 꺼질 줄 모르고 불타오른다. 조심해야 할 선수다.”
순간, 일본 기자는 암 선고를 내리려는 의사를 바라보는 것처럼 <스포츠춘추>의 눈을 피했다. (차후 일본 신문에 이대호를 ‘사직 휘발유’라고 표현하면 원작자는 <스포츠춘추>다.)
훈련이 끝났다. 이제 경기다.
이대호 “공을 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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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일본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벌어진 오릭스-요미우리 시범경기(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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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사야 한다. 이대호를 가까이서 보려면 그 방법밖엔 없다. 기자석은 너무 위에 있다. 매표소에서 본부석 표가 얼마인지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5천 엔”. 우리 돈으로 6만7천 원이다. 꽤 비싸다. 시범경기임을 고려하면 체감 가격은 더 비싸다. 하지만, 일본은 시범경기에도 푯값을 받는다.
표를 사 다시 입장한 교세라돔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요란한 록음악과 선수들을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구장 안에 퍼졌다. 자리에 앉을 때였다. 장내 아나운서가 ‘1루수 이대호!“를 호명하자 전광판의 ’4‘라는 숫자에 불이 들어왔다. 이날 경기에 이대호는 4번 타자 1루수로 선발출전했다.
오릭스 선발 투수는 외국인 투수 에반 맥레인(29).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1패 평균자책 9.00.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좌완이었다. 한때 한국 스카우트들의 영입리스트에 올랐던 선수다. 지난해 오릭스에선 3승3패 평균자책 4.50을 기록했다. 맥레인이 오릭스에 뛰는 건 젊은 나이와 비교적 저렴한 연봉 때문이다. 그의 올 시즌 연봉은 4천만 엔이다.
경기 전 오카다 감독은 <간사이 TV>의 유명 해설가 다오 야쓰시에게 “올 시즌 꼭 제역할을 해줘야 할 선수”로 맥레인을 꼽았다. 그리고 야수 가운덴 이대호를 지목했다. 두 선수가 동시에 출전했으니 오릭스로선 매우 중요한 시험대였다.
맥레인의 공은 좋았다. 속구 구속은 시속 140km를 살짝 넘는 수준이었으나, 변화구가 뛰어났다. 특히나 체인지업이 좋았다. 제구 역시 빼어났다. 요미우리 타자들은 맥레인의 공을 배트에 정확히 맞추지 못했다.
이제 이대호였다. 요미우리 선발투수는 사와무라 히로카즈였다. 2011년 11승11패 평균자책 2.03을 기록하며 이해 센트럴리그 신인왕에 오른 요미우리의 차세대 에이스였다. 요미우리가 자랑하는 신진 에이스와 한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와의 맞대결은 그래서 관심이 갔다.
2회말 첫 번째 타석에 들어선 이대호. 사와무라는 이대호를 상대로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이대호는 참았다. 다음 공도 바깥쪽이었다. 이번엔 이대호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그러나 파울. 이대호는 다소 몸쪽을 의식하는 듯했다. 결과는 다시 바깥쪽 속구였다. 이대호의 배트는 돌아갔고, 타구는 유격수쪽으로 평범하게 굴러갔다. 내야 땅볼 아웃.
두 번째 타석은 3회말에 찾아왔다. 2사 3루의 득점권 상황이었다. 이대호는 앞선 타석보다 더 신중했다. 이제는 몸쪽 공이 올만도 했다. 그러나 이 타석에서도 포수 아베 신노스케는 집요하게 바깥쪽 공을 요구했다, 이대호는 높은 변화구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세 번째 타석이었던 5회말도 2사 2루의 득점권이었다. 롯데에서 뛸 때 이대호는 찬스에 강했다. 지난해에도 이대호의 득점권 타율은 3할8푼5리나 됐다. 사와무라는 포크볼로 이대호를 유인했다. 이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작 이대호가 스윙한 건 또 다시 들어온 바깥쪽 속구였다. 타구는 컸다. 우측으로 강하게 날아갔다. 관중석에서 “앗!”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결과는 우익수 플라이 아웃이었다.
경기 전 “공을 띄우는 훈련을 하고 있다”는 이대호의 말이 생각났다. 실전에서 공을 외야로 보냈으니 오늘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대호는 6회초에 대수비로 교체됐다.
3월 13일 오릭스 4번 타자 이대호의 3타석 영상(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날 오릭스는 요미우리에 4대 0 완봉승을 거뒀다. 맥레인은 5회까지 1안타만 허용하고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반면 타선의 키플레이어였던 이대호는 3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시범경기 타율이 1할7푼6리까지 떨어졌다. 홈런과 타점은 1개도 기록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날 오릭스는 요미우리에 4대 0 완봉승을 거뒀다. 맥레인은 5회까지 1안타만 허용하고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반면 타선의 키플레이어였던 이대호는 3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시범경기 타율이 1할7푼6리까지 떨어졌다. 홈런과 타점은 1개도 기록하지 못한 상태였다.
경기가 끝나고서 오카다 감독은 “맥레인의 투구가 발군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대호에 대해선 일절 평하지 않았다. 일본 기자들은 “오카다 감독은 ‘알아서 잘할 선수’와 관련해선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고 들려줬다.
이대호, 오릭스의 구원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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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의 홈구장 교세라돔 전경(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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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라돔. 일본 오사카의 랜드마크다. 오사카의 명물인 ‘다코야키’와 외양이 비슷해 ‘다코야키돔’이라고도 불린다. 언뜻 서민적인 돔구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아니다. 총 공사비가 500억 엔(약 6천700백억 원)이나 들어간 초호화 돔구장이다.
1997년 교세라돔은 야구뿐만 아니라 대형 콘서트를 열 수 있는 다목적 구장으로 완성됐다. 그 때문에 외야 전광판 위에 보면 커다란 무대 장치가 달려있다. 지붕도 높낮이를 조절하도록 설계했다. 야구 경기 시는 타구가 닿지 않도록 천장을 높이고, 콘서트 시는 소리가 잘 들리도록 천장을 자동으로 낮추는 방식이다. 이런 시설 때문에 <아라시>, <스마프>, <긴키 키즈> 등 유명 인기그룹이 교세라돔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최근엔 한국의 <동방신기>, <슈퍼주니어>가 교세라돔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한다면 교세라돔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간’이다. 아니 실패한 구장이다. 이유가 있다. 먼저 야구전용구장이 아닌 까닭에 야구 관전에 애로가 많다. 구장 모서리 부분에 앉으면 경기를 관전하기 어렵다.
매점을 비롯한 편의시설도 부족하다. 2층 매점은 여타 일본 구장에 비해 배 이상 적다. 다른 구장처럼 음식을 먹으면서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화장실도 충분하지 않아 여성 팬들은 관중이 적은 시범경기임에도 줄을 서 있었다.
돔구장이기에 운영비는 엄청나다. 지금은 사라진 긴테쓰 버펄로스는 해마다 50~60억 엔을 내고 교세라돔을 빌렸다. 우리 돈으로 800억 원이 넘었다. 하지만, 구장 운영권을 얻지 못해 매점과 용품 수익을 모두 가져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적자는 눈덩이처럼 쌓였고, 결국 오릭스와 통합하는 선에서 구단을 정리했다.
따지고 보면 오릭스도 비슷하다. 교세라돔처럼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르다. 모그룹 오릭스는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금융그룹이다. 부동산 및 기업투자, 캐피탈과 리스업 등으로 자산 규모만 110조 원에 이른다. 하지만, 구단 운영은 반대다.
사실 오릭스는 NPB 12개 구단 가운데 대표적인 비인기 팀이다. 센트럴리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는 퍼시픽리그 소속이고, 오릭스의 연고지인 간사이 지역엔 요미우리와 어깨를 겨루는 최고의 인기팀 한신 타이거스가 버티고 있다.
지난해 평균 홈관중도 1만9천458명을 기록했다. 12개 구단 가운데 8위였다. 그러나 돔구장을 홈으로 쓰는 6개 팀 가운덴 최하위였다. 돔구장 효과를 봐서 그 정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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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와 중심타선을 함께 할 T-오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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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 없으면 성적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오릭스는 그렇지도 않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퍼시픽리그 상위클래스(1~3위)였던 적이 2008년 한번밖에 없다. 대부분은 하위클래스(4~6위)였다. 같은 기간 꼴찌를 5번이나 했다. 선수단 투자에 인색했기 때문이다. 극명한 예가 있다. 2010년 한신 타이거스를 방문했을 때다. 한신 고위관계자는 “올 시즌 선수단 총연봉이 35억 엔“이라며 “48억 엔의 요미우리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밝혔다. 48억 엔이라, 한국으로 치자면 2개 팀의 운영비를 합친 돈이었다.
이 관계자는 “일본 구단 대부분이 23억 엔 이상의 총연봉을 지출한다”면서 “예외가 있다면 센트럴리그에선 히로시마 도요카프, 퍼시픽리그에선 오릭스”라고 귀띔했다. 사실이었다. 그해 오릭스의 선수단 연봉은 19억 엔으로, 히로시마보다 3억 엔이 높았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릭스는 일본에서 ‘짠물 구단’으로 통한다. 그런 오릭스가 외국인 선수 이대호에게 2년 동안 7억 엔을 안긴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릭스 구단 관계자는 “팀 성적 향상을 위해 좋은 선수를 영입해야 했고, 이대호가 그 적임자로 생각해 큰돈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4위에 올랐다. 69승 7무 68패로 승률 5할4리를 기록했다. 투수력은 괜찮았다. 다만, ‘팀 타선을 이끌 강타자가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대호라면 진정한 적임자일지 몰랐다.
그렇다고 오릭스가 밑지는 장사를 하는 건 아니다. 모그룹이 돈을 만지는 회사이니만큼 손해날 장사는 하지 않는다. 오릭스는 한국의 모 방송사에 40~50억 원의 중계권료를 받고 홈경기 중계권을 판 상태다. 2년이면 많게는 100억 원이다. 이대호의 몸값과 얼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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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의 성공을 확신하는 NHK 해설가(시계방향으로), 유환진, 다노 캐스터, 교세라돔에서 일하는 재일교포 3세 리 키타자와 씨(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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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다시 교세라돔을 찾았다. 이날도 오릭스는 요미우리와의 시범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오후 1시 경기라, 이대호는 오전 9시부터 구장에 나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대호의 훈련 태도는 이날도 인상적이었다. 쉴 새 없이 땀을 흘리면서도 적극적으로 팀 훈련을 수행했다. 동료 투수 기사누키 히로시와 내야수 기타가와 히로토시는 이대호를 가리켜 “고연봉자임에도 매우 겸손하고, 성실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덧붙여 “매우 사교성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이대호는 훈련 중 동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항상 환한 표정으로 상대를 대했다. 경기 중에도 젊은 투수들의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오릭스 관계자들도 이대호를 매우 좋게 평가했다.
“해맑은 선수다. 성격도 밝아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있다.”
일본 기자들은 아예 이대호의 팬이었다. “일본 선수들과는 달리 코멘트를 요청해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매우 겸손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이유였다. NHK의 해설위원은 이대호를 “굿 보이(Good Boy)"라고 하며 ”매우 친절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대호는 “되레 동료들과 팀 관계자들이 잘 대해줘 일본 생활에 무리없이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나 오카다 감독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오카다 감독님께서 너무 절 믿어주셔서 오히려 죄송할 정도에요. 정말 감사한 분이에요.”
한신 사령탑 시절 오카다 감독은 외국인 선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놓고 핀잔을 줬다. 성적이 나쁘면 가차없이 자기 팀 선수라도 공격했다. 오죽했으면 “오카다 감독은 외국인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퍼졌겠는가. 그런 오카다 감독이 시범경기 타율 1할대의 이대호를 가만히 지켜보며 무한신뢰를 보내는 건 생경한 장면이다. 이대호는 "코칭스태프가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는 만큼 충분한 개인훈련으로 이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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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나고 오카가 감독이 승용차를 타고 구장을 빠져나가자 일본 기자들이 일렬로 서서 인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선 기자가 '갑'이지만, 일본에선 철저히 선수가 '갑'이다. 감독은 '하늘'이다. 경기가 끝나고 일본 기자들이 선수에게 코멘트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이 주차장이다. 이 주차장에서 일본 기자들은 기본 2시간 이상을 기다린다. 선수와 3, 4분 남짓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다. 외국 기자들은 일본 언론 환경에 적응하는 게 무척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사정이 이런데 야구는 오죽하겠는가. 결국 이대호의 성공여부는 적응의 문제이자, 기다림의 문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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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경기에서도 이대호의 타순은 4번이었다. 포지션도 1루였다. 플레이볼! 전날 경기에서 사와무라를 상대로 3타수 무안타에 그친 이대호는 칼을 갈았다. 하지만, 상대투수는 사와무라보다 한수 위였다. 바로 왼손 에이스 우쓰미 데쓰야였다. 지난해 18승을 거둔 우쓰미는 제구와 변화구 구사능력이 뛰어난 투수다.
1회말 오릭스에 찬스가 찾아왔다. 2사 3루. 타석엔 이대호. 전날 두 차례의 득점권 찬스를 살리지 못한 이대호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타석에 섰다. 선구안은 좋았다. 우쓰미의 변화구 볼을 잘 참았다. 하지만, 우쓰미는 속구로도 유인구를 던질 줄 안다. 그 공에 속은 이대호는 2루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3회말 찬스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2사 만루. 0대 1로 뒤지던 오릭스는 4번 타자의 시범경기 첫 타점을 간절히 원했다. 이대호는 타석에 서서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였다. 2구는 바깥쪽으로 빠진 볼. 3구 역시 낮은 볼이었다. 자, 이제 배팅 찬스다. 예상대로였다. 이대호의 배트가 돌아갔다. 그러나 1루 옆을 스치는 파울볼. 지난해 우쓰미는 우타자를 상대로 투스트라이크 투볼에서 바깥쪽 변화구를 주로 던졌다. 데이터가 적중하길 바랄 뿐이다.
순간, 이대호의 말이 떠올랐다. 4번 타자의 중압감에 대해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4번 타자는 팀의 중심이다. 책임감이 막중하다. 중요할 때 한방을 쳐야 한다. 사실 부담이 많이 되는 타순이다.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성적을 냈지만, 일본에선 나도 걱정 반, 기대 반이다.”
부산 팬들은 2사 만루에서 이대호의 멋진 그랜드슬램을 원했다. 오릭스 팬들도 다를 게 없다. 가뜩이나 이대호는 공을 멀리 띄우기 위한 스윙훈련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 홈관중석에서 “이대호 홈런!”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쓰미의 커브가 바깥쪽 타자 무릎 높이로 떨어졌다. 데이터는 맞았다!
“딱!”
하지만, 타구는 예상과 달랐다. 외야로 뻗어 나가지 않았다. 기대했던 홈런이 아니었다. 반대였다. 내야로 빠르게 굴러갔다. 이번에도 땅볼 아웃인가.
“이대호! 와-”
홈관중이 일제히 일어서자 알았다.1, 2루를 관통하는 우전안타인 것을. 그랬다. 이대호는 홈런 욕심 대신 정교한 타격으로 타점을 생산하려 했다. 등에 적힌 등번호보다 유니폼 앞면에 새겨진 팀명에 집중한 것이다.
이 안타로 2득점한 오릭스는 요미우리에 2대 1로 역전했다. 오카다 감독은 박수를 치며 1루에 안착한 이대호를 격려했다. 그러나 이대호의 표정은 담담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대호는 국내에 있을 때 809타점을 기록한 베테랑이다.
5회말 이대호는 우쓰미와 세 번째 대결을 펼쳤다. 초구는 커브. 스트리이크였다. 2구도 몸쪽 속구로 스트라이크였다.
경기 전 일본 프로야구 경력 12년 차의 유환진은 “일본투수들은 투스트라이크엔 거의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조심성이 유별나다”고 했다. 유환진은 이대호에게도 같은 조언을 들려준 바 있다.
어쩐지 이대호가 공을 기다릴 것만 같았다. 예상이 맞았다. 이대호는 우쓰미의 3구째 가운데 들어오는 속구를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3구 삼진. 3타수 1안타를 기록한 이대호는 6회초 대수비로 교체됐다.
경기가 끝나고 이대호는 “앞선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서 세 번째 타석에선 ‘우쓰미의 공을 많이 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3구 모두 스트라이크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 조금 창피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3월 14일 주니치-요미우리전에서의 이대호 3타석 동영상(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타점 적시타를 기록했지만, 어쩐지 이날 타격도 ‘이대호답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전날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뭐랄까. 커튼 속에 무언가를 감춰둔 느낌이랄까.
2타점 적시타를 기록했지만, 어쩐지 이날 타격도 ‘이대호답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전날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뭐랄까. 커튼 속에 무언가를 감춰둔 느낌이랄까.
“지금은 일부러 안 치는 면도 있다.” 이대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우쓰미가 여러 구종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상대가 실전처럼 베스트로 던지지 않는데, 내가 굳이 그 공을 잘 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요미우리는 우리 팀과 같은 리그도 아니다. 백스톱 뒤에 퍼시픽리그 팀들의 전력분석원들이 진을 치고 있다. 굳이 내가 잘 치는 코스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오릭스 코칭스태프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대호가 계속 공을 보다 삼진을 당해도 코칭스태프는 전혀 말이 없었다. 묵묵히 이대호가 스스로의 단계를 밟아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이대호는 일본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서도 솔직한 입장을 털어놨다.
“확실히 스트라이크 존이 한국보다 넓긴 넓다. 그렇다고 구심을 탓할 이유는 전혀 없다. 구심이 바깥쪽 빠진 공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한다면 그게 바로 스트라이크다. 심판과 싸울 필요도 없다. 그 공을 쳐내는 게 내가 해야할 일이다.”
이대호는 한발 나아가 한일 양국의 야구 차이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한국과 일본 야구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야구는 어디든 똑같다.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부진했다? 몸쪽공 때문에 못했다? 그건 부진을 설명할 이유들이 못 된다. 다 핑계다. 내가 열심히 하면 성적이 나오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성적이 나쁠 뿐이다. 중요한 건 일본에서도 내 야구를 할 수 있느냐다.”
이대호의 진단은 정확했다. 그는 실패를 대비한 변명거리를 찾을 시간에 한 방울의 땀이라도 더 흘리는 걸 선택했다. 그래서 이대호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정규 시즌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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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 이대호(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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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로 출발할 때 가장 많이 듣던 질문이 있다. “과연 이대호가 일본에서 성공할 것 같으냐”는 것이다. 질문을 그대로 받아 일본 야구전문가들에게 물었다. 립서비스는 사양하겠다는 전제를 달았다.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성공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태균이 지바롯데 마린스에 입단할 때도 똑같은 답변을 들은 바 있었다.
<스포츠춘추> 역시 김태균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봤다. 그라면 일본 투수들의 몸쪽공과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당당히 맞서리라 예상했다. 김태균처럼 힘과 정확성을 갖춘 타자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은 다소 빗나갔다. 이대호는 어떨까.
한 일본 기자가 한 말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김태균 선수보다 이대호 선수의 성적이 훨씬 좋지 않았나?”
“한국에 있을 때도 김태균 선수보다 이대호 선수의 성적이 훨씬 좋지 않았나?”
일본 야구인들은 이대호가 더 빨리 일본야구에 적응하려면 몸쪽 대처법을 익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대호도 잘 알고 있다. 몸쪽 대처법엔 두 가지가 있다. ‘몸쪽 공을 잘 치든가, 아예 치지 않든가’다.
요미우리 포수 아베는 몸쪽 공에 매우 강한 선수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타격훈련 때도 특별히 몸쪽 공 공략훈련을 한다. 하지만, 아베는 중학교 때부터 몸쪽 공을 잘 쳤다. 그리고 아베라고 해서 일본 투수들이 몸쪽 공을 던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베가 정말 몸쪽 공 공략법에 능한 건 몸쪽이라도 스트라이크가 아니면 스윙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쪽 꽉 찬 공에 강한 타자는 거의 없다. 만약 그런 타자들이 넘쳤다면 타율 4할 타자들이 득세했을 것이다. 유환진은 “욕심을 자제하면 몸쪽 공을 기다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꽉 찬 몸쪽 공은 쳐도 내야 땅볼이다. 치지 않으면 거의 볼이다. 일본도 몸쪽 공엔 그리 후한 편이 아니다. 욕심을 부려 그런 공을 치는 게 문제다. 욕심을 버리고 기다릴 때 몸쪽 승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대호도 유환진의 조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듯했다.
“타석에서 투수가 좋은 공을 주지 않는데 억지로 따라갈 생각은 나도 없다. 억지로 치면 타격 밸런스만 무너지고, 타율만 떨어질 뿐이다. 상대가 나를 피한다면 나도 참을 것이다.”
사실 이대호는 국내에 있을 때 참을성이 강한 타자는 아니었다. ‘이 공이다’ 싶으면 배트가 나왔다.
“맞다. 내 성격이 공을 보고 치는 스타일은 아니다. 좋아하는 공이 오면 빨리 치는 성향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 무대에선 이토록 신중한 것일까.
“정규 시즌이 시작하면 지금처럼 가만있지 않을 거다. 지금과 분명히 다를 거다. 적극적으로 투수와 상대할 테니 지켜보라.”
이대호는 진화하고 있다. 일본 야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하려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대호에게 올 시즌 목표를 묻는 건 그래서 섣부른 질문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대호는 이미 준비된 대답을 들려줬다.
“나는 오릭스 4번 타자다. 그리고 외국인 선수다. 내가 여기 온 건 홈런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나만 좋은 일이고, 내 이름만 알리는 일이다. 정작 내가 해야할 일은, 목표는 오릭스의 일본시리즈 우승이다. 롯데에선 맛보지 못했지만, 오릭스에선 꼭 한번 그 맛을 느끼고 싶다.”
많은 한국인 선수가 일본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들의 등 뒤에 쏟아진 건 ‘실패자’라는 비난이었다. 이대호의 지인들도 같은 이유로 “무모한 도전보단 보장된 현실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대호가 선택한 건 도전이었다.
“누구든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실패한 건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도전하면 실패와 성공 가능성이 각각 50%이지만,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 성공 가능성은 0%다.”
많은 한국인 선수가 일본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들의 등 뒤에 쏟아진 건 ‘실패자’라는 비난이었다. 이대호의 지인들도 같은 이유로 “무모한 도전보단 보장된 현실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대호가 선택한 건 도전이었다.
“누구든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실패한 건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도전하면 실패와 성공 가능성이 각각 50%이지만,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 성공 가능성은 0%다.”
이대호의 성공과 실패, 당신은 어느 쪽에 돈을 걸겠는가?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이미 이대호는 승자다. 큰 도전 끝에 실패는 언제나 용납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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